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건축의 실험 무대가 된 듯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랜드마크가 들어서는 청담동, 신축과 복원 사이에서 신음하는 종로와 광화문 일대, 개발의 갈림길에 선 변두리 동네들···. 서울은 한양부터 경성, 현재의 서울까지 600년 이상의 시간이 건축을 통해 공존하는 공간이다. 건축인문학자인 김봉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과거는 영원한 현재’라는 니체의 말에 빗대 “건축의 시간은 영원한 현재”라고 표현했다. 지난가을 그가 펴낸 책 제목도 ‘건축의 시간 영원한 현재’(플레져미디어)다. 입춘 지나 봄날처럼 따스했던 날, 김봉렬 교수와 서울 건축 여행에 나섰다.

김봉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창덕궁 '진선문'에서 '인정문'에 이르는 빈 공간을 두고 '창덕궁을 지은 박자청의 '신의 한 수'"라 했다. 직선형이 아니라 삐딱하게 꺾여서 인정전으로 들어가는 동선도 당시로선 파격이었다. "이 파격적인 궁궐을 짓도록 허가해준 태종도 대단한 왕이었던 거죠."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내시에서 궁정건축가된 박자청의 걸작, 창덕궁

“결국 건축은 사람이 만들고, 사람이 쓰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곳에 얽힌 역사, 건축가의 생각을 읽어내는 게 건축 여행이죠.”

김봉렬 교수가 제일 처음 안내한 곳은 창덕궁이다. 창덕궁은 태종과 내시 출신 궁정 건축가 박자청 이야기가 숨어 있는 공간. 김 교수는 “세종과 노비 출신 공학자 장영실의 브로맨스(남자들의 우정)가 유명하지만, 건축 분야에서는 태종과 박자청 이야기가 그에 못지않다”고 했다. 개국 공신 황희석의 가인(家人)으로 하급 무관이자 건설 인력이었던 박자청은 종1품 공조판서까지 올랐던 불세출의 인물. 태종이 경복궁으로 들어가지 않고 창덕궁에 제2의 궁을 만들 때 그 임무를 도맡은 것도, 경복궁 경회루 연못의 틀을 완성한 것도 박자청이었다. “태종이 새로운 한양을 만들 때 한양도성, 청계천 등 한양의 근간이 된 도시 시설과 공공 건축은 모두 박자청의 손을 거쳐 완성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인정전 앞마당이 비뚤어진 이유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은 궁 중심축에서도 왼쪽(창덕궁을 바라볼 때)에 있다. “창덕궁은 태종의 정치적 야심과 박자청의 도시 맥락의 이해, 북악산 응봉의 맥을 잇는 지형적 특성 이 세 가지를 절묘하게 조화시켜 만든 궁입니다. 설계 당시 창덕궁 앞에 종묘가 있고, 뒤로는 응봉의 맥이 이어져 상충하니 박자청은 고민 끝에 정문을 서쪽 끝으로 옮겨 세우고 지형을 살려 궁을 짓는 방법을 택한 거죠.”

정문으로 들어서면 창건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금천교를 지나 진선문이 나온다. 김 교수는 진선문으로 가기 10m 전방쯤에서 멈춰 섰다. “여기에서 진선문과 마주하면 창덕궁만의 특징이 잘 보입니다. 길이 직선으로 난 게 아니라 비스듬하게 꺾여 있죠. 이 꺾인 길을 따라가야 인정전으로 갈 수 있어요. 지형과 공간을 살리고자 했던 박자청의 아이디어를 엿볼 수 있는 포인트예요.”

사다리꼴 마당으로 깊이감을 더한 진선문과 인정문 사이 마당에서 김봉렬 교수는 궁정 건축가 박자청을 '소환'했다. '사다리꼴 마당'은 자연 지형을 살리다보니 여의치 않은 공간을 넓어보이게 하기 위한 발상이었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진선문 안으로 발을 들이면 박자청의 ‘신의 한 수’라 할 수 있는 사다리꼴 형태의 인정전 앞마당(인정문 앞)이 펼쳐진다. “통로처럼 텅 빈 이 마당은 왕의 대관식 등을 했던 중요한 공간인데 자세히 보면 찌그러진 네모, 즉 사다리꼴 형태예요. 박자청은 지형과 도시의 축이 절묘히 만난 이 공간이 여의치 않자 사다리꼴 형태로 깊이감을 준 겁니다. 마치 이탈리아 피렌체에 있는 우피치미술관 앞뜰과 비슷한 공간감이 느껴지죠.”

완공 후에야 태종이 이 공간을 흡족히 여겨 박자청을 더욱 신임했지만, 설계 당시 박자청은 어명을 어기고 자신의 설계를 고집하다 하옥당하기도 했다는 일화도 있다. 김 교수는 이 비뚤어진 공간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조선왕조실록을 수없이 들여다봤다고 했다. “궁궐치곤 소박한 창덕궁은 무질서한 것 같지만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유기적인 형태죠. 궁궐은 결국 권력의 역학에 의해 만들어지는 공간인데 자연 지형을 거스르지 않고 지은 겸손한 권력이라 해석됩니다. 이 파격적인 궁궐을 짓도록 허가해준 태종도 대단한 왕이었던 거죠.”

◇‘창덕궁 세로수길’ 걸어 세운상가로

창덕궁 옆엔 현대건축가 김수근이 자신의 사무실로 설계한 구(舊) 공간 사옥이 있다. 지금은 리모델링해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가 들어서 있다. 한국 전통 건축의 특성을 현대적 기법으로 구현해 낸 구 공간 사옥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등록문화재가 됐다. 1971년 김수근 집터에 지은 사옥을 시작으로 1977년 신관 증축이 이루어졌다. 미로와 같은 나선형 계단이 상징. 낮은 층고, 좁은 면적을 입체감 있게 설계한 곳에서 숨은그림찾기 하듯 전시 작품과 만난다.

국가등록문화재인 김수근의 '구 공간사옥'(왼쪽)은 완공 후 반세기 동안 증축과 신관 개관 등을 거쳐 서울의 오래된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다. 미술관인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가 있는 구 공간사옥은 평일에도 건축 투어 겸 전시 관람을 하는 이들이 이어진다. / 아라리오뮤지엄

창덕궁 가까이에서 김수근의 흔적을 이어달리기 하려면 세운상가가 만만하다. 창덕궁 앞 대로를 따라 도보 5분 거리. 김 교수가 자주 다니는 길은 창덕궁 세로수길이다. 김 교수가 명명한 창덕궁 세로수길은 돈화문 앞 ‘우리소리박물관’ 뒤편으로 난 좁다란 골목길이다. 서너명이 나란히 걷기에도 좁은 이 길을 두고 김 교수는 “참 재미있는 길”이라고 했다. “창덕궁에서 종로에 이르는 왕복 2차로 주변은 태종 때 ‘파출소’들이 쪼르르 자리 잡았고, 관료들은 경복궁 사이를 오가며 업무를 봤습니다. 관료들은 창덕궁 앞 메인 길로 다니기가 부담스러웠을 거고, 뒷길을 애용하며 형성된 길이 이 길입니다.” 비유하자면 ‘창덕궁 앞 피맛골’같은 이 골목은 여관과 오래된 식당들이 드문드문 이어지다 익선동 골목을 거쳐 종로에 이른다.

창덕궁을 나와 세운상가로 가는 길, 김봉렬 교수가 "재미있는 길"이라고 소개한 '창덕궁 세로수길'은 서너 사람이 걷기에도 비좁은 골목길이다. 익선동을 거쳐 종로에 이른다(위). 한적하게 걷고 싶다면 종묘 돌담을 따라 이어지는 '서순라길'을 이용한다. 서순라길을 빠져나가면 바로 세운상가와 만난다. /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종묘 돌담길을 따라 세운상가로 직진하고 싶다면 서순라길을 추천한다. 요즘 ‘핫플’로 떠오른 길이다. 조선시대 종묘를 순찰하는 순라청 서쪽에 있다고 해서 서순라길로 불린다. 순라(巡邏)는 조선시대 순찰제도로 밤에 궁중과 도성 둘레를 순시하던 것을 말한다. 다소 외져 있었으나 정비 사업 후 ‘서울주얼리지원센터’ 등이 들어서며 지금은 봄·가을 걷기 좋은 길로 변신했다. 돌담을 가까이 마주한 펍(pub), 카페, 레스토랑, 꽃집 등을 구경하며 걷다 보면 어느새 서순라길을 빠져나와 세운상가에 이른다.

김수근이 설계한 세운상가. 완공과 함께 '최초 주상복합아파트'로 주목받았으나 이후 강남 개발, 명동 상권 발달, 용산전자상가 등장으로 슬럼화 길을 걸었다. 도시재생사업인 '다시 세운' 프로젝트는 현재 진행형이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건축 거장의 아픈 손가락

세운상가는 김수근에게 ‘아픈 손가락’과 같은 곳이다. 당시 서울시 예산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예산을 민간 건설사들이 쪼개 시공을 맡으면서 김수근이 설계한 ‘도시 속의 도시’는 청사진과 다른 모습으로 탄생했다. 여기에 1970년대 강남 개발, 1980년대 명동 상권 발달, 용산전자상가 등장으로 전자 상권의 주도권 싸움까지 더해지면서 세운상가는 슬럼화 길을 걸었다. 지금까지도 서울 도시 개발 계획을 이야기할 때마다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는 곳이다. 도시재생사업인 ‘다시 세운’ 프로젝트는 현재 진행 중이다.

대림상가에서 바라본 세운상가. 공중보행길 '세운교'로 이어진 두 건물 3층엔 전자박물관, 창작공간을 비롯해 아기자기한 카페, 식당 등이 들어서있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주상복합아파트로 지어진 세운상가의 '중정'. 자연 채광되는 투명 박공지붕과 복도가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사진 촬영을 위해 찾는 사람들이 늘면서 일반인 출입을 금하고 있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3층에 있는 공중보행길 ‘세운교’를 따라가면 세월을 입은 을지로, 충무로 풍경과 조우한다. 김 교수는 “600년 도시 서울에는 시간의 ‘켜’가 있다”며 “지층을 분석하듯 그 시간의 켜들을 잘 읽어내는 것 또한 건축 여행”이라고 했다. ‘전자박물관’과 창작 공간 등은 운영하지만 현재 세운상가 건축의 상징적 공간이라 할 수 있는 아파트 층의 ‘중정’은 탐방객 출입을 금하고 있다. 세운상가 전망대인 옥상도 코로나로 개방을 잠정 중단한 상태다. ‘세운협업센터’에서 진행하는 ‘한발, 두발, 세운 투어’를 신청하면 주민 해설사와 함께 세운상가 일대를 천천히 둘러볼 수 있다. 김봉렬 교수는 “아쉬운 대로 동숭동 대학로에 가면 ‘구 샘터 사옥’(현 공공일호) 등을 비롯해 1960~1980년대 김수근의 모더니즘 건축을 비교, 감상할 수 있다”고 했다.

누각 모양의 한국적인 미를 살린 절두산순례성지의 성당은 1세대 건축가 이희태를 있게 한 명작으로 꼽는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이희태의 명작, 절두산성당

1세대 건축가들을 이야기할 때 이희태를 빼놓을 수 없다. 김 교수는 “김수근, 김중업과 함께 한국 모더니즘 건축의 3대 거장”이라 불렀다. 그를 있게 한 마포 양화대교 북쪽 절두산성당(현 절두산순교성지)에 대해 김 교수는 “20세기 한국의 고전”이라 평했다. 해외 유학파 출신인 김수근, 김중업과 달리 빈농 집안에서 태어나 경성직업학교를 졸업해 독학으로 자신만의 건축을 완성한 이희태는 1960년대 절두산성당과 국립극장 현상 설계에 당선되면서 전성기를 맞았다. 국립극장, 혜화동성당, 국립경주박물관 등이 그의 작품이다.

독특한 원형 구조의 절두산순교성지 성당 내부. / 절두산순교성지
절두산순교성지 박물관에서는 우리나라 천주교 역사와 함께 절두산순교성지 건축에 관한 자료들을 살펴볼 수 있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그중 목조건축을 연상시키는 누각형 건물, 선비의 ‘갓’ 모양을 한 초가형 지붕, 서까래 등 전통적 문법을 철근 콘크리트로 재해석한 절두산성지는 한국 전통건축의 미학을 현대적 기법으로 완성한 건축물로 평가받는다. 김 교수는 “절두산성당은 위에서 내려다보면 그 진가를 알 수 있는데 공간 전체를 내려다볼 위치가 마땅치 않아 아쉬울 뿐”이라고 했다. 그나마 누각 형태가 잘 보이는 공간은 초입 ‘절두산 성지’ 기념비 부근이다.

절두산의 옛 이름은 잠두봉. 병인박해 당시 천주교인들의 머리가 잘려 숨졌다고 해 ‘절두산(切頭山)’이라 불리고 있다. 병인박해가 있기 전 겸재 정선의 그림 ‘양화환도’(1740년)에도 등장할 만큼 한강변의 명승지 중 한 곳이었다. 아픈 역사를 대변하는 이름과 달리 절두산순교성지 일대는 평화롭고 고요하다. 멀지 않은 거리에 국회의사당이 보인다. 의사당에 대해 김 교수는 “권위적 외관뿐 아니라 규모에 비해 내부 활용도가 떨어져 알맹이가 없는 건축”이라고 했다. 성당 아래로 난 계단으로 내려가면 ‘마포 걷고 싶은 길 4코스’와 이어진다. 천주교 신자뿐 아니라 조용히 사색을 위해 찾는 이들이 적지 않다. 성당 내부는 개방하지 않으나 성당 옆 ‘절두산순교박물관’은 코로나 대응 상황에 따라 최소 하루 전 예약 후 관람 가능하다.

'구 서울역사'(현 문화역서울284)는 복원 건축의 대표 사례다. 건축 당시 스위스 루체른 역사를 모델로 삼았다. 현재 복합 문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구 서울역사(현 문화역서울284) 내 '복원전시실'에서는 서울역사의 건축과 복원 과정에 대한 자료들을 살펴볼 수 있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김 교수는 책에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통해 푼 복원 건축 구(舊) 서울역사에 대한 생각도 전했다. “복원을 하고 재생에는 쓰임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대개 다목적이나 복합문화공간이라 이름 붙이는데, 다목적이라는 건 무목적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아요. 쓰임이 명확해야 건축도 명확해집니다. 멋있는 건물은 누구나 만들지만 공간과 조화를 이루고 잘 쓰여서 영원성을 지닌 지속 가능한 건축은 아무나 할 수 없어요. 건축도 사람과 같죠.”

[ ‘서울역 방앗간’에선 참깨라떼 한잔, 세운상가에선 ‘체다렐라’ 한 입! ]

건축의 도시를 걷다 마주친 맛집

'구 서울역사' 왼쪽에 있는 '연남방앗간 서울역점'의 참깨아이스크림(앞)과 오미자에이드. 지역 특산물을 활용한 메뉴를 맛보며 철로가 보이는 좌석에서 여행하는 기분으로 쉬어갈 수 있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소설가 구보씨’도 구 서울역사(현 문화역서울284) 한쪽에 자리 잡은 연남방앗간 서울역점을 봤다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을 것이다. ‘참깨라떼’ ‘참깨아이스크림’처럼 이름만 들어도 고소한 음료와 디저트가 유혹한다. ‘방앗간 커피’ ‘양구 애플크럼블타르트’ ‘서가네 뻥튀기 아이스크림’ 등 호기심을 유발하는 메뉴가 가득하다. 양구 애플 크럼블타르트는 사과 알갱이가 젤리처럼 씹힌다. 카페 한쪽에선 분기별로 지역을 주제로 한 팝업스토어를 운영한다. 2월의 주제는 강원도. ‘감자 빵’ 등 강원도 특산물로 맛을 낸 메뉴를 만날 수 있다.

창덕궁과 세운상가를 잇는 ‘서순라길’의 북카페 파이케 역시 발길을 멈추게 하는 맛집이다. 가볍게 읽을 만한 책을 큐레이션해두었다. 눈에 띄는 책은 ‘첩첩방산’. 책 표지에 주인장이 추천 사유를 적었다. ‘을지로의 마지막 지게꾼을 찾아가다. 읽고 나서 시장에 가면 지게꾼이 보이는 ‘매직’을 경험하게 됩니다.’ 파이케라떼 등 커피뿐 아니라 고흥 유자주, 추사 애플 와인 등 ‘낮술’ 한잔 할 만한 메뉴도 있다. 종묘의 돌담길이 가까이 있어, ‘돌담 멍 때리기’ 좋은 창가 석, 캠핑 스타일 좌석 등 골라 앉을 수 있다. 헤리티지 클럽 커피 앤 바는 한옥을 고쳐 카페 겸 바(bar)로 활용한 공간이다. 한옥의 마당 위를 투명창으로 덮어 자연 채광되는 덕에 날씨와 관계없이 커피와 디저트, 맥주와 와인, 위스키를 즐길 수 있다.

세운상가 뒤편으로 아기자기한 식당과 카페들이 줄지어 있다. 최근 도넛 유행을 타고 도넛 맛집 빠우를 찾는 이가 많다. 모차렐라와 체더 치즈를 섞은 이색 도넛 ‘체다렐라’를 비롯해 ‘빠우도나스’ ‘호두단팥’ ‘유자앙금’ 도넛과 ‘찹쌀핫도그’ 등이 각 1000~2000원 선이다. 커피도 2500원으로 부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