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미술계 최고 인플루언서로 꼽히는 방탄소년단 리더 RM(본명 김남준)이 이번엔 미국 미술계를 들썩이게 하고 있다. 최근 미국 콘서트를 끝내고 장기 휴가에 들어간 RM은 지난 6일 ‘rkive’란 이름의 개인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었다. RM의 첫 글자 ‘R’에 ‘아카이브(archive·기록 저장소)’를 합성한 이름이다.
계정을 열자마자 RM은 미국에 머물며 미술관 투어 중인 모습을 잇따라 올렸다. 방문을 인증한 곳은 텍사스의 치나티 파운데이션(Chinati Foundation)·메닐 컬렉션(Menil Collection)·로스코 예배당(Rothko Chapel)·휴스턴 미술관, 워싱턴 D. C. 근교 글렌스톤 미술관(Glenstone Museum), 뉴욕 디아 비컨(DIA Beacon) 등이다. 대부분 누구나 알 만한 대중적인 미술관이 아니라 전문가들도 한번 가보는 게 꿈인 곳들이다. RM 동선을 따라 ‘랜선 미술관 투어’를 즐기는 이들까지 등장했다.
코스를 보면 ‘텍사스’를 주 무대로 선택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정연심 홍익대 예술학과 교수는 “보통 한국 사람들은 미국 미술 하면 뉴욕, 보스턴, LA 등을 떠올리는데 2000년대 들어 미국 현대미술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떠오른 곳이 텍사스”라며 “오일 머니를 바탕으로 한 부호들의 컬렉션이 워낙 좋은데 접근성이 떨어져 가기가 쉽지 않다. RM이 간 걸 보면 진정한 애호가 같다”고 했다.
RM이 방문한 ‘메닐 컬렉션’은 텍사스 석유 재벌 슐룸베르거가(家)의 상속녀 도미니크 드 메닐과 남편 존 드 메닐이 만든 미술관이다. ‘이건희 컬렉션’을 언급할 때 빠지지 않는 미국 대표 컬렉션 중 하나다. 리처드 로저스와 함께 ‘퐁피두 센터’를 디자인한 거장 렌초 피아노가 설계한 미술관 건축으로도 유명하다.
RM은 이 미술관 정원의 떡갈나무 아래 앉아 찍은 사진을 올리면서 ‘ucchin vibe’라는 한 줄 설명을 곁들였다. ‘ucchin’은 화가 장욱진의 영어 이름이고 ‘vibe’는 ‘느낌’이란 뜻의 영어 단어. 장욱진 그림 속에 자주 등장하는 나무 아래 앉은 사람을 오마주(경의)해 찍고 ‘장욱진 느낌’이라고 쓴 것이다. 한국 화가 사랑을 은연중에 드러냈다.
또 다른 방문 코스 ‘로스코 예배당’ 역시 메닐 부부의 후원으로 1971년 만든 곳. 색면추상화가 마크 로스코의 대작 14점이 주인공인 예배당이다. 연못엔 미국 추상 미술을 대변하는 조각가 바넷 뉴먼의 ‘부러진 오벨리스크’도 있다.
RM 투어의 방점을 찍은 곳은 텍사스 마파(Marfa)에 있는 ‘치나티 파운데이션’. 미니멀리즘 거장 도널드 저드가 만든 미술관이다.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 저드를 비롯해 댄 플래빈, 리처드 세라 등 대가의 작품이 있다. 정 교수는 “치나티 파운데이션은 미니멀리즘의 산실”이라며 “1960년대 미니멀리즘은 ‘모더니즘의 종착역’이자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작점’이 된 미술 사조”라고 했다.
RM에겐 이곳을 방문할 수밖에 없었던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그가 열렬한 팬임을 밝힌 단색화가 윤형근의 특별전이 현재 열리고 있다. 윤형근은 1991년 전시차 방한한 저드와 만나 인연을 쌓은 후로 깊게 교유(交遊)한 사이. ‘윤형근 덕후’인 RM이 현지인에게 유창한 영어로 그의 작품을 설명하는 영상이 올라와 “이젠 큐레이터까지 하느냐”는 댓글이 달리기도 했다.
전시 설명차 RM을 몇 차례 만난 국립현대미술관 김인혜 근대미술팀장은 “미술 애호는 주로 한 작가에서 시작해서 주변으로 계속 가지치기를 하는데, RM은 윤형근을 출발점으로 김환기·유영국·장욱진 등 다른 근현대 작가로 관심을 확장했다”며 “어려운 시대에도 삶과 예술이 일치한 그들의 멋진 세계관을 자기 작업의 원천으로 삼는 것 같다”고 했다.
RM이 인증한 워싱턴 근교의 ‘글렌스톤 미술관’도 숨은 보석이다. 억만장자 미첼 레일스가 헬리콥터 폭발 사고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뒤 사회에 공헌하기로 마음먹고 큐레이터 출신인 아내 에밀리와 함께 연 미술관이다.
‘RM 로드’ 포함 여부에 따라 미술관들의 명암이 엇갈린다. RM에게 선택받은 미술관들은 쾌재를 부르며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지만, 그렇지 못한 곳에선 제발 와달라고 구애한다. 텍사스 포트워스의 ‘킴벨 아트 뮤지엄’은 트위터를 통해 “지금 터너 특별전이 열리고 있는 우리 미술관도 꼭 와달라”고 호소했다.
미국 미술관 투어로 이제 막 시작한 ‘알카이브(rkive)’가 머지않아 현대미술의 충만한 아카이브가 되기를, 그래서 언젠가 전 세계인이 ‘RM 컬렉션’을 보러 한국을 찾는 날이 오기를 고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