그는 ‘권력의 화신’이 아니라 ‘탁월한 리더’였다. 형제를 죽이고 정적(政敵)을 제거한 냉혈한 군주였지만, 위기를 노련하게 돌파하고 미래를 한발 앞서 설계한 눈 밝은 지도자였다. 조선 제3대 왕 태종 이방원(1367~1422) 얘기다.
내년 3월 대선을 앞두고 ‘태종 리더십’이 재조명받고 있다. 지난 주말 방송을 시작한 KBS 대하 사극 ‘태종 이방원’의 부제는 ‘가(家)를 넘어 국(國)으로’. 제작진은 “태종 이방원은 리더가 갖추어야 할 모든 자질과 권력자가 짊어져야 할 모든 숙명을 보여줬다”며 “격변의 시대를 가장 적극적으로 이끌었던 리더 이방원의 이야기를 풀어내겠다”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 이번 주 출간된 ‘태종처럼 승부하라’(푸른역사)는 권력의 화신이나 유교적 군주라는 종전 이미지를 걷어내고, ‘정치 9단자’ 태종을 포착했다. 저자 박홍규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오늘날 정치 지도자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태종은 한 줄기 빛이 될 것”이라고 썼다. 정치의 계절에 급부상한 ‘태종 리더십’의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
① 공(公)을 위해 사(私)를 희생하다
내년 초 ‘태종 이방원’ 출간을 앞둔 이한우 경제사회연구원 사회문화센터장은 “태종 리더십의 핵심 키워드는 바로 공(公)”이라고 강조했다. “우리는 지금 충(忠)보다 효(孝), 공보다 사가 득세한 세상에 살고 있지만, 태종은 재위 기간 18년 내내 머릿속에서 공의 개념이 떠난 적이 없다. 이방원이 아버지 이성계를 왕위에서 밀어낸 것은 불효지만, 그것은 대공(大公)의 길이었다.”
태종은 국가의 기틀을 세우기 위해 혈친과의 대립도 피하지 않았고, 개국 공신들을 토사구팽해 500년 조선의 경영권을 확실히 다져 놓았다. 집권에 혁혁한 공을 세운 처남 민무구·무질 형제를 비롯해 세종 장인이자 사돈인 심온까지 처단했다. 국가 경영에 사적 요소가 끼어들 여지를 철저하게 차단한 것이다. 박현모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은 “누가 차기 대통령이 되든 태종 같은 결단력을 가지고 사적인 위험 요소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했다.
재위 말년에 세자 교체를 단행하고 66일 만에 전격적으로 왕위를 물려준 다음, 세종의 정치 멘토로 말년을 보낸 것 역시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렵다. 박 소장은 “기업에서도 리더십의 마지막 단계는 차기 CEO를 누구에게 넘겨주느냐인데, 확실하게 기반을 닦고 보위를 안전하게 물려준 마무리는 세종도 하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 태종의 눈 밝은 선제 조치가 세종의 태평성대를 만든 반면, 미래를 제대로 대비하지 못한 세종의 일 처리가 결국 세조의 찬탈과 손자 단종의 비극적 죽음, 사육신(死六臣)의 죽음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 센터장은 “동양에선 공을 지극히 하는 것을 지공(至公)이라 해서 성군(聖君)이 갖춰야 할 첫째 덕목으로 삼았다. 태종의 지공은 패덕(悖德)한 장자인 양녕대군을 폐위하고 셋째 충녕을 세자로 올리는 결단을 내린 것이고, 스스로 상왕으로 물러나며 세자 충녕을 왕위에 올린 것이 최후의 지공이었다”며 “공이 붕괴한 현재 대한민국 정치권에 시사하는 점이 많다”고 했다.
② 미래 기획과 책임지는 리더십
태종의 리더십은 두괄식. 치밀하게 미래 그림을 먼저 그린 후에 현재 국면을 만들어갔다. 정도전을 제거할 때를 회상하며 태종이 쓴 표현이 ‘선발제지(先發制之·먼저 나서 사태를 제압한다)’다. 박현모 소장은 “태종은 탁월한 정보력과 판단력으로 사태를 파악한 다음, 상황을 유리한 쪽으로 이끌어 나가는 데 귀재였다”고 했다. 처남인 민씨 형제를 제거한 것도, 세종의 장인인 심온을 처단한 것도 외척과 권신을 제거해 후계자 세종의 통치 기반을 안정적으로 만들고자 함이었다는 것이다. 학계에선 “태종은 오명(汚名)은 자신이 받고 영광은 모두 세종에게 물려줌으로써 세종이 아무런 짐 없이 홀가분하게 국가 경영을 시작할 수 있게 판을 깔아줬다”고 평가한다.
박 소장은 “태종은 한마디로 책임지는 리더십을 보여준 인물”이라며 “우리가 한동안 책임지는 지도자를 못 봤기 때문에 더 값진 부분”이라고 했다.
경제적 성과도 빼놓을 수 없다. “백성들은 평화로웠고, 물산이 풍부해 창고가 가득 찼다.” 1422년 태종이 승하했을 때 받은 최종 평가다. 실록은 그의 재위 기간에 사방의 국경이 안전해 백성들이 전쟁 걱정 없이 살았다고 전한다. 고려 말 80만결이던 전국의 경작지가 태종 시대에 들어 120만결로 증가했다. 서울과 지방의 창고가 가득 차서 물로 주변을 에워싸 쥐의 침입을 막아야 할 정도였다.
③ 政敵의 아들이라도 능력 있으면 등용
태종은 철저하게 능력 위주로 사람을 평가해 적재적소에 썼다. 정적(政敵)의 혈친이라도 필요하면 중용했다. 정몽주의 두 아들에게 벼슬길을 열어줬고, 정도전의 아들 정진은 판서까지 올렸다. 태종실록에 나주목 판사 임명을 앞두고 두 사람을 고민하다가 좌의정 성석린에게 의견을 구하는 대목이 나온다. 성석린이 ‘일을 처리하는 재주는 정진이 낫다’고 하자 태종은 곧바로 그를 임명했다. ‘정도전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조선 개국을 반대한 목은 이색의 자식과 문인들도 품어 안았다.
태종이 인재를 쓰는 안목은 세종·세조 시대까지 영향을 미친다. 세종 시대 주역인 황희, 맹사성, 조말생, 장영실은 모두 태종이 발탁해 키운 사람이고, 세조 때 정승이 된 정인지는 태종이 장원급제자로 직접 뽑았다. 태종실록엔 “내가 전라도 절제사를 했다고 해서 전라도 사람만 등용해야 되느냐”고 신하들에게 따져 묻는 태종의 육성이 나온다. 이한우 센터장은 “태종은 조선의 왕 중에서 과거 시험에 합격한 유일한 왕이었고, 어떤 사람이 어느 자리에 적당한지 늘 공부가 돼있었다”며 “차기 대통령도 인사로 태종의 등용술을 보여줬으면 좋겠다. 코드만 따지고 자기 편만 쓸 게 아니라 반대파라도 유능하면 발탁하라는 게 국민이 바라는 리더십”이라고 했다.
④ 사람 보는 눈
지도자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사람을 보는 눈. 태종은 사람을 판별할 때 ‘곧음[直]’ 여부를 잣대로 삼았다. 곧음이란 스스로의 원칙에 입각해 덕(德)을 기르고 의(義)에 따라 행동하는 자세를 말한다. 이한우 센터장은 “태종이 ‘직’을 말한 사례를 전부 검색했더니 강직(剛直), 공직(公直), 충직(忠直), 눌직(訥直·말은 어눌하지만 마음속은 곧음) 등 열세 유형이 나왔다”고 했다. 최고의 ‘직’은 순직(純直). 마음속에 간사함이 조금도 섞이지 않고 곧다는 뜻으로, 아들 세종의 품성을 이렇게 평했다. 태종 18년(1418) 세자 충녕에게 전위(傳位)할 뜻을 밝히며 “세자는 순직하니 임금을 맡을 만하다”고 말한다. 더할 나위 없는 칭찬이다.
측근인 하륜과 조영무를 중용한 것도 ‘질직(質直·바탕이 곧음)’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신하들이 하륜에 대해 불평하자 태종은 “하륜이 다질소문(多質少文)하다”고 달랜다. 바탕은 곧은데, 그걸 부드럽게 잘 표현해내지 못하는 성미이니 이해하라고 편을 들어준 것이다.
⑤ 탁월한 외교력
박현모 소장은 “조선의 군주 중에서 외교를 가장 잘한 사람”으로 단연 태종을 꼽았다. 태종 시대에 들어서 패권국 명나라와 국교가 정상화됐고, 일본·여진 등 주변국과 맺은 관계가 자리 잡혔다. 당시 신하들도 ‘태종의 외교력’을 국경 안전의 이유로 꼽았다. “명나라 천자가 사대(事大)의 지성(至誠)을 칭송하고, 왜국이 교린(交隣)의 도(道) 있음에 알고 복종했다.”(세종실록)
정안군 시절 명나라 황제 주원장을 만났을 때 그의 외교력이 한껏 발휘된다. 당시 산전수전 다 겪은 67세의 주원장은 확고한 요동 지배를 위해 조선을 압박하기 시작했고, 외교 문서의 어투를 문제 삼아 아예 국교 단절을 선언했다. 그런 상황에서 ‘인질’로 간 조선의 왕자 이방원은 주원장의 의혹을 씻어 외교 갈등을 해결한다. 이한우 센터장은 “위험을 감수하고 두 차례나 명나라 금릉을 다녀온 경험이 훗날 태종에게 중요한 외교 자산이 됐다”며 “조선의 실상을 명나라와 비교하면서 조선 영토에 대한 현실적 감각과 세계에 대한 열린 시야를 갖게 됐다. 한반도의 지도자가 갖춰야 할 중요한 조건은 뛰어난 외교 역량이라는 점을 새삼 보여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