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관철동 ‘종각 젊음의 거리’에 있는 한 돼지고기집. 점심 시간이 한창이었지만 식당 안에는 손님 3명만 식사를 하고 있었다. 손님보다 직원이 더 많았다. 바로 옆 족발집에는 손님이 한 명도 없어 직원 2명이 의자에 앉아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렸다. 비교적 가격이 저렴한 분식집이나 커피 가게도 한산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반면 길 건너 자리한 센트로폴리스·그랑서울·센터원 등 대형 건물의 지하 식당가에는 직장인들이 긴 줄을 선 채 식당에 입장할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종로 2가에서 11년째 포차를 운영하는 김석호(가명·59)씨는 “작년 말 집합금지가 잠시 풀렸을 때도 일주일 동안 4명 이상 단체 손님을 한 번도 받지 못한 적이 수두룩했다”며 “우리뿐 아니라 종로 상권 전체가 사람들이 찾지 않는 암흑지대가 돼버렸다”고 했다.
‘대한민국 상권 1번지’ 종로가 활력을 잃고 있다. 2000년대 초반까지 대학생·직장인 만남의 장소로 각광받던 종로가 이제는 인기가 시들해지면서 곳곳에 텅 빈 매장이 가득한 슬럼 지역이 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종로 일대 중대형 상가(3층 이상)의 공실률은 10.9%(지난해 3분기 기준)로 강남대로(9.7%), 을지로(7%)보다 높다. 계속되는 주변 상권의 부상과 경기 불황으로 허덕이던 종로는 코로나까지 겹치면서 대형 프랜차이즈 점포마저 빠져나가고 있다. 지난 2016년 맥도널드가 종로 1가에서 28년 동안 운영하던 직영 2호점 영업을 중단한 데 이어, 지난 3일엔 KFC 한국 1호점도 38년 만에 문을 닫았다. 종로 상권은 어쩌다가 무너진 걸까.
◇맥도날드·뱅뱅 이어 KFC까지
종로 일대는 조선 건국 이래 ‘한양(서울) 최대 상권’ 지위를 누려왔다. 주변 일대에 대기업이 많고, 인사동·청계천이 가까워 직장인과 20~30대는 물론 외국인 관광객도 많이 찾았다. ‘응답하라 1994′를 비롯한 인기 드라마·영화에서도 젊은이들의 데이트 장소로 수없이 등장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주요 대기업들이 강남, 판교로 옮겨가고 서울 상권이 세분화되면서 종로는 빠르게 힘을 잃었다. 종로구 한 공인중개사무소 관계자는 “젊은 소비층이 종로 대신 인근 광화문이나 익선동, 을지로로 떠난 지 오래”라며 “종로는 이제 ‘젊음의 거리’가 아닌 ‘공실의 거리’가 됐다”고 말했다.
5일 오후 종각역 사거리에서 종로3가역까지 걸었다. 큰길을 따라 건물 하나 건너 ‘임대’ 딱지가 붙어 있었다. 25개 건물을 지나면서 1층 목 좋은 곳에 난 공실만 해도 10개가 넘었다. 굳게 닫힌 가게 문 앞엔 대출 문의 전화번호가 적힌 명함이나 다른 가게의 광고판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몇몇 건물은 통째로 임대로 나와 있었다. 종로 상권의 중심인 ‘젊음의 거리’ 입구 초입에 있는 1층 대형 매장은 의류 브랜드 뱅뱅이 철수한 뒤 4년 넘게 비어 있다.
종로를 찾는 고객들도 급격하게 고령화되고 있다. KB국민은행 리브온 상권분석에 따르면 종로 상권의 연령대별 유동인구는 55세 이상 남성 비율(20.5%)이 가장 높았고, 45~54세(13.6%), 35~44세(12.5%)가 뒤를 이었다. 20대 비율이 가장 낮았다. 직장인 이정현(34)씨는 “종로 상점가는 식사 후 저가(低價) 커피를 사러 잠깐 들른다”며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가게들만 있어서 굳이 종로를 약속 장소로 잡지도 않는다”고 했다.
종로 상권 몰락의 여파는 주변 상인들에게까지 미치고 있다. 종각 젊음의 거리에는 4~5년 전까지 길거리 음식과 기념품을 파는 노점상이 90개가 넘었지만 현재는 20여 개만 남아 있다. 지하쇼핑센터도 사정은 비슷하다. 종각 지하도상가 상인연합회에 따르면 지난 2년간 105개 점포 중 30곳 이상이 폐업했다고 한다. 영업을 포기한 가게까지 합치면 10곳 중 4곳이 사실상 문을 닫았다. 종로3가역 주변 종로 귀금속 거리도 손님 발길이 끊기면서 불황에 시달리고 있다. 이근재 한국외식업중앙회 종로구지회장은 “요즘 종로 상권 식당, 주점들은 주말에 경복궁, 광화문을 찾는 사람들만 바라보고 있다”고 말했다.
◇최악 불황인데 임대료는 올라
전문가들은 불황의 원인을 종로 상권의 위상 추락에서 찾는다. 종로는 지금도 교통·수요면에서 최적의 입지 요건을 갖추고 있다. SK텔레콤 빅데이터 분석 플랫폼 지오비전에 따르면 ‘종각역 인근’은 전국 상권 중에서 가장 많은 유동인구(51만8842명·지난해 기준)를 자랑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종로가 아닌 주변 을지로, 광화문을 찾는다. 박대원 상가연구소장은 “요즘엔 주 소비층인 2030세대를 사로잡으려면 인스타그램처럼 SNS에 올려 자랑할 만한 명물이 있어야 하는데 종로는 사진을 찍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곳을 찾기 어렵다”며 “특색 있는 골목 상권이 각광받는 시대에 종로에는 고객들을 다시 끌어들일 킬러 콘텐츠가 거의 없다는 게 최대 약점”이라고 말했다.
극심한 불황에도 종로는 서울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높은 임차료를 유지하고 있다. 부동산원에 따르면 종로 내 중대형 상가의 1㎡당 월평균 임대료는 7만6300원(지난해 3분기 기준)으로 1년 전보다 2.3% 올랐다. 다른 주요 상권인 광화문·명동·신사역은 같은 기간 오히려 임대료가 내렸다. 종로에서 설렁탕집을 운영하는 성찬우(가명·46)씨는 “건물 주인이 지난달에 임대료를 200만원 더 올리겠다고 통보했다”며 “뉴스에 나오는 착한 임대료는 남의 일”이라고 했다. 신동석 원빌딩 본부장은 “높은 임차료와 관리비로 프랜차이즈 매장이 하나둘씩 빠져나가면서 종로의 침체가 본격화됐다”며 “빈자리에 장기간 공실이 이어지며 침체는 더욱 깊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건물주의 고집’도 한몫을 한다. 권강수 한국부동산창업정보원 이사는 “종로 상권은 수십년 보유한 건물주가 많아 공실이 났다고 바로 임대료를 내리지 않는다”고 했다.
종로 상권을 떠받치던 학원가마저 코로나 사태 이후 오프라인 강의 규모를 크게 줄이면서 20대 학생들의 발걸음마저 끊어졌다. 인근 부동산 중개업소 관계자는 “종로 상권은 위로는 광화문, 아래로는 을지로 사이에 낀 샌드위치 신세가 됐다”고 했다.
◇“종로 고유 특색 살려야”
전문가들은 종로가 현재 상태로는 예전 수준의 상권 경쟁력을 되찾기 힘들다고 보고 있다. “장사의 신(神)이 와도 종로는 못 살린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종각 젊음의 거리가 있는 관철동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오래된 건물이 대부분이라 광화문, 을지로 상권에 맞서려면 대대적인 리모델링이 필요한데 종각역 사거리에서 유일하게 재개발이 안 되는 지역이다. 서울시의 ‘역사 도심 기본 계획’에 따라 역사·문화적 특성을 유지·보존해야 하는 지역인 특성관리지구로 지정돼 있기 때문이다. 함부로 기존 건물을 허물고 새 건물을 지을 수가 없는 것이다. 반면 서린동·청진동·공평동 등 주변 지역은 최근 들어 고층 상업용 빌딩이 속속 들어서면서 활기를 되찾고 있다.
익선동이나 을지로 인쇄골목처럼 지역 특색을 살리는 방안이 그나마 현실적이다. 종로3가역에서 북쪽 골목에 자리 잡고 있는 익선동은 차량이 다닐 수 없는 좁은 골목길에 다양한 카페와 음식점, 액세서리 가게가 자리 잡으며 MZ세대의 성지(聖地)가 됐다. 을지로 인쇄골목은 뉴트로 열풍과 함께 만선호프, 커피한약방 등 독특한 감성을 가진 가게들이 들어서면서 쇠락해가던 거리의 분위기를 180도 바꿔놓았다.
선종필 상가뉴스레이다 대표는 “종로처럼 오래된 상권에는 유명 브랜드 점포가 한두 개 들어선다고 갑자기 경쟁력이 살아나지 않는다”며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종로 상권 전체의 성격을 완전히 바꾸는 혁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