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의 고장’으로 불리는 경북 안동 곳곳에는 고즈넉한 정자(亭子)가 많다. 안동시 문화재 자료집 ‘안동의 정자’(비매품) 제작에 사진작가로 참여한 강병두(58)씨에 따르면 안동에만 300여 개의 정자가 산재해있다. “안동의 누각과 정자를 이야기할 때면 드라마 ‘미스터션샤인’ 속 배경으로 등장했던 ‘만휴정’과 ‘고산정’부터 떠올리지만, 그에 못지않을 만큼 아름다운 풍광과 이야기를 간직한 정자가 많이 남아있다”는 게 강 작가의 얘기다. 선비 문화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정자다.
안동은 ‘고택 스테이의 원조 고장’이기도 하다. 수십년 전부터 객(客)들에게 뜨끈뜨끈한 ‘사랑방’을 내어준 고택들이 여전히 두 팔 벌려 도시로부터 도망쳐온 이들을 포근하게 품어준다. 잠시 속세를 떠나 여유와 한가로움을 찾는 유유자적(悠悠自適) 여행을 꿈꾼다면 안동만한 곳이 없다.
◇‘백운정’ ‘체화정’··· ‘뷰’ 맛집
“촬영을 위해 안동의 정자들을 다녀보니 정자들이 대부분 주변의 자연 경관에 그대로 스며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죠. 곁에 냇물이 흐르면 흐르는 대로, 동산이나 바위가 있으면 있는 그대로 두고 자리한 정자는 마치 하나의 자연물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 옛날 정자는 선비들이 풍류를 즐겼던 곳이기도 하지만 일부는 재실 기능을 한 곳도 있어요. 안동을 여행할 때 한국 전통 건축의 보고(寶庫)라 불리는 정자만 찾아다녀도 한결 깊이 있고 알찬 여행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강병두씨가 “만휴정 못지않다”고 추천한 곳은 임하면 백운정과 풍산읍 체화정이다. 의성김씨 문중의 정자인 백운정은 안동의 대표 명승지 중 한 곳으로 1568년 귀봉 김수일이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반변천 강 언덕 위, 가까이 개호송 숲과 멀리 의성김씨 집성촌인 내앞마을이 그림처럼 펼쳐지는 전망대에 자리하고 있다. 개호송 숲 일대는 상고대가 피거나 안개가 자욱할 때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해 사진작가들이 조용히 발걸음 하는 곳이기도 하다. 개호송 숲에서 바라보는 백운정 또한 한 폭의 수묵화가 따로 없다.
체화정 역시 경관이 뛰어나기로 유명하다. ‘안동의 정자’ 표지를 장식한 곳이기도 하다. 조선후기 화가 단원 김홍도도 안기찰방 벼슬을 받아 안동에서 지낼 때 이곳에 자주 들러 시간을 보냈다고 하니 경치야 두말할 것도 없다. 만포 이민적이 효종 때 학문을 닦기 위해 지었으며 형인 옥봉 이민정과 함께 이곳에 기거하면서 형제간의 우의를 돈독히 한 장소로 알려졌다. ‘채화(棣華)’라는 이름도 ‘시경(詩經)’의 ‘소아(小雅)’편 ‘상체지화(常棣之華)’의 줄인 말로, ‘형제가 많아서 집안이 번성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정자 뒤로는 산이 둘러싸고 앞으로는 ‘삼층도지’라는 연못이 있다. 연못 중간에는 ‘삼신산’을 의미하는 3개의 작은 인공섬이 나란히 있다. 정자는 크지 않으나 일대 조경이 소담스럽게 잘 꾸며져있다. 설경뿐 아니라 9월쯤 배롱나무에 꽃이 만발할 때에 맞춰 일부러 찾아볼 만하다.
◇22년 차 고택에서 하룻밤
고택이 모여 있는 안동에서 고택 스테이를 놓칠 순 없다. 최근 임하호 주변 고택들이 MZ세대 사이에서 인기. 전남 구례 쌍산재에 ‘윤스테이’가 있었다면, 안동 임동면 수애당엔 ‘문스테이’가 있다. 고택인 수애당의 주인 문정현(55)씨가 운영한다고 해서 문스테이. 올해로 고택 스테이 22년 차에 접어드는 ‘원조’격이다. 아담한 체구의 주인 문씨는 예능 ‘윤스테이’ 속 윤여정처럼 친근하면서 똑 부러지는 서울 말씨로 호텔 컨시어지 역할부터 ‘야식’도 뚝딱 차려내는 셰프 역할까지 모두 직접 소화해낸다. 재방문하는 단골 숙박객들에겐 이따금 인생 상담도 해준다.
1939년 독립운동가 수애 류진걸이 지은 수애당은 대문채, 정침, 고방채 등 총 3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통칸 온돌방을 비롯해 안방, 웃방, 중간방, 사랑방 등 방만 10여 개. 일부는 전통 온돌방으로 돼 있다.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하고도 고택 스테이를 하는 이들에게 수애당의 운치만큼 힐링이 되는 건 큰 언니 같은 문씨의 편안한 서비스다. 안동 며느리 33년차인 문씨도 결혼해 이곳 수애당에 안주인으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삼성에 근무하며 시청과 광화문 일대를 누볐던 ‘차도녀(차가운 도시 여자)’였단다. “국내외 영업 파트에서 일해서 다양한 사람들을 응대해봤다”는 문씨는 “결혼 후 수애당을 운영하며 뜻밖의 숨은 재능을 발견했다”며 웃었다. “결혼 전에 남편이 멋쩍은 듯 ‘집이 좀 크다’고 해서 ‘커봤자 얼마나 크겠어!’ 하며 콧방귀를 끼었는데, 시댁 와 보니 집이 좀 크긴 크더라고요, 하하!”
칫솔 빼곤 다 구비돼 있는 호텔식 어메니티(욕실에 제공되는 편의 용품) 외 야식 메뉴인 ‘해물파전과 안동 소주 한상 차림(1만9000원)’이 인기다. 특히 눈 오거나 비 오는 날, 방 문 열고 처마 밑이나 툇마루에 앉아 야식을 즐기는 이들이 많다. 인근 ‘지례예술촌’ 등과 함께 임하호 주변 고택 스테이 ‘핫플 중 핫플’로 꼽힌다. 1박 2인 8만원부터 4인 20만원까지.
◇안동식 만찬
고택 스테이로 소문난 곳은 으레 소박한 아침상을 제공했지만, 코로나 사태 후 조식 서비스를 중단한 곳이 많아졌다. 안동식 밥상이 아쉬울 땐 정상동 예미정이 만만하다. 안동 지역 대표 음식을 편안하게 한자리에서 맛볼 수 있다. ‘안동 간고등어 상차림’(2만3000원)부터 ‘안동 건진국수 상차림’(2만3000원), ‘안동 비빔밥 상차림’(2만3000원) 등을 주문하면 ‘삼색 북어보푸라기’ ‘명태껍질무침’ ‘문어 숙회’ 등 안동식 반찬들이 그때그때 상에 오른다.
전통음식 칼럼니스트이자 안동 1호 한식 조리기능장인 박정남(53) 수석 셰프가 대대로 내려오는 안동 전통 음식을 현대 입맛에 맞춰 레시피를 개발, 발전시켜 상에 내고 있다. 안동종가음식연구원장이기도 한 박정남 셰프는 절기에 맞춰 예미정 한쪽 상설전시장에서 ‘안동식혜’ ‘전통식 한우족편’ 등 꾸준히 안동종가음식 시연회 및 품평회를 열어오고 있다. 운이 좋다면 식사하며 시연회를 직접 관람할 수 있다. 상설시연장 옆 아담한 안동음식박물관은 안동 음식에 대해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안동권씨 집안의 내림 음식인 안동 비빔밥에 관한 설명부터 누름국수 상차림 모형 등이 전시돼 있다. 식사 전후 누구나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