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시집 하나, 새로 읽고 싶은 것 하나. 그리고 이건 엄청 좋아하는 것. 가방에 항상 시집 세 권을 들고 다녀요.”
그의 검은색 에코백 안에는 3명의 시인들이 산다. 최승자, 에밀리 디킨슨, 비스와바 심보르스카…. 그중 가장 좋아한다는 시집은 1981년 출간된 최승자의 <이 시대의 사랑>. 시마다 연필로 시커멓게 밑줄 그은 흔적이 남아있다. 좋아한다는 구절 하나를 곧잘 읊기도 했다. 소싯적 문학에 빠져 살았던 청춘을 그리워하는 중년이냐고? 아니다. 그룹사운드 ‘잔나비’의 스타 보컬 최정훈(29)이 가방 속 아이템을 소개하는 유튜브 영상 중 일부다.
‘감상’ ‘퇴폐’로 상징되는 낭만주의 시를 찾는 MZ 세대가 늘고 있다. 기념일엔 정성껏 포장한 시집을 선물하고, 시끌벅적한 연말 모임 대신 서너 명이 모여 시를 읽는다. 언제 끝날지 모를 코로나 블루를 이겨낼 방법으로 시 읽기를 택한 것. 이들은 시 한 줄에 혼잣말 한마디를 덧붙이는 선문답으로 위로의 시간을 보낸다. 지난 20일까지 집계된 교보문고의 올해 시 분야 도서 판매율은 작년 같은 기간 대비 14% 증가했다.
MZ들이 시에 눈을 돌린 건 ‘힙한 건 더 이상 힙하지 않다’는 생각이 생겨나면서다. 힙(hip)은 촌스럽지 않고 멋있다는 뜻인데, 힙하려 애쓸수록 덜 힙해지는 것이 아이러니다. 악동뮤지션 이찬혁은 힙합 오디션 방송 ‘쇼미더머니’에 출연해 ‘어느새부터 힙합은 안 멋져’라는 가사의 노래를 불렀다. 이어진 가사에는 ‘우린 돈보다 사랑이’ ‘명품보다 동묘 앞 할아버지 할머니 패션’이라는 내용이 담겨 많은 팬들의 공감을 샀다. 대학생 김정민(21)씨는 “10년째 힙합을 즐겨 들었지만, 힙합이 더 이상 멋지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이찬혁의 가사에 동의한다”며 “서정적인 가사와 시가 오히려 마음에 와닿는다”고 말했다.
하필 시여야 하는 이유는 뭘까. “혹시 정원이 나를 정복할까봐/ 나는 아직 정원과 얘기해본 적 없다/ 이에 대해 벌에게 털어놓을/ 힘이 지금 내게 별로 없다”는 에밀리 디킨슨의 시 ‘아담, 사과를 내려놓아요’를 이해하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바로 시간과 체력. MZ 세대는 쉽게 떠먹여주는 콘텐츠보다 행간을 곱씹고 의미를 찾는 재미를 느낀다. 김씨는 “시를 읽는 건 무인도로 혼자 휴가를 떠나는 것”이라며 “생각에 빠질 체력과 시간이 필요한 비싼 취미 중 하나”라고 했다.
시를 즐기는 방식도 가지가지. 부산 남포동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김광욱(34)씨는 매주 소규모 시 모임을 연다. 20대로 이뤄진 구성원들이 각자 좋아하는 시 한 편씩을 소개한다. 김씨는 “짧은 글 안에 감정들이 함축되어 있고 곱씹는 맛이 즐거워 시 모임을 운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념일을 맞아 친구와 직장 동료에게 시집을 선물하는 사람도 늘었다. 직장인 백모(33)씨는 “남자친구의 생일날 세사르 바예호의 시집에 책갈피 여러 개를 끼워 선물했다”며 “편지를 쓰는 것보다 시인의 문장으로 내 마음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