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대선을 앞두고 독일 총리 8명의 정치 리더십에 관한 책을 펴낸 김황식 전 총리를 서울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만났다. 김 전 총리는 "대선후보들과 국회의원들이 꼭 알아야 할 내용이라 자비로 책을 구입해 보냈는데 그들이 열심히 읽어볼지는 모르겠다"며 웃었다. 콘라트 아데나워부터 빌리 브란트 총리까지 다룬 1권이 먼저 출간됐고, 헬무트 슈미트에서 앙겔라 메르켈 총리까지 다룬 2권은 연말에 나온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2018년 10월, 김황식 전 총리는 독일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와 함께 광주 5·18민주묘지를 방문했다. 영화 ‘택시운전사’의 실제 모델인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의 유해가 그곳에 안장돼 있었다. 난처해진 건, 슈뢰더 전 총리가 ‘전두환 비석’으로 안내됐을 때였다. 해설사가 바닥에 누운 비석을 가리키며, 한국 정치인들은 이곳에 와서 5·18 주범인 전두환 비석을 발로 밟고 지나간다고 신이 나서 설명했다. 김 전 총리는 “순간 가슴이 조마조마했다”고 말했다. 슈뢰더 총리의 표정이 굳어졌기 때문이다. “독일은 전 정권, 전임 총리들의 공과(功過)를 명확히 구분해 계승해가는 나라이고, 과거 나치 당원이었다 해도 인재는 과감히 발탁하는 실용의 나라니까요. 짓밟히는 대통령 비석을 보며 슈뢰더가 어떤 생각을 할지 상상하니 퍽 민망해지더군요.”

총리 재임 시절부터 교류하며 독일 통일의 경험을 공유해온 슈뢰더 총리뿐 아니다. 김황식(74) 전 총리는 2013년 퇴임 후 독일 베를린자유대학으로 가 2차 대전 종전 후 ‘라인강의 기적’을 주도한 독일의 첫 총리 콘라트 아데나워를 필두로 빌리 브란트, 헬무트 콜, 앙겔라 메르켈로 이어지는 독일 정치지도자 연구에 몰두했다. 최근 출간한 ‘독일의 힘, 독일의 총리들1’(21세기북스)이 그 결실이다.

지난달 20일, 서울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만난 김 전 총리는 “통일과 경제 강국 둘 다 이룬 독일의 힘은 이념과 편 가르기, 포퓰리즘을 버리고 실사구시와 화합, 국익을 택해 분열의 정치를 끝낸 독일 총리들의 노력이 결정적이었다”고 단언했다. 3월 대선을 코앞에 둔 시점에 책을 펴낸 것도 “대선 후보들을 비롯한 우리 정치인들이 독일 정치에서 배웠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 김 전 총리는 “제왕적 대통령제, 승자 독식의 권력 구조로 한없이 치졸해지고 네거티브만 난무하는 선거는 이번이 마지막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2018년 10월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왼쪽에서 둘째)와 광주 5·18민주묘지를 찾은 김황식 전 총리가 '전두환 비석'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뉴시스

◇독일 정치에 신데렐라는 없다

-왜 독일인가.

“40년 공직 생활 내내 독일은 내게 화두였다. 전범국이었던 나라가 화해와 평화의 상징으로 우뚝 서며 유럽의 최강자로 부활한 힘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 같은 분단 국가였는데 독일의 오늘과 한반도의 오늘은 왜 이렇게 다를까, 그 해답을 찾고 싶었다.”

-그 해답이 독일 총리들이었던 건가.

“독일 공영TV ZDF가 ‘가장 위대한 독일인 100인’을 여론 조사를 통해 발표했는데, 1위가 초대 총리인 아데나워, 2위가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 3위가 빌리 브란트 총리였다. 100명 안에 종전 후 독일 총리가 6명이나 포함돼 있었다. 괴테, 아인슈타인, 베토벤보다 정치 지도자가 존경받는 나라인 것이다. 그만큼 독일 지도자들은 정파와 권력욕에 얽매이지 않고 국익과 사회 통합의 관점에서 나라를 재건하는 일에 헌신했다. 그들이 ‘독일의 현자’ ‘걸어다니는 중재위원회’ ‘시대의 양심’이란 수사로 불리는 이유다.”

-서른이던 1978년, 마르부르크 대학교에서 1년간 법률 공부를 한 것이 독일과 맺은 첫 인연이더라.

“분데스리가 축구 경기 보는 걸 무척 좋아했다. 흑백 TV였지만 경기가 열리는 도시의 풍경도 나오니 아, 저런 곳에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 마침 독일대사관이 법조인을 상대로 마련한 초청 프로그램에 선발됐다. 교통 체계부터 쓰레기 처리까지 스마트하게 굴러가는 공공시스템을 보고 여기가 천국이다 싶었다. 공무원들은 국민을 위해 봉사했고 국민은 공직자를 신뢰했다.”

-‘독일 정치에 신데렐라는 없다’고 쓴 대목이 인상 깊었다.

“독일 정치에서 최고 지도자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니다. 20대 전후 정당에 가입해 밑에서부터 차근차근 공부하고 올라와 주의회와 주정부를 거쳐 성장하고 연방의회와 정부에서 일하다 총리 자리에 오른다. 우리는 반대다. 경험과 경륜 없는 사람들이 스타로 부상해 선거를 치른다. 이번 대선 후보들만 해도 모두 신데렐라들 아닌가.”

-그만큼 기성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 깊다는 뜻 아닐까.

“정치는 고도의 전문성을 지닌 직업이다. 대통령 선거를 일대일 게임하듯, 인기투표 하듯이 치르고 국민의 정치의식이 그걸 용인하는 것에 우리의 문제가 있다.”

-우리 정치가 후진성을 면치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이 뭘까.

“너무 막강한 대통령 권한이다. 청와대 중심 정치가 되다 보니 국정 경험이라고는 없는 시민운동가들이 청와대에 들어와 정부와 관료들을 허수아비로 세워놓고 나라를 좌지우지한다. 전문가들 목소리를 충분히 들었다면 부동산 사태가 이 지경까지 왔을까.”

◇‘건국의 아버지’ 아데나워와 이승만

-2차대전에서 패망한 뒤 동서로 분단된 독일이 승전국들의 점령 아래 정부를 수립해 나가는 과정이 우리와 비슷해서 새삼 놀랐다. 특히 ‘건국 총리’ 아데나워는 이승만 대통령을 연상시킨다.

“아데나워는 친서방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전후 독일 민족을 대표하는 정부를 세웠다. 사회적 시장경제로 취약 계층을 품어 안은 것도 이승만의 농지 개혁과 닮았다. 이승만이 농지 개혁으로 소작농들을 품지 않았다면 6·25 때 어떻게 됐을지 장담할 수 없다. 두 사람 사이 핫라인이 개설돼 있었던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정책 방향이 닮아 있다. 73세에 임기를 시작한 것, 불운하게 권좌에서 내려온 것까지 닮았는데, 둘 다 공이 과를 덮고도 남는 인물들이었다.”

-그런데 아데나워는 독일 국민에게 가장 존경을 받는 인물이고, 이승만은 분단의 원흉이란 비난을 받는다.

“김구, 김규식도 훌륭한 지도자이지만 그들은 감성적 민족주의에 머물러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승만은 국제 정세와 현실을 제대로 본 지도자였다. 민족주의자들 주장대로 남북공동정부 수립으로 갔다면 우리는 공산화됐을 것이다. 소련은 동쪽에서는 한반도를 공산 국가로 만드는 게 목표였고, 서쪽에서는 독일을 중립국으로 만들어 자기들 영향권하에 두려고 했다. 그걸 이승만이 간파하고 미국과 동맹을 맺은 것이다.”

-아데나워는 능력 있는 인재라면 나치 가담자라도 과감히 등용했다. 이승만 정부도 친일 행적이 있으나 국가 발전에 필요한 인재들은 기용했다.

“아데나워 정부는 나치 단순 가담자에겐 관용 정책을 시행했다. 친나치였던 한스 글롭케를 총리실 실장으로 임명했을 정도다. 처음엔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가 이를 비난했지만, 나중엔 아데나워의 조치가 민족을 분열시키지 않고 12년 히틀러의 폭정을 극복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우리 같았으면 비난이 들끓었을 텐데.

“이명박 박근혜 사면을 건의했다고 이낙연 전 총리가 거센 비난을 받다가 철회하는 일만 봐도 그렇지 않나. 우리 사회에 관용이 사라지고 있다.”

-아데나워의 ‘스탈린 노트’ 거부, 헬무트 슈미트의 ‘이중결정’ 등 포퓰리즘에 영합하지 않는 독일 총리들의 뚝심도 감동적이었다.

“1952년 스탈린이 분단 독일을 통일시켜 중립국으로 만들자고 제안한 게 ‘스탈린 노트’인데, 좌파인 사민당은 물론 집권당인 우파 기민당까지 국민 절대 다수가 찬성했지만 아데나워 총리가 거부했다. 그건 중립이 아니고 소련의 영향권에 들어가는 것이라 판단하고 국민을 설득한 거다. 헬무트 슈미트 총리의 ‘이중결정’도 정치지도자의 소신을 보여준 예다. 70년대 말 소련이 핵무기를 동구권에 배치하자 슈미트는 이에 대응하는 핵무기를 미국과 협의해 배치하자는 정책을 추진했다. 슈미트를 배출한 사민당이 ‘평화’를 외치며 대규모 시위를 했지만 양보하지 않았고 결국 슈미트는 당에서 쫓겨난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됐나. 우파인 헬무트 콜이 집권하면서 슈미트의 ‘이중결정’을 계승했고 서독의 굳건한 안보를 토대로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게 된다.”

-죄파인 사민당 슈뢰더 총리의 ‘하르츠 개혁’도 우파 정책이었다.

“통일 후유증으로 ‘유럽의 병자’라 조롱받을 만큼 경제적 위기에 처했을 때 슈뢰더는 복지를 줄이고 감세와 유연한 해고로 기업들이 원활히 돌아가게 해줬다. 결국 지지자들이 떨어져 나가고 선거에도 졌지만 슈뢰더의 개혁 정책은 우파 총리인 앙겔라 메르켈이 독일을 유럽의 최강자로 재부흥시키는 데 성장 엔진이 돼주었다. 눈앞 인기가 아니라 국가의 장래를 보고 정책을 결정하는 것이 정치인의 역할이란 걸 일깨운다.”

-빌리 브란트가 총리가 됐을 때 집무실 의자, 책상, 그림 하나까지 아데나워가 쓰던 걸 그대로 두고 사용했다던데.

“독일 좌파들은 국익과 국민을 위한 좌파였다. 검약했고 성실했으며 포용적이었다. 동방정책으로 독일 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브란트의 일생을 지배한 한 가지 원리가 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아니라 ‘이것과 마찬가지로 저것도 또한’을 적용하는 것이다. 그는 양자 택일식 결정을 정치적 무능의 증거로 간주했다.”

김황식 전 총리는 "국가 재정과 부채는 안중에 없이 오직 득표만을 위해 온갖 복지 공약을 쏟아내는 대선판의 포퓰리즘이 개탄스럽다"며 "치졸한 네거티브가 난무하는 대선은 이번이 마지막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협잡정치’로 위기 맞았던 정의당은 녹색당에 배워야

-사민당이 계급 투쟁에 기반을 둔 노동자 정당에서 국민 정당으로 탈바꿈하는 모습을 보면서 정의당이 겪고 있는 딜레마도 이런 식으로 극복해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정의당은 사민당이 아니라 녹색당과 비교해야 한다. 녹색당은 국가 전체의 어젠다가 아니라 환경, 쓰레기, 핵발전소 폐기 문제 등 생활과 밀착한 시민운동으로 시작했다. 집권보다는 소수의 목소리를 정책에 반영하는 것이 목표였고 그 길을 꾸준히 걸어온 덕에 집권당의 연정 파트너가 됐다. 정의당도 사회적으로 후순위에 있는 소수 정책에 관한 목소리를 일관되게 냈어야 한다. 그러나 조국 사태와 공수처법 통과에서 보여준 협잡의 정치로 그 정체성을 잃어버렸다.”

-그래도 젊은 세대, 특히 2030여성들의 지지를 많이 받고 있다.

“우리도 결국 다당제로 가야 한다면 제일 중요한 당이 정의당이다. 사안에 따라 민주당과 국민의힘을 오가며 손을 들어주면서 자연스럽게 대화와 타협의 장을 마련할 수 있다.”

-녹색당, 자민당 같은 소수 정당의 목소리가 반영되는 건 독일의 선거 제도 때문일까.

“독일은 국민의 정당 지지율이 국회 의석수에 반영되도록 제도를 설계해놨다. 정당 지지율이 40%라면 국회 의석수도 전체의 40%를 넘지 못하게 해놨다. 우리처럼 30% 지지율을 얻은 정당이 국회 의석의 60%를 차지하는 건 반헌법적이고 비민주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소수 정당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연정을 통해 집권하는 것을 가장 이상적으로 보았고, 모든 정권이 예외 없이 연정을 했다. 대화와 타협이 일상화된 이유다.”

-3월 대선에서 국민의힘이 승리할 경우 180석 민주당과 대연정 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을까.

“대연정의 정신이 필요하다. 당선자가 이걸 해낸다면 우리 정치사에 드물게 성공한 대통령이 될 것이다. 만일 윤석열 후보가 당선되면 총리는 합리적이고 온건한 민주당 인사를 임명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김부겸 현 총리가 계속하도록 하는 것도 방법이다. 당선자 주변에서 가만 놔두지 않겠지만 눈앞 이익에 급급하지 않는 ‘거인의 정치’가 필요하다.”

◇‘독일의 현자’라 칭송받는 총리

-빌리 브란트의 대동독, 동방정책은 얼핏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정책을 연상시킨다.

“화해, 협력하겠다는 의지는 같을지 몰라도 기본 철학이 전혀 다르다.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서방과의 끈끈한 결속을 전제로 추진한 것이지, 미국을 따돌리면서 한 게 아니었다. 힘의 우위를 갖고 추진했기 때문에 실효성을 거둘 수 있었다. 문 정부처럼 국민과 국가의 자존심을 훼손시키면서 한 일이 결코 아니다.”

-새해부터 연일 미사일을 쏘아대는 북한은 어떻게 봐야 할까.

“북한에 핵무기가 있다면 우리도 미국의 핵무기를 맞대응해서 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놓고 균형을 맞춰야 한다. 슈미트 총리가 자기 당원들 뜻에 반하면서까지 ‘이중결정’을 내린 건 균형이 맞지 않는 평화는 제대로 된 평화가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미 동맹이 중요하고, 핵 문제에서 비대칭을 해소하는 것이 절대 필요하다. ”

-원수지간이던 독일과 프랑스가 화해하고 협력하며 EU를 이끄는 쌍두마차가 된 것은 한일 관계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본은 독일처럼 사죄하지 않을 것이다. 자기들이 가해국이 아니라 원폭을 맞은 ‘피해국’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 한계를 인정하면서 우리의 실리와 명분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도덕적 우위에 서서 우리가 끌고 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2차 대전 후 피해국 프랑스는 가해국인 독일에 먼저 손을 내밀었다. 드골과 아데나워 사이에 엘리제 조약이 이뤄졌고 루르 지방에 철강경제 공동체를 만든 것이 결국 EU까지 오게 된 것이다.”

-슈뢰더 총리와는 가깝게 지내셨더라.

“한반도 문제에 관심이 많아 독일과 한국을 오가며 자주 만났다. 독일어 통역을 하던 여성이 김소연씨인데, 어느 날 하이야트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하려고 만났더니 김소연씨가 슈뢰더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내가 갸우뚱해하자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됐다고 그 자리에서 이실직고하더라(웃음).”

-총리 재임시절 메르켈 총리도 만나셨던데.

“내가 공부했던 마르부르크 시가지가 그려진 그림을 선물로 주더라. 자리에 앉자마자 한국의 사형 제도에 대해 물어서 우리는 사형 폐지국이라고 자세히 설명했더니 흡족한 표정을 지었던 게 기억난다. 메르켈은 성실하고 겸손하고 청렴했던 관리형 리더였다. 결단력은 다소 미흡했던 걸로 평가받지만 남성 중심의 마초이즘을 벗어나 새로운 리더의 모습을 보여준 총리였다.”

-8명의 독일 총리 중 누굴 최고로 평가하시나.

“헬무트 슈미트. 총리직에서 사퇴한 뒤 ‘디 차이트’라는 주간지의 공동 편집인을 지내며 독일의 여러 현안에 의견을 제시한 지식인이었다. 국민들은 그를 ‘독일의 현자’라고 부르며 문제가 생길 때마다 슈미트의 의견을 듣고 싶어했다. 지독한 골초였는데, TV 인터뷰를 할 때 담배를 피우는 게 허락되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2010년 11월 방한한 앙겔라 메르켈 총리(왼쪽)와 만난 김황식 전 총리. /연합뉴스

◇서울시장 경선? 다른 별 여행하고 온 기분

이명박 정부에서 2년 4개월 나라 살림을 맡았던 김황식 전 총리는 민생을 최우선으로 한 국정 운영과 소탈한 성품으로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연평도 포격 전사자 추모식 때 40분간 장대비를 맞으며 서 있던 모습은 지금도 회자된다. ‘울보 명재상’이라 칭송받으며 40년 공직 생활을 마친 그가 가장 후회하는 일은 2014년 서울시장 경선에 나섰던 것. 그는 “다른 별을 여행하고 온 기분이었다”며 웃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김황식 총리 같은 사람 없느냐”는 주문을 공공연히 했다더라.

“과분한 평가다. 대통령제 국가라 총리 역할이 크지 않지만 내 경우엔 이명박 대통령이 많은 권한을 위임해주고 활동 공간을 만들어주셨다. 내가 좋은 평가를 받는다면 이 대통령 덕분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아직 감옥에 있다.

“사면돼야 한다. 과도 있고 공도 있지만 저런 형벌은 과중하다.”

-새누리당 서울시장 경선에 출마했던 것을 가장 후회하실 것 같다.

“귀신이네, 하하! 정치는 완전히 별세계더라. 애당초 뜻을 둔 게 아닌데 강권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거절할 수 없어 나섰다. 무슨 일이든 자기 소신과 확신이 있어야지, 타의적으로 하는 건 절대 할 일이 아니다.”

-2017년부터 안중근의사숭모회 이사장직을 맡고 계시다.

“숭모회 역대 이사장을 노신영 정원식 등 총리 출신들이 많이 했다. 덕분에 안중근 의사에 대해 깊이 공부할 기회가 됐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나이가 스물아홉인데, 인품이 훌륭해 옥중에 있을 때 일본 검사와 간수, 재판장이 안 의사에 감복했다고 한다. 감옥 안에서 유묵을 많이 써서 일본인들에게 나눠줬는데 후손들이 시중에서 7억, 10억원에 경매되는 걸 숭모회에 기증해온다. 한 간수는 고향 센다이현으로 돌아가 유묵을 집에 걸어놓고 날마다 공양을 드렸는데 이제는 그 마을 주민들이 모여 1년에 한 번 법요식을 드린다. 아름다운 이야기다.”

-호암재단과 삼성문화재단 이사장직도 맡고 있다.

“삼성을 바라보는 국민들 시각이 한가지만은 아닐 것이다. 애증이 있겠으나 삼성이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해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 자존감을 안겨준 것은 인정해야 한다. 문화예술계에 대한 기여는 말할 것도 없다.”

-시 100수는 외고 다니는 문청(文靑)이셨다. 요즘은 어떤 시를 가슴에 품고 다니시나.

“유치환의 ‘바위’와 짝을 이뤄 좋아하던 시가 함형수의 ‘해바라기의 비명(碑銘)’이다.”

-어떤 시인가.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가운 빗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묘비명을 정해두셨나.

“고향 장성에 가면 청백리로 유명했던 박수량 선생의 비석이 있다. 명종이 그분이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듣고 비석돌을 만들어서 보내며 ‘아무것도 쓰지 마라, 이러쿵저러쿵 구차한 이야기를 쓰는 것이 그의 공에 덕이 가지 않는다’고 당부해 백비가 되었단다. 비석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해바라기 한 그루는 어떠신가.

“그것도 좋겠지, 하하!”

지난달 20일 서울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만난 김황식 전 총리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