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오전 경기 용인의 한 복권 판매점. 로또 1등 당첨만 22차례 나온 ‘전국구 명당’답게 매장은 이른 시간부터 로또를 사려는 손님들로 발 디딜 틈 없었다. 행여나 실수할까 수능 답안지 적듯 여섯 숫자를 정성스럽게 고르는 백발 노인, 갓난아기를 안은 채 기도하는 엄마, 매장에 걸린 돼지 그림에 5만원권 지폐를 문지르며 “올해는 제발 좀 부자 되게 해주세요” 외치는 중년 남성까지. 손바닥만 한 로또 용지에서 대박을 찾으려는 사람들 모습은 다채로웠다. 눈발이 거세진 오후엔 사람이 더 몰려 대기 줄은 매장 밖까지 이어졌다. 이날 1만원어치 로또를 산 김미경(42)씨는 “로또는 지난 2년 동안 4등 당첨된 게 전부지만 되든 안 되든 두세 장씩 지갑에 넣고 다니는 것만으로 한 주를 버티게 해주는 인생의 활력소”라고 말했다.
로또 복권에 대한민국이 다시 들썩이고 있다. 올해로 발행 20주년을 맞은 로또가 오는 29일 대망의 1000번째 추첨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복권 업계에선 로또 1000회는 판매 금액이 사상 최대를 기록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회당 평균 500억~600억원이던 로또 판매 금액은 올 들어 3주 연속 1000억원을 훌쩍 넘었고, 온라인에는 1000회 당첨 숫자를 예측하는 분석 글이 쏟아지며 역대 최고 흥행을 예고하고 있다. 로또 판매 운영사인 동행복권 관계자는 “새해를 맞아 복권 구입이 크게 늘어나는 연말연시 효과가 계속 이어지는 것은 이례적”이라며 “행운을 상징하는 7이 세 번 들어간 777회 때 판매가 크게 늘었던 것처럼 1000이란 숫자에 사람들이 거는 기대감이 어느 때보다 높은 것 같다”고 말했다.
◇부동산?코인? 그래도 로또!
로또는 숫자 1부터 45 중 여섯 번호를 선택하는 방식의 복권이다. 매주 토요일 방송에서 1등 번호를 추첨하는데 모든 번호를 맞힐 확률은 814만분의 1이다. 벼락에 16번 연속 맞을 확률에 비유할 정도로 매우 낮다. 연금복권(315만분의 1) 등 국내 다른 복권과 비교해도 당첨 가능성은 작은 편. 그럼에도 해마다 로또를 찾는 사람은 꾸준히 늘고 있다. 현재까지 로또 판매 금액은 62조원을 넘었다. 삼성전자의 한 해 영업이익(52조원·지난해 기준)보다 많다. 복권 업계에 따르면 1인당 평균 로또 구매액은 1만원으로 19세 이상 성인 인구 기준 매주 500만명 가량이 구매한다. 최근 사상 최대 청약 증거금을 모은 LG에너지솔루션 공모주 청약(442만명)보다 많은 규모다.
로또가 인기를 얻으면서 1·2등 당첨자가 자주 나오는 복권 판매점인 이른바 ‘명당’은 매일 문전성시를 이룬다. 주요 명당 가게에는 지방에서 전세 버스를 타고 단체로 로또 구매 원정을 한다. 로또 고객층이 50대 이상 중년 남성이었던 초창기와 달리 지금은 남녀노소 모두 찾는 즐길거리로 자리 잡으면서 판매 규모도 크게 늘어나는 추세다. 전국에서 로또 1등 당첨자를 가장 많이(46명) 배출한 복권 판매점(서울 노원구)을 운영하는 김현길(67)씨는 “2002년 12월 로또 판매를 시작한 첫 주 매출이 18만원 정도였는데 현재는 매주 평균 4억원 안팎”이라며 “특히 추첨일인 토요일엔 2시간을 기다려야 로또 한 장 살 수 있을 정도로 열기가 여전히 높다”고 했다.
사람들은 왜 이토록 로또에 열광할까. 서울과 수도권의 주요 로또 판매점에서 만난 사람들은 “혹시나 하는 희망 때문”이라고 말한다. 조작도 요행도 없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적용되면서 한 게임에 1000원만 내고도 인생 역전의 행운을 기대할 수 있다는 점이 로또 앞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즉석에서 결과를 아는 다른 복권과 달리 가족과 함께 주말에 TV 앞에 앉아 결과를 기다리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사행성이 작다는 점도 로또가 국민 복권이 될 수 있었던 요인이다. 한 40대 로또 구매자는 “투자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겐 부동산이나 가상 화폐, 주식 모두 로또만큼 큰돈을 벌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라며 “로또는 목돈 없이 누구나 한 방을 노릴 수 있다는 게 최고 장점”이라고 했다. 최근 들어 로또 판매가 급증한 것을 두고 코로나 이후 경마장과 카지노가 문을 닫는 등 다른 사행 산업 판매액이 줄면서 상대적 호황을 누렸다는 분석도 있다.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사행 산업 매출액 중 복권 판매액 비율은 지난 2017년 19.1%에서 2020년 42.1%로 크게 뛰었다.
◇이혼·살인·파산....‘로또의 저주’
로또 1등 당첨자는 세금을 떼고도 수십억원, 많게는 100억원이 넘는 상금을 손에 넣는다. 그렇다면 돈벼락을 맞은 이는 모두 행복하게 지낼까. 당첨자 신상은 비공개여서 로또 1, 2등 당첨자에 대한 정확한 통계나 분석 자료는 없다. 하지만 그동안 언론 기사나 소셜네트워킹서비스(SNS)를 통해 알려진 고액 당첨자들은 당첨 이후 이혼하거나 빚더미에 앉는 등 ‘불행’에 가까운 인생을 사는 경우가 적지 않다.
지난 2007년 18억원에 당첨된 40대 남성 김모씨는 투자 사기로 빚더미에 시달리다 광주 서구의 한 목욕탕 탈의실에서 목을 맸다. 김씨는 로또에 당첨되자 운영하던 술집을 크게 확장했고,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주식 투자에도 손을 댔다. 하지만 사업 실패에 이어 투자 사기까지 당하면서 당첨금을 탕진하고 극단적 선택을 했다.
가족의 비극이 된 경우도 있다. 지난 2011년 1월 경남 창원에서 노점상을 운영하던 50대 부부는 1등에 당첨돼 8억원을 받았다. 하지만 당첨 이후 돈 문제로 싸움이 잦아졌고, 말다툼 도중 남편이 망치를 들고 아내를 위협하자, 아내는 망치를 빼앗아 남편 머리를 가격했다. 남편은 그 자리에서 숨졌다.
신기루 같은 로또 당첨 희망을 좇느라 자산을 탕진하는 사람도 늘고 있다. 한 남성은 18년 동안 로또 복권 구입에 전 재산인 7억원을 썼지만 당첨 기쁨을 누리지 못했다.
당첨 가능성이 높은 로또 번호를 알려주겠다고 돈을 뜯는 신종 사기도 기승을 부린다. 한국소비자원에 따르면 지난해 로또 번호 추천 서비스 피해 상담 건수는 총 2203건으로 코로나 이전인 2019년(903건)의 2배 이상으로 늘었다. 한 피해자는 인공지능(AI)으로 로또 번호를 분석해 주겠다는 업체에 회비 수백만원을 냈지만 한 번도 당첨되지 못했다.
◇“주변에 당첨 알리고 장단기 계획 세워야”
로또 당첨이 반드시 불행으로 연결되는 것만은 아니다. 강원도 춘천에서 경찰관으로 일하던 박모씨는 로또 사상 최다 금액(407억2295만원) 당첨 주인공이다. 박씨는 돈을 펑펑 쓰다 파산하는 다른 당첨자들과 달리 기부 천사의 길을 걸었다. 박씨는 경찰을 그만두고 지인이 인천에서 운영하던 한 사업체를 인수했다. 이후 자신이 근무하던 경찰서 장학회와 자녀들이 다니던 초등학교에 각각 10억원가량을 기부했다. 복권 업계에 따르면 박씨는 최근까지도 매년 무기명으로 춘천시 공공 기관에 2000만~3000만원을 불우 이웃 돕기 성금으로 내는 것으로 알려졌다.
2020년 한 포털 게시판에선 로또로 33억원을 번 당첨자의 후기가 화제가 됐다. 로또 1등 당첨자라고 밝힌 글쓴이는 “세금을 제외한 22억원을 수령한 뒤 부모님 빚을 갚고 전원주택을 지어드렸다. 동생 해외여행도 보내줬다”며 “내 몫으론 서울 강동구의 아파트를 구입한 뒤 시세 차익 3억5000만원 정도를 남기고 처분해 13억원 정도를 은행에 저축했다”고 했다. 그는 “(로또 당첨으로) 확실히 예전에 없던 여유와 자신감이 생겼고 학교 학점도 올랐다”며 “돈 때문에 행복한 건 아니지만, 돈이 있으니 행복해질 기회가 생겼다”고 했다.
동행복권 관계자는 “당첨금이 10억원만 넘어도 무계획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며 “큰 행운을 한순간에 날리지 않으려면 가족 등 주변과 상의해 우선순위를 정한 뒤 차근차근 단계별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