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에 손톱만큼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르기 어려운 이름이 있다. 일본이 낳은 세계적 건축가, 안도 다다오(安藤忠雄·81)다. 그는 50년 넘는 세월 온갖 건물을 쉼 없이 지었고, 세계적 건축상을 셀 수 없이 많이 받았다. 그의 시그니처 건축 양식, 색을 입히지 않은 회색 콘크리트가 그대로 드러나게 하는 ‘노출 콘크리트’ 기법은 세계의 트렌드가 된 지 오래다. 빛과 콘크리트로 예술을 빚어내는 그의 작품은 일본은 물론이고 세계 전역에 퍼져 있다. 일본 ‘빛의 교회’ ‘물의 절’ ‘지추미술관’, 이탈리아 ‘파브리카’, 프랑스 ‘유네스코 명상공간’, 미국 ‘포트워스 현대미술관’ ‘퓰리처 미술관’ 등 수많은 대표작을 자랑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어렵지 않게 그의 작품을 볼 수 있다. 원주의 ‘뮤지엄 산’, 제주의 ‘유민미술관’과 ‘본태박물관’, 서울 혜화동에 있는 ‘JCC빌딩’ 등이 있다.
‘1941년 오사카 출생. 독학으로 건축을 공부하고 1969년 안도 다다오 건축연구소를 설립….’ 그의 이력서는 이렇게 시작된다. 스승도 없고, 대학도 나오지 못한 그는 ‘괴짜’ 취급을 받았다. 스물여덟 나이에 건축사무소를 낸 그는 동네 낡은 집 주인을 찾아가 집을 고쳐주겠다고 제안하며 일거리를 만들었다. 그렇게 지은 집이 데뷔작 ‘스미요시 나가야(住吉の長屋·1976)’다. 1980년대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1995년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받으며 거장 반열에 올랐다.
그야말로 혈혈단신 성공이었다. 돈도, 집안 배경도, 연줄도 없었다. 오직 강인한 의지만이 있었다. 단 한 번도 엘리트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도쿄대 교수직까지 맡았다. 그는 2008년 펴낸 자서전에서 자신의 삶을 이렇게 회고했다. ‘매사 처음부터 뜻대로 되지 않았고, 뭔가를 시작한다 해도 대개는 실패로 끝났다. 그래도 얼마 남지 않은 가능성에 기대를 품고 애오라지 그늘 속을 걷고, 하나를 거머쥐면 이내 다음 목표를 향해 걷기 시작하고, 그렇게 작은 희망의 빛을 이어나가며 필사적으로 살아온 인생이었다.’ 2009년과 2014년 두 차례 암 선고를 받고 십이지장 등 5개의 장기를 제거하는 대수술을 받았지만, 이 역시 극복해냈다.
올해 81세인 그는 지금도 왕성하게 일하고 있다. 올해 10월 서울 마곡에서 문을 여는 ‘LG 아트센터’는 그의 최신작이다. 무엇이 그의 열정의 원천인지, 무엇이 그를 거장으로 만들었는지 궁금해졌다. 1월 편지를 주고받으며 안도 다다오를 만났다. 그는 ‘거장’이란 표현을 마뜩잖아 했다. “자기 스스로를 거장이라 말하고 만족하면 미래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빛과 콘크리트의 예술가’ ‘동양의 가우디’ 같은 별명도 “딱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대신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이들에게 이 같은 말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사과도 인간도, 인간도 건축도, 무르익지 않은 도전 정신으로 넘쳐흐르는 푸른색일 때가 아름답습니다. 언제까지나 도전자가 되세요!”
◇활력의 원천은 일, 삶의 원동력은 긴장감
-코로나 때문에 직접 만날 수 없어 아쉽다. 잘 살아내고 계신지.
“팬데믹으로 세계의 연결이 끊어졌다. 우리 건축연구소도 회의를 온라인 화상회의로 진행하는 등 많은 것이 바뀌었다. 업무 효율은 높아졌지만, 오감(五感)을 통해 생각하고 만들어져야만 하는 건축에는 부정적인 면이 더 큰 것 같다. 내 개인 생활은, 아침에 일어나고 밤에 잠을 자는, 평범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많은 이가 당신의 건강을 걱정하고 있다.
“두 차례 걸쳐 장기를 적출하는 큰 수술을 받은 것을 계기로 생활 습관을 바꿨다. 업무량을 반으로 줄였다. 덕분에 그동안 일에 쫓겨서 하지 못했던 독서를 할 시간이 생겨났다. 그 때문일까. 정신적인 면에서는 병에 걸리기 전보다 건강해졌다. 따뜻한 염려, 감사하다.”
-건강을 위한 비법이 있나.
“하루의 끝을 헬스장에서 가볍게 땀을 흘리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매일 만보 걷기도 한다.”
-새해 새롭게 결심하신 게 있는지.
“1969년부터 현재까지 해 온 ‘일’을 변함없이 계속해 가는 것! 그것이 전부다.”
-나이도 적지 않은데 어떻게 왕성하게 일을 하시나.
“핸디캡을 짊어졌지만, 그것을 고통스럽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내 활력의 원천은 일이다. 건축을 통해 나와 사회를 연결하는, 그 긴장감이야말로 내 삶의 원동력이다.”
-마르지 않는 창조력은 어디서 나올까.
“나는 항상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싶었고, 다음 번에는 현재의 것을 넘는 무언가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장소에서 그때밖에 할 수 없는 건축을 목표로 분주히 뛰어왔다. 하지만 지금까지 만들어온 하나하나의 일들을 되돌아보면 시작은 결코 ‘제로(0)’부터가 아니었다. 언제나 나 자신에게 체화된 기억이 그 시작점이었다. 예컨대 고베의 롯코에서 집합주택 의뢰를 받아 산자락의 부지를 방문했을 때, 건축 예정지로 선정된 평탄한 땅이 아닌 대지 뒤편의 급경사에 강한 영감을 느낀 이유는 산토리니나 카파도키아 등 과거에 보고 체험한 아름다운 마을의 기억이 무의식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가 현재에 영향을 미치고, 이로 인해 미래가 만들어지는…. 연속되는 시간의 흐름 속에 건축적 상상력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복싱 소년이 건축 거장으로
1941년 오사카 변두리에서 태어난 그는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넉넉지 못한 환경이었다. 열일곱에 프로 복서로 데뷔한 그는 대전료를 받아 생계에 보탰다. 트럭 운전, 공사장 막일도 그의 돈벌이였다. ‘권투로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꺾였을 때, 그는 글러브를 벗었다. 진로를 고민하던 그의 뇌리에 스친 것은 자신이 무언가를 만드는 데 늘 흥미를 느꼈다는 점이다. 고교 졸업 뒤 온갖 아르바이트를 해 돈을 벌었고, 그 돈으로 헌책방에서 책을 사 닥치는 대로 읽으며 건축 공부를 해나갔다. 그가 한눈에 반한 ‘근대건축의 아버지’ 르코르뷔지에 작품집은 너무 많이 베껴 모든 도면을 외울 정도였다. 스물넷 되던 해 배와 기차를 타고 유럽으로 향했고, 근대건축의 명작들을 눈으로 보고 체험했다.
-외할머니는 어떤 분이셨나.
“할머니는 늘 바쁘셨기에 내게 간섭하시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학교 성적을 물어보신 기억도 없다. 그 대신, 사회적 규칙을 가르치는 부분에서는 매우 엄격하셨다. 할머니의 가르침은 내 인격 형성의 기초가 됐다. ‘시간을 지킨다’ ‘약속을 지킨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 단순하지만 어려운 외할머니의 세 가지 가르침은 늘 마음속에 새기고 있다.”
-10대 때 권투 선수였다는 점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여전히 흥미롭다.
“어릴 때부터 지는 걸 싫어했다. 복싱을 시작한 이유도 먼저 체육관에 다니기 시작한 쌍둥이 형제에 대한 경쟁심 때문이었다. 연필을 쥐고 그림을 그리는 건축가와 글러브를 끼고 링에 서는 권투 선수는, 생활 방식은 전혀 다르지만 둘 다 내면의 불안을 딛고 용기 있게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싸움이라는 점에서 같다. 가혹한 트레이닝과 (체중) 감량을 반복하고서, 그 모든 것을 순간의 시합에 쏟아붓는다. 의지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오직 내 몸 하나! 복싱이라는 것은 순수하고 고독한 스포츠다. 육체와 정신을 극한까지 몰아넣는 가운데 환기가 되는 힘도 있다. 건축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프로그램과 예산 조건이 까다롭고 설계 자유도가 낮을수록 ‘무엇을 만들어야 하는가’를 철저히 고민하게 된다. 그 속에서 빛이 보이는 것이다.”
-’독학’이란 말에서 외로움과 막막함이 느껴진다.
“나는 대학에도 가지 않았고, 선배 건축가 밑에 제자로 들어간 적도 없이 내 설계사무소를 차렸다. 소위 말하는 ‘스승’은 없었다. 그래서 독학으로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을 개척해 모더니즘 건축의 초석을 놓은 르코르뷔지에에게 끌렸던 것 같다. 건축가로서 삶을 가르쳐줬다는 의미에서 르코르뷔지에는 나의 스승이다. 또 내게 여행은 곧 학교였다. 하지만 단지 건물을 보고 (주변을) 걷는 것만으로는 배울 수 없었다. 그것이 왜 아름다운지, 무엇이 나를 끌었는지를 계속해서 생각했다. 정답 없는 자문자답의 시간이 고통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독학의 시간이 건축가로서 자아 확립으로 이어졌다고 본다.”
-무엇이 당신을 거장으로 만들었다고 보나.
“자신을 스스로 ‘거장’이라 말하고 만족하면 거기서 끝이다. 새로운 세계를 향해 더 깊이, 더 멀리 생각하는 소박한 도전 정신이 창조의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건축가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식이나 기술이 아닌, 정신적 건전함과 꿈을 지속할 힘이다.”
-많은 작품을 세계 곳곳에 남겼다. 가장 애정을 갖고 있는 작품은 무엇인가.
“모든 프로젝트에는 저마다 고유의 흐름과 이야기가 있다. 우열을 가리기는 어렵다. 하지만 ‘스미요시 나가야’는 내 커리어의 원점이 됐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스미요시 나가야는 오사카 스미요시에 있는 폭 3.6m 깊이 14.4m의 콘크리트 박스형 주택이다. 출입구 말고는 개구부가 전혀 없다는 점, 벽과 천장을 전부 노출 콘크리트로 만들었다는 점, 좁은 집 한가운데를 지붕 없는 중정으로 만들었다는 점 때문에 평단으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이 집은 ‘좁으면 좁은 대로 이 땅에 어울리는 풍요를 추구해야 한다’는 안도의 철학이 반영된 것이었다. 스미요시 나가야는 일본 주거사의 변곡점이 됐다.
◇건물은 인간과 자연의 대화 장소
-작품에 늘 빛과 바람, 나무와 물이 공존한다.
“내게 자연이란 문자 그대로 생명의 원천이다. 인간은 그 일부이며,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이야말로 인간이 살아가야 할 길이라고 믿는다. 이런 이유로 건축과 조경에 대해 구상할 때, (주변의 나무들이 성장해) 언젠가 녹음 속에 묻혀 있을 건물의 모습을 상상하며 계획한다. 인간과 자연의 대화 장소를 만드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 여기서 빛은 추상화된 자연으로서 역할을 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빛과 어둠의 움직임은 단지 벽에 둘러싸인 공기 덩어리에 불과했던 공간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단지 이 빛을 극대화하는 것만으로도, 건축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
-콘크리트를 왜 고집하나.
“처음 콘크리트를 선택했던 이유는 단순히 건물의 내외장을 하나로 만들 수 있는 경제성에 끌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번 사용해 보니, 자유로운 형태를 다양한 표정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소성에 무한한 가능성을 느꼈다. 콘크리트라는 현대에서 가장 보편적인 건축 공법으로 아무도 할 수 없는 것을 만들고 싶었다. 이러한 소박한 도전 정신이 지금도 내가 콘크리트를 계속해서 고집하는 이유다.”
-’안도의 건축은 사용자를 배려하지 않는다’ 등의 비판은 어떻게 보시나.
“내게 건축은 사회와 소통하기 위한 장치다. 때론 그 소통이 기존 사회제도에 대한 문제제기를 목적으로 하기도 한다. 나는 언제나 편리하고 쾌적하게만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환영받지 못할 때도 있다. 비판은 진지하게 받아들여서 다음번 건축의 양식으로 삼되, 근본적인 생각과 일하는 태도를 바꿀 마음은 없다.”
안도는 1980년대 말 일본의 출판교육기업인 베네세홀딩스와 함께 산업폐기물 처리장이었던 나오시마섬을 문화예술의 섬으로 만드는 ‘나오시마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안도가 설계한 베네세하우스, 지추미술관 등이 섬에 들어섰고, 섬의 오래된 가옥들은 예술가들에 의해 갤러리로 탈바꿈했다.
-나오시마의 변화는 기적 같다.
“경제지상주의에 찌들어 있던 30년 전 당시의 일본 사회에서, 나는 육지에서 떨어져 있는 나오시마섬의 입지를 최대한 살린 ‘토착 현대 예술’이란 비전을 세우고 지금까지 추구해왔다. 그 과정에서 인구 감소로 어려움을 겪는 섬 주민들에게 내일을 향한 희망을 심어 드렸다. 나오시마의 현재 모습은 문화가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건축의 궁극적 목표는 무엇인가.
“건축이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도, 사람의 영혼을 구할 수도 없다. 건축은 무력하다. 하지만, 문화를 바탕으로 내일을 짊어질 아이들이 각자의 꿈을 발견하는 계기를 만드는 역할은 할 수 있다.”
-아시아의 대표 건축가로서, 아시아 건축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나.
“이제는 아시아의 시대라고 한다. 하지만 (아시아의 목표가) 단순히 이전의 선진국을 따라잡으려는 것이라면, 아시아 발전은 지구 환경 문제에 직면한 상황에서 절망을 가져올 것이다. 그러나 아시아다운, 공생하는 사회를 만들어가고자 한다면, 미래에 대한 희망을 키우는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에선 프리츠커상 수상자가 8명이나 나왔는데, 한국에선 아직 한 명도 수상자가 나오지 않았다. 그 이유는 뭘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시간을 들여서 정형적 건축이 아닌 각각의 장소가 가진 고유의 개성을 차분하게 발전시켜 나간다면 좋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한국에서만 할 수 있는 건축의 모습이 보일 것이다.”
-올가을 서울 마곡에서 LG아트센터가 문을 연다. 중점을 둔 부분은?
“(LG가) 민간 기업이면서도 높은 공익성을 추구한다는 점에 큰 감명을 받았다. 도시와 시민 모두에게 열린 시설이 되도록, 많은 이가 모여 감동을 공유하는 공간이 되도록 설계했다. ‘여기밖에 없는’ 공연장을 만들고 싶었고, 그래서 카탈리스트 튜브, 스텝 아트리움, 게이트 아크 등의 개성 있는 공간을 교차하게 만들었다. 관객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매력적인 공간이 되기를, 서울 시민뿐 아니라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문화 발산지로서 사랑받는 건물이 되기를 바란다.”
-한국에서 작업할 때 즐거운가.
“한국 사람들은 매우 열정적이다. 이 때문에 건축 과정도 격렬하다. 나는 너무 통제되는 바람에 특징이 없는 일본보다 그쪽을 더 좋아한다.”
◇순탄한 항해는 아니었지만, 노를 저을 순 있었다
-지금도 ‘이 기회를 놓치면 끝장’이란 심정으로 일하시나. 치열한 삶이 고되진 않나.
“건축도 인생도 좀처럼 생각대로 되지 않고,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래서 재미있는 것이다.”
-처음 건축사무소를 냈을 때부터 함께한 아내는 어떤 존재인가.
“나라는 인간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며, 또한 가장 엄격한 비평가이기도 하다.”
-건축 외에도 많은 사회 공헌 활동을 했다. 특히 환경을 보호하고 어린이 돕는 일을 많이 했는데.
“현대사회에서 인공과 자연의 불균형으로 생겨난 문제가 바로 환경문제다. 지금 가장 필요한 일은 사람들이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가치관을 바꾸는 일이다. 도쿄만의 쓰레기 매립지에 녹색 숲을 조성하는 계획인 ‘바다의 숲’ 등 내가 일본의 여러 도시에서 진행하는 나무 심기를 통한 환경 재생 활동은 내 나름의 노력이다. ‘아이들’을 왜 중요하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이유는 분명하다. 미래를 책임질 아이들을 키우는 것, 이것은 세상의 미래를 만드는 것과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사회를 향한 메시지도 여러 차례 냈다. 한국은 저출산 등의 문제가 심각한데, 일본 사회가 당면한 문제는 무엇인가.
“일본 역시 저출산 고령화, 빈부격차 등의 문제에 시달리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계속되는 경제 불황 속에서 젊은이들이 미래에 대해 희망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목표와 꿈이 필요하다. 이대로라면 일본에 미래는 없다.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과 일본의 많은 청년이 실패를 두려워하고 도전을 어려워한다. 청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은.
“지금 이 순간을 최대한 열심히 살아라, 그 긴장감을 생의 마지막까지 유지해 갈 내적인 힘을 기르라고 말하고 싶다. 길을 잃거나 좌절로 고통받는 일이 생긴다면, 아름답고 든든한 고향의 풍경으로 되돌아갔으면 한다. 그곳에는 당신이라는 사람의 뿌리가 있을 테니.”
-다시 태어나도 건축가가 되고 싶나.
“결코 순탄한 항해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오늘까지 노를 저어올 수는 있었다. 나를 지지해 준 분들과 내게 기회를 준 사회에 감사드린다.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태어나는 그때에 무엇을 할지 생각하고 싶다.”
-마지막 작품에 대한 구상이 있나.
“내 건축의 원점은 주택이었다. 마무리 역시 주택으로 하고 싶다. 아주 평범한 규모의 일반적인 주택도 괜찮다. 제한 없는 자유보다, ‘평범함’으로 인한 부자유 안에서 쟁취한 자유가 더 가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