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순의 노(老)작가가 인터뷰에서 가장 많이 한 이야기는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1982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교정에선 매일같이 최루탄이 터질 때 아침에 눈을 떠보니 불현듯 머릿속에 ‘조각은 모르는 것’이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최종태는 “학자들이 예술이 무엇인지 많이 따져 놓았지만 그건 답이 아니다. 모른다는 것이 진짜 답”이라고 했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2009년 2월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한 강남성모병원 병실에는 최종태의 십자고상(十字苦像)이 홀로 남아 걸려 있었다. 법정 스님이 머물던 서울 성북구 길상사에는 성모마리아를 닮은 흰색 관음보살상이 머리에 화관을 쓴 채 지금도 서 있다. 최종태가 빚은 관음상이다.

‘하늘에 걸 조각 한 점.’

미술 좋아하는 사회과학자 김형국은 최종태(90)에 대해 쓴 책 제목을 이렇게 달았다. 그는 같은 서울대 교수로 학교를 오가는 교직원 버스 안에서 예술에 대해 묻고 답하는 ‘차중 문답’으로 최종태와 인연을 맺었다. 최종태는 인물 조각의 대가이자 성상(聖像)을 현대화하고 한국화한 주역. 절두산 성지의 순교자상(1973년)을 시작으로 명동 성당과 혜화동·연희동 성당 등 전국의 크고 작은 성당과 성지에 그가 만든 성상이 있다. 2018년 문재인 대통령이 교황청을 방문했을 때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선물한 ‘가시면류관을 쓴 예수 부조’와 ‘성모마리아상’도 그의 작품. 그는 지금도 새벽 4시에 일어나 매일 10시간씩 흙을 만진다.

문재인 대통령이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선물한 성모마리아상. /청와대 페이스북

최종태는 1932년 대전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4·19혁명 등 격동의 근현대사를 거치며 인물 조각, 특히 여인상에 천착했다. 한국 근대 조각의 선구자인 김종영과 서양화가 장욱진이 스승. 그는 여성적인 것은 전쟁·폭력과 거리가 멀다고 보고, 여인상이나 어머니상을 통해 전쟁과 폭력으로 얼룩진 한국 사회를 위로하고자 했다.

올해로 아흔 번째 성탄을 맞는 최종태를 만났다. 이달 31일까지 서울 종로구 평창동 김종영 미술관에서 ‘최종태: 구순을 사는 이야기’ 전(展)을 연다. 그는 “구순을 살았지만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겠다”고 했다. “예술과 인생과 진리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 하나만 알겠다”고도 했다. “작업할 땐 청년이고, 아닐 땐 환자”라며 빙그레 웃는 노(老)작가. 보청기를 끼고 지팡이를 짚었지만, 아직 온기 부족한 겨울 아침의 미술관에서 3시간 동안 자세 한번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 참된 일을 하면 즐겁다

–구십 평생에 많은 일을 겪으셨겠지만, 성당에 가지 못하는 성탄은 없었을 것 같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다. 올해 성탄은 다를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 기대가 무너졌다. 구순을 살며 코로나까지 겪을 줄은 몰랐다.”

–여전히 매일 작업하신다고.

“오전 4시에 눈을 뜨면 어제 하던 작업이 생각나, 참지 못하고 작업실로 내려가게 된다. 어제 한 작업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손이 간다. 아침 먹으라고 부를 때까지 하다가, 밥 먹고 작업실로 돌아온다. 코로나로 바깥에 나가지 못하니 올해는 일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었다.”

–아침에 눈 뜨면 ‘출근하기 싫다’는 생각부터 하는 사람이 많은데.

“내가 하는 일이 좋은 것, 참된 쪽으로 가면 즐거워진다. 나쁜 일을 하면 즐겁지 않다. 즐거움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간 것이 기쁨의 세계다.”

–70년 가까이 한 가지 일만 했는데, 진력나지는 않으시나.

“10년 전까지는 이렇게 힘든 걸 젊어서 알았더라면 안 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미수(米壽·88세)가 지나니 이제야 내 맘대로 그릴 수 있게 됐다.”

–선생님 같은 대가가 미수가 돼서야 마음대로 그리게 됐다니, 의외다.

“무엇을 만들까, 어떻게 만들까, 뭐로 만들까. 이런 생각하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다. 추사 김정희가 제주로 유배됐을 때 한 말이 있다. 법과 진리를 찾아 세상의 모든 글씨를 다 보고(입어유법·入於有法), 여기에서 나와(출어무법·出於無法), 이제는 내 방식으로 그리게 됐다(아용아법·我用我法). 추사가 제주도에서 쓴 글씨는 중국 역사에 없는 글씨다. 역사를 다 소화하고, 자기 식으로 썼으니까. 나 역시 이것 때문에 그렇게 어려웠다. 세계에 좋은 그림과 조각이 얼마나 많은가. 그렇게 본 것들이 내 머리에 남아, 로댕이, 미켈란젤로가 내 안에서 전쟁을 일으켰다. 그런데 5~6년 전부터 그 전쟁터가 조용해졌다. 이걸 다 소화하고 나니 없어진 것이다. 그 누구로부터 다 자유로워져 내 맘대로 그릴 수 있게 됐다.”

김형국 교수가 쓴 책 ‘하늘에 걸 조각 한 점’에 이런 대목이 있다. “1972년 최종태가 서강대 야외 마당에서 ‘현대공간회전’을 가졌을 적이었다. ··· 그 전시회를 구경 가서 장욱진은 작품 한 점이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생전에 그가 오갔던 화실을 다 가보았지만 거처에 당신과 인연이 있던 졸업생들 작품을 한 번도, 한 점도 본 적 없었던 장욱진의 화실인데, 그 사실을 최종태도 모를 리 없었다. ‘선배’의 인정이 황송했던 나머지 전시가 끝나자 리어카에 작품을 실어다가 장욱진의 명륜동 집까지 직접 날랐다.”

–한국 근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김종영, 장욱진을 스승으로 모셨다.

“두 분 다 옛말로 하면 도인에 가깝다. 일생 깨끗한 것, 진리 탐구에만 마음을 두고 옆은 안 쳐다보셨다. 안 쳐다본 게 아니라 못 쳐다본 것일지도 모르겠다. 두 선생님 밑에 있었기 때문에 나 역시 다른 건 보지 못하고 살았다. 나는 지금도 작품을 만들어서 팔지를 못한다. 우리 선생님도 그랬다. 두 분이 다 그걸 못하는 사람들이라, 그 양반들하고 놀다 나도 이렇게 된 것 같다(웃음).”

김종영 미술관에서 이달 31일까지 열리는 ‘최종태: 구순을 사는 이야기’에 전시된 작품들. 성모상과 기도하는 여인을 형상화한 것들이다. /김종영 미술관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인류를 이끈다

–인체 조각 중에서도 특히 여인상을 많이 빚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걸 사람들이 자꾸 물어본다. 의도를 가지고 그런 건 아니다. 나는 매일 같이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데, 결과는 늘 소녀상이었다. 어떨 때는 성모상이 되고 관세음보살상이 되기도 했다. 왜 그랬는지 나도 알 수가 없다. 이런 생각은 해 본 적이 있다. 괴테가 ‘파우스트’ 마지막에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인류를 높은 데로 이끌어간다’고 한 대목이 있다. 나 역시 이를 은연중 느낀 게 아닐까 싶다.”

–왜 여성적인 것이어야 할까.

“여성적인 것은 폭력적인 것이 아니다. 전쟁과 폭력이 아닌 배려와 수용, 어머니의 사랑과 인내 이런 것이 여성적인 것과 가깝다. 그런 단어들이 상징하는 세계를 늘 추구하고자 했다.”

–최종태 작품에는 남성 조각이 넷 있다고 하더라. 예수와 성 요셉, 그리고 최종태의 손자와 김수환 추기경.

“스승 두 분이 돌아가신 뒤 만난 분이 김수환 추기경이다. 참 좋았다. 예술과 종교는 성질이 똑같다. 오로지 진리 추구에만 매진하고, 다른 걸 못한다. 김 추기경은 주변 사람을 편하게 해 주고, 남의 사정을 잘 봐주는 성품을 타고나신 분이다.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 강남 성모병원에서 김 추기경을 마지막으로 만났다. 오후 1시 반에 간다고 했더니 환자복을 새로 갈아입고, 못 움직이는 상태에서 부축받아 의자에 앉아 계시더라. 내가 갔더니 자기 오른쪽에 앉으라고 한다. 오른쪽 귀가 더 잘 들린다면서. 그러더니 아주 웃기는 얘기를 30분간 하셨다. 매일 오전 혼자 미사를 드리는데, 그날은 밤새 잠을 못 주무시다가 그 시간에 깜박 잠이 들어 미사를 못 드리셨단다. ‘추기경이 늦잠 자다 아침 미사를 빠뜨렸다’고 첫마디를 시작하니, 폭소가 터졌다. 내가 병문안을 간 게 아니라, 추기경이 나를 기쁘게 해주려는 자리 같았다. ‘몸이 어떠시냐’는 말은 할 새도 없었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다. 몸이 형편없는 양반이 마지막까지 그렇게 했다.”

–추기경님 병실에 최종태의 십자고상이 걸려 있었다던데.

“강남 성모병원이 개원할 때 당시 장익 주교가 방마다 십자고상을 만들어 걸자고 제안했다. 천주교회 공공적 건물 안에 미술가의 작품이 방마다 걸린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처음엔 1000개를 만들었는데, 환자들이 병원에 왔다가 완쾌되면 그 십자가를 떼 가는 일이 있었다(웃음). 분실에 대비해 200개를 더 만들어서, 총 1200개를 만들었다. 30년이 흘러 김 추기경 병실에 계실 때 가보니 그때 내가 만든 십자고상이 걸려 있더라.”

서울 마포구 연남동 최종태의 집이자 작업실에 놓인 조각상들./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 참새들 안부부터 묻던 법정 스님

–법정 스님과도 오래 교우하셨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 병문안을 갔더니, 들어가자마자 ‘냉장고에 아이스케키 있으니 꺼내 먹으라’는 말부터 하시더라. 그러더니 자신이 일주일 후에 퇴원한다고, 퇴원하면 강원도에 눈 구경을 갈 거라고 하셨다. 퇴원은커녕 유서도 다 써놓고는 그렇게 말씀 하시는 거였다. 상대를 기분 좋게 해 주느라고. 내가 30년째 아침저녁으로 우리 집 마당 참새들에게 밥을 주는데, 우리 집에 올 때면 ‘참새들 잘 있느냐’ 하고 새들 안부부터 묻고 들어오는 분이 법정이다. 손에는 꼭 책 한 권을 들고 왔다.”

–그 인연으로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 관음상도 만드셨다.

“30대 후반 어떤 작품을 해나갈 것인가 고민할 때 반가사유상이 내게 왔다. 반가사유상이 상징하는 정신적 아름다움을 보고 ‘아, 이거다!’ 싶었다. 언젠가는 관음보살상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누가 이 얘기를 법정 스님에게 한 모양이다. 그가 ‘잘됐다’ 하며 즉시 우리 집으로 왔다.”

–반가사유상의 어떤 점에 매료된 건가.

“1970년 국전에서 추천 작가상을 받으면서, 부상으로 세계 여행을 가게 됐다. 그때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숱한 작품을 봤다. 그런데 아무리 아름다운 작품도 한 가지가 부족했다. 정신적인 미(美)다. 비너스를 떠올려 보라. 아름답긴 한데, 거기서 끝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석굴암 하고 반가사유상을 보면 설명할 수는 없는, 정신적으로 충만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불교라고 하는 위대한 사상이 형상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천주교 신자 아니신가.

“한번은 김수환 추기경을 만나 ‘내가 만약 관음상을 만들어서 절에다 놓으면 천주교에서 나를 파문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추기경이 웃으면서 괜찮다며, 일본 천주교 박해 시대 이야기를 해주셨다. 박해 당시 일본 천주교 신자들이 중국에서 관음상을 가져다가 그 뒤에 십자가 표시를 몰래 해놓고 기도를 했다. 관음상이니까, 천주교도가 아니라 보고 박해를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나가사키 순교 박물관에 가니 아기 안은 관음상이 있더라. 내면이 중요한 것이지 겉모양에 연연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 같았다. 땅 위에는 종교 간에 내 땅 네 땅 경계가 있지만, 결국 높고 깊은 데까지 가면 무슨 경계가 있겠나. 진리는 결국 하나다.”

서울 성북구 길상사의 관세음보살상. /조선일보DB

–국내 주요 성당에 선생님이 만드신 성상이 있다.

“1980년부터 성당 조각을 했다. 당시 우리나라에 종교 부흥이 일어 1년에 성당을 100개 이상 지었다. 그런데 그때만 해도 신도들이 국내 미술가들의 작품은 잘 받아들이지 못했다. 서양에서 만든 것이나, 그것을 본뜬 작품만 좋다고 생각해서 대부분의 건축을 외국 사람이 하고 외국에서 만든 걸 사다가 놓던 시절이었다. 그때 한국 조각가와 건축가가 그림 그리고 디자인할 수 있도록 앞장선 분이 김수환 추기경과 장익 주교다. 특히 장익 주교가 미술가 지도 신부였는데, 미술과 건축에 대해 굉장히 박식하셨다.”

–전시하실 때마다 실제 성당에 있는 성모상을 가져다 놓는다 들었다.

“사람들은 내가 다른 작품을 할 때와 성상을 만들 때 자세가 다른 것으로 여기고 그 점을 묻는다. 다른 것이 있을 리 없다. 그림은 삶의 반영이다. 성모상을 만들어도 성상이고, 꽃 한 송이를 그려도 마음 자세에 따라서는 성상이다. 그걸 보여주기 위해 성당에서 내가 만든 성상을 가져다 전시장에 놓는다.”

◇'반가사유상의 미소’ 향해 간다

‘깨끗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 좋은 그림은 타고나야 되는 것이라 한다. 그러나 깨끗한 그림은 노력하면 될 일이 아닐까. … 그림 그리는 일은 어제 묻은 때를 지우는 일이다. 때를 다 지울 수만 있다면 좋은 날 밝은 날을 살 수 있을 것 같다.’ <‘최종태, 그리며 살았다’ 40쪽>

최종태는 일평생 깨끗한 그림을 열망했다. 이는 그의 성격과도 닮았다. 동향 후배이자 지음(知音)을 자처한 시인 박용래는 ‘손끝에’라는 시에 “토담 너머 호박꽃 물든 노을 속 논둑 개구리 밟을가 봐 까치걸음하던 어린 날의 최종태”라고 노래했다. 단색화 거장이자 최종태의 절친인 윤형근은 그를 “꿔다 놓은 보릿자루”라고 불렀다.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 조용히 앉아 있던 친구에 대한 애칭이었다.

올해로 구순인 최종태는 매일 오전 4시에 일어나 자신의 집 지하에 있는 작업실에서 10시간 이상 흙을 만진다. “눈을 뜨면 어제 하던 작업이 궁금해서, 참을 수 없어 작업실로 달려간다”고 했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인생에서 가장 힘든 때는 언제였나.

“고등학교 2학년 때 6·25전쟁이 났다. 한 달이 못 돼 대전 사람들이 부산으로 피란 갔을 정도로 매우 급한 전쟁이었다. 피란 생활을 하는데, 김해·포항·마산 3면에서 대포 쏘는 소리가 매일 같이 들렸다. 그러다 국군이 올라가면서 휴전하고, 나는 대학생이 됐다. 당시 해외에선 다음 노벨 문학상은 한국에서 나온다고 했다. 세계 최악의 사태가 한국에서 발발했고, 여기서 나오는 예술이 현실을 가장 잘 증명할 것으로 봤다. 결국엔 잘 안 됐지만.”

–21세기에 이렇게 전염병이 창궐하리라고는 예상 못 했을 것 같다.

“난국이지만 온 국민이 합심해 타개해 나가리라 믿는다. 3·1운동은 경술국치 10년 만에 전 국민이 일어선 일이다. 세계 역사에 이런 일이 드물다. 4·19혁명은 불의에 온 국민이 항거했다. 이번 코로나 위기도 결국은 잘 이겨낼 것이다. 우리 국민은 근본 성품이 착한 사람들이다. 일본이 우리를 그렇게 침략했지만, 우리가 일본에 쳐들어간 적은 없다. 우리 예술에도 그게 잘 나타난다. 반가사유상, 석굴암을 보면 너무나 착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인류 조각사에 아름다운 건 많지만, 저렇게 착하고 아름다운 얼굴은 본 적이 없다.”

–요즘은 착하다는 게 칭찬이 아닌 시대다.

“인류가 추구하는 건 결국 ‘진선미(眞善美)’다. 선한 행동 속에 아름다움이 포함되는 것이 최고 가치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선생님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도 진선미인가.

“‘반가사유상의 미소’다. 그걸 최상의 경지로 보고 그쪽을 향해서 가려고 하는데, 나는 절대 그런 미소를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젊은 시절부터 내가 품은 세 가지 큰 의문이 있었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이고,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하며, 진리는 어디에 있는가. 구순이 돼 내린 결론은 ‘예술이 무엇인가’ 하는 건 결국 ‘인생이 무엇인가’와 같은 말이며, ‘진리란 무엇인가’와도 동일한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구도 이에 대한 정답은 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학자들이 예술이 무엇인지 많이 따져 놓았지만 그건 답이 아니다. ‘모른다는 것’ 하나만 알겠다.”

–선생님 조각을 보는 이들이 무엇을 느꼈으면 좋겠나.

“쉰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학교에는 매일같이 최루탄이 터졌다. 정신적으로 힘들고 사회적으로 혼란한 시기에 종교적 체험을 했다. 찰나의 순간 갑자기 내게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빛이 쏟아졌다. 사랑과 기쁨 덩어리가 모세혈관을 타고 온몸에 흐르는 듯했다. 지금까지도 이 순간을 생각하지 않는 날이 없다. 내 작품에 이 기쁨과 사랑이 조금이라도 묻어 있길 바란다.”

–일하지 않을 땐 환자라고 했지만, 너무 정정하시다. 비결이 있나.

“분수에 넘치는 욕심을 내지 않으려 한다. 나는 아흔 살이 되면 욕심이 끊어질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욕심이 없었으면 하는 욕심’을 낸다(웃음). 욕심이란 건 노력하지 않으면 떨어지지 않는다.”

–새해 바람이 있다면.

“요즘 TV를 보면 살인 사건 이야기가 너무 많이 나온다. 특히 어린아이를 죽이는 일이 허다하게 일어난다. 당나라 때 두보가 가장 큰 비극이 ‘부모가 자식 뼈를 추스르는 것’이라고 했다. 이런 비극은 없어야 한다. 또 하나는 정치건 예술이건 뭐든 다 갈라지지 않고 한 군데로 모였으면 좋겠다. 진리는 결국 하나다. 따로 갈 필요가 없다.”

–25일은 예수가 세상에 온 날이다. 선생님이 평생 지고 오신 십자가는 뭘까.

“프랑스에서 1차 대전이 끝났을 때 조루주 루오라는 화가가 동시대 유행하는 화풍 대신 노숙자, 외톨이, 매춘부 등 도시 뒷골목에서 고통받는 이들의 모습을 그렸다. 처음엔 누구도 루오를 주목하지 않았고, 돈이 없어 판화도 제작하지 못했다. 2차 대전이 끝나고서야 프랑스 사람들이 진짜 예술은 루오가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우리도 세계에서 가장 참혹하다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다. 당시 모두가 추상 미술로 갔지만, 전쟁을 겪고 나니 삶의 현장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인물로, 인체 조각으로 왔다. 요즘 미술계가 옛날과 확연히 다른 점은 예술이 아름다움만 추구한다는 점이다. 그림이 사람 사는 이야기와 별개가 되었다. 그러나 예술가가 세상이 아플 때 ‘나는 상관없다’고 하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그것이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나의 십자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