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도에 갇힌 남녀가 커플이 돼야 하는 '솔로 지옥'. /넷플릭스

#1 “같이 자면 잠 못 잘 것 같아?”

여자 참가자 강소연의 도발에 남자 참가자 오진택의 목소리가 떨린다. 마사지 등 진한 스킨십을 하고 같이 침대에 누운 밤. ‘유교의 나라’ 한국의 예능 프로그램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대사가 오간다. 12일 현재 넷플릭스 국내 순위 1위, 전 세계 넷플릭스 순위 사이트 플릭스 패트롤의 글로벌 순위 5위까지 오른 ‘솔로 지옥’의 한 장면이다.

이혼남녀가 재혼할 상대를 찾아 나서는 '돌싱글즈'. /넷플릭스

#2 “저는 세 살 아기를 키우고 있어요.”

참가자 이다은의 고백에 호감이 있었던 윤남기의 얼굴이 굳어진다. 그러나 그는 “아이가 있어도 상관없다”며 직진을 선언, 동거를 거쳐 지난 9일 방영된 마지막 회에서는 재혼하겠다고 말했다. 이혼 남녀를 상대로 한 연애 프로그램 MBN ‘돌싱글즈’의 한 장면. 12일 현재 국내 넷플릭스 순위 4위, 최고 시청률은 5.5%까지 올랐다.

연포자(연애 포기자), 결포자(결혼 포기자)의 시대다. 군 복무, 페미니즘 등의 이슈로 2030세대의 젠더 갈등도 최고조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인기다. 카카오TV ‘체인지데이즈’, 라이프타임 ‘커플스위치’, 넷플릭스 ‘솔로지옥’, SBS PLUS와 NQQ가 공동 제작한 ‘나는 솔로’, 티빙 ‘러브캐쳐’와 ‘환승연애’, 왓챠 ‘러브 앤 조이’ 등이 동시 다발로 방영 중이다. 2030은 왜 연애 프로그램에 빠졌을까.

◇현실엔 없으니... 판타지에 순정 한 스푼

가장 큰 이유는 ‘대리 만족’이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남녀가 연애하고, 결혼하고, 출산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 욕구”라며 “이런 욕구가 사회적 환경으로 변했다기보다, 사회적으로 남녀가 서로 적대시하고 연애와 결혼을 막는 요소가 많아지다 보니 현실에서 만족하지 못한 젊은 층이 TV 프로를 보며 대리 만족하는 것”이라고 했다.

‘솔로지옥’은 현실에서 일어나기 어려운 판타지를 담은 예능이다. 출연자들이 인천 사승봉도와 파라다이스시티 호텔을 헬기로 오가며 촬영하는 모습은 이국적이다. 해외 연예 리얼리티 프로그램 ‘투 핫’의 한국판을 보는 듯하다. 그러나 그 속은 다르다. ‘투 핫’이 서로 성적 매력을 어필하면서, 상금을 타기 위해 경쟁을 펼친다면, ‘솔로지옥’은 각자 연인을 찾기 위한 ‘순정’을 보여준다. 한 여자를 향한 직진을 보여준 문세훈 스토리가 화제가 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와 문화가 비슷한 아시아권에서 뜨거운 지지를 받았다. 국내 예능 최초로 글로벌 넷플릭스 5위에 올랐으며, 홍콩, 일본, 싱가포르, 대만, 태국, 베트남, 사우디아라비아 등 9국에서 1위를 차지했다. 넷플릭스가 방영되지 않는 중국에서도 시끌벅적했다. 뷰티 유튜버 송지아와 삼각관계를 형성한 최시훈은 중국 소셜미디어 웨이보에서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다.

‘솔로지옥’이 동화 같은 판타지라면, ‘나는 솔로’는 빌런(악역)이 출연하는 드라마다. 주변에 있을 듯한 출연진으로 극현실주의 같은 구성을 가졌지만, 실제로는 만나기 어려운 인물과 상황이 등장한다. ‘나는 솔로’는 “1, 2기에 결혼한 커플이 나왔다”는 것이 가장 큰 이슈였다. ‘TV로 만나 결혼까지 하다니’라는 판타지와 순정이 자극된 것이다. 4기에는 빌런의 등장이 화제를 모았다. 이들의 논란은 TV 밖으로 나와 남자 출연자의 태도 논란, 여자 출연자의 과거 글로 인한 젠더 갈등으로 확산됐다.

결혼 정보 회사 듀오 조사에 따르면 20~30대 미혼 남녀의 61%가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시청한 적이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들 중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48%,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52%였다. 긍정적으로 보는 이유로는 ‘실제 상황이라 흥미진진해서(44.4%)’ ‘대리 만족이 가능해서(20.1%)’ ‘출연진이 매력적이어서(13.2%)’ 순이었다. 부정적이라고 답변한 이들은 ‘현실성이 떨어져서(35.3%)’ ‘지나치게 자극적이어서(30.1%)’ ‘외모 지상주의를 부추겨서(19.9%)’라고 답했다.

◇이혼, 재혼... 현실 반영한 공감도

반면, ‘돌싱글즈’과 ‘환승연애’는 현실 반영과 공감이 주요 키워드다. 이 두 프로그램은 보면서 울었다는 시청자 댓글이 줄을 잇는다. 구정우 교수도 “미묘한 심리적 스토리에 자신들의 연애를 투영해서 보는 것 같다”며 “이혼 같은 문제도 사회적 인식이 많이 달라지면서 자연스럽게 삶의 일부로 들어온다”고 말했다.

세 쌍 중 한 쌍은 이혼한다는 시대. 그러나 돌싱글즈 참가자들은 “왜 내 주변에는 이혼한 사람이 한 명도 없는지 모르겠다”며 하소연한다. 이들은 나이, 직업 외 자녀 유무를 공개해야 한다. 가족, 친구들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이야기들을 생전 처음 본 참가자들에게 털어놓는다. 이혼 후 연애하다 “그러니깐 이혼 당했지라는 폭언을 들었다”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연애하면 괜히 위축된다” 등의 말을 털어놓는다. 서로의 아픔을 공유하며 빨리 친해진다. 목표는 연애가 아닌 재혼. 마음에 맞는 사람들은 웨딩 사진을 찍고 동거에 들어간다.

‘돌싱글즈’가 다른 곳에서 연인을 찾기 힘든 사람들이 출연했다면, ‘환승연애’는 굳이 출연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전 연인에 대한 미련이 남았기 때문이다. 이 프로그램은 영화 ‘연애의 온도’ 속 다음 대사를 반영한다. “너 그거 알아? 헤어졌던 사람들이 다시 만날 확률이 82%래. 그런데 그렇게 다시 만나도 그중에서 잘되는 사람들은 3%밖에 안 된대.”

출연진은 그 3%의 확률에 희망을 걸기도 하고, 97%의 확률을 향해 다른 사람들에게 눈길을 주기도 한다. 박소정 연구원은 “개인에게 연애 실패는 상처보다 성장”이라며 “연애와 이별은 한 번 경험으로 축적되고, 개인은 그만큼 자신을 계발하고 연애 스펙을 쌓았다고 여긴다”고 말했다. ‘환승연애’의 인기로 티빙의 유료 가입자가 급증하기도 했다. ‘연애 정경’의 저자 박소정 연구원은 “비연예인들이 대중 미디어를 통해 자신의 연애담을 공유하는 것은 ‘사적 자아’를 ‘공적 수행’으로 전환시키는 행위”라며 “예능 프로그램들은 우리로 하여금 자꾸만 연애를 보여주고 싶어 하도록 부추긴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