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권 단일화는) 국민들께서 판단하실 문제고….”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
“저는 단일화에 관심이 없습니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 후보)
1987년 민주화 이후 치러진 거의 모든 대선에서 ‘후보 단일화’란 말이 등장했다. 후보 단일화는 아무런 법적, 민주적 정당성이 없지만 선거 필수 전략처럼 여겨져왔다. 단일화가 이뤄진 적도, 끝내 불발된 적도 있다. 2022년 대선을 50여 일 앞둔 현재,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에 맞서는 야권 윤석열·안철수 후보의 단일화 여부는 초미의 관심사. ‘후보 단일화 게임’의 저자 황두영은 후보 단일화를 “대통령이 되기 위한 절체절명의 협상 테이블”이라 표현했다. 과연 이번 대선에서 윤석열·안철수는 후보 단일화의 길을 가게 될까.
◇DJP는 ‘양보’, 盧·鄭은 ‘경쟁’
가장 많은 표를 얻는 후보 한 명이 대통령이 되는 우리 대선은 양당제와 친화적이다. 그런데 양당 후보에 만족하지 못하는 유권자들은 제3의 후보를 찾아왔고, 대선 판은 늘 다자 구도로 시작됐다. 그런데 선거가 진행되면서, 일부 후보들은 당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한 후보에게 표를 몰아주고 나머지는 사퇴하는 단일화 협상을 진행하곤 했다. 후보 단일화는 후보들의 지지율이나 조직 규모가 대등한 경우 ‘경쟁’의 성격을, 후보 간 지지율과 조직 규모의 격차가 큰 경우 ‘양보’의 성격을 갖는다.
직선제 개헌 이후 처음으로 치러진 1987년 대선에서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것은 단연 김영삼·김대중의 후보 단일화였다. 단일화의 필요성은 제기됐지만 두 후보의 협상은 ‘되는 방향’으로 진행되지 못했다. 양김은 각각 후보 단일화를 하지 않아도 독자 승리가 가능하다고 전망했다. 민주화의 뜨거운 열기가 자신의 득표로 이어질 것이라고 낙관한 것이다. 특히 김대중 측은 ‘사자필승론(노태우·김영삼이 영남 표를, 김종필이 충청 표를, 김대중이 호남 표를 각각 가져가고 수도권에서 지지가 가장 높은 김대중이 당선된다는 논리)’을 폈다. 그러나 양김의 단일화 실패는 노태우 당선으로 이어졌다. 최종 득표율은 노태우 36.64%, 김영삼 28.03%, 김대중 27.04%였다.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은 김종필과 후보 단일화에 성공한다. 이른바 ‘DJP 연합’이다. 상대적으로 지지율이 낮았던 김종필은 후보를 양보하고 대신 공직 배분과 내각제 개헌 등 보상을 약속받았다. 당시 대선에서 김대중은 지지율 1위였지만 추가적인 상승 요인이 적었고, 김종필은 당선 가능성은 낮지만 충청권이라는 견고한 지지층을 가진 상태였다. 김대중은 득표율 40.27%로 이회창(38.74%)을 꺾고 당선됐다. 두 후보의 표차는 39만표에 불과했는데, 이는 충청권에서의 김대중과 이회창의 표차인 41만표와 비슷했다.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정몽준은 후보 단일화를 이뤄냈고, 단일화 경선의 승자인 노무현은 대통령에 당선됐다. 당시 선거를 한 달여가량 앞두고 선거 구도는 ‘1강(이회창) 2중(노무현·정몽준)’으로 고착화되고 있었다. 이회창 지지율은 30%대 박스권에 갇혀 있었지만 계속 1위를 유지했다. 20%대 지지율을 보이던 노무현·정몽준이 이대로 선거를 치를 경우 당선 확률은 0%에 가까웠다. 노무현·정몽준은 단일화 방식을 두고 처절한 협상을 벌인 끝에 합의에 도달했고, 선거 전날 밤 정몽준이 노무현 지지를 철회하는 소동이 있었지만, 노무현은 48.91% 득표율로 이회창(46.58%)을 꺾고 승리했다.
◇文·安 패배, 보수 단일화 불발은 왜?
2012년 대선은 단일화에 성공한 후보가 최종 승리를 거두지 못한 최초의 대선이었다. 2012년은 ‘안철수 신드롬’과 함께 시작됐다. 당시 안철수의 지지율은 다자 구도 여론조사에선 박근혜와 비등했고, 양자 구도에선 박근혜를 앞섰다. 그의 대선 출마 선언은 그해 9월 19일에나 이뤄졌다. 이때 다자 구도 조사에선 박근혜 지지율이 30~40%대, 안철수·문재인은 각각 10~20%대였다. 후보 단일화 협상은 11월 초에서야 시작됐다. 단일화 룰을 둘러싸고 협상이 난항을 거듭하던 와중에 안철수는 11월 23일 돌연 후보 사퇴를 선언했다. 그는 “단일화 방식을 놓고 더 이상 대립하는 것은 국민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라고 했다. 안철수의 사퇴로 문재인이 단일 후보가 됐지만, 48.02%의 득표율을 기록해 박근혜(51.55%)에게 패배했다. 순탄치 못했던 단일화 과정이 유권자들을 끌어들이지 못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2017년 대선에선 문재인이 앞서는 가운데 안철수·홍준표 등이 추격하는 다자 구도였다. 그해 4월초 일부 양자 구도 여론조사에서 안철수가 문재인을 이기는 결과가 나왔고, 다자 구도에서도 문재인과 안철수가 박빙을 이루는 결과가 나왔지만 안철수·홍준표의 단일화는 시도조차 되지 않았다. 5월 초 양자 구도에서 문재인이 안철수를 10%포인트 이상 이긴다는 여론조사가 나오는 등 단일화의 기대 효과는 점점 떨어졌고, 보수 유권자들은 당선 가능성보다 자신의 소신에 따라 투표하겠다는 경향을 보였다. 문재인은 득표율 41.08%로 당선됐고, 홍준표(24.03%)와 안철수(21.41%)는 낙선했다.
◇尹·安, DJP연합식? 盧·鄭식?
최근 여론조사에는 윤석열·안철수의 단일화에 대한 질문, 양자 구도(이재명 대 야권 단일 후보) 지지율을 묻는 질문이 등장하고 있다. 다자 구도에서 이재명과 윤석열은 접전을 벌이는 결과가, 양자 구도에선 야권 단일 후보가 이 후보를 누르는 결과가 많다. 여론조사상으로만 보면 윤석열·안철수 후보가 단일화를 하는 것이 두 사람이 내세운 기치인 정권 교체의 가능성을 높이는 길이다.
현재 두 후보의 지지율 격차는 많게는 20%포인트 이상 난다. 이 상태에서 단일화를 한다면 지지율이 낮은 안철수가 윤석열에게 후보직을 양보해야 할 가능성이 높은데, 후보 양보 경험과 대선 완주 경험이 모두 있는 안 후보가 이런 식의 단일화에 동참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안 후보의 지지율이 떨어지고, 공동 정부 구성 등 보상을 확실하게 약속받는다면 ‘양보하는 단일화’가 가능하다는 시각도 있다. 윤 후보와 안 후보의 지지율이 비등해질 경우엔 ‘경쟁의 단일화’가 이뤄질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이 경우 노무현·정몽준, 문재인·안철수 경우처럼 단일화 룰을 둘러싸고 치열한 협상이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의 전망은 엇갈린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단일화 없이 야권 승리는 불가능하다. 단일화는 변수가 아닌 상수”라며 “1997년 DJP 연합과 2002년 노무현·정몽준 단일화의 혼합 형태로 단일화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구속력 있는 공동정부 약속을 바탕으로 경선을 통해 단일화가 이뤄질 것이란 전망이다. 김 교수는 이달 초 김종인 총괄선대위원장이 배제된 것에 대해 “단일화를 어렵게 할 뇌관을 조기에 제거한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장성철 대구가톨릭대 교수는 “윤석열 후보가 이재명 후보와 오차범위 내에서 각축전을 벌이고, 안철수 후보가 10%대 지지율을 유지한다면 단일화를 할 수밖에 없다”며 “단일화를 통해 승자는 안정적으로 승리를 견인하고, 패자는 권력 분점으로 정치적 미래를 도모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장 교수는 공식 선거운동이 개시되는 2월 15일과 투표용지 인쇄가 시작되는 2월 말, 사전투표가 시작되는 3월 4일 직전을 후보 단일화 성사 가능 시점으로 꼽았다.
그러나 이준한 인천대 교수는 “현실적으로 단일화 가능성이 낮다고 본다”고 했다. 두 후보 모두 ‘대통령 후보가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해 협상 자체가 어렵고, 룰을 합의하는 것은 더 어려울 것이란 얘기다. 이 교수는 또 “단일화는 둘이 합쳐 시너지가 나야 하는데, 지금 같은 추세면 신선도도 파괴력도 크지 않아 단일화 효과를 거둘 수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