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약 8만년 전, 불을 사용할 줄은 알지만 스스로 피워낼 줄은 모르던 원시 부족이 있었다. 우람족은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었지만 어느 날 힘이 센 다른 유인원 종족에게 습격당하고, 피신하는 과정에서 소중한 불씨를 꺼뜨리고 만다. 불을 잃어버린 우람족은 음식을 익힐 수도, 추위를 피할 수도, 창끝을 뾰족하고 단단하게 다듬을 수도 없다. 부족 전체의 운명이 걸린 상황. 족장은 건강한 세 청년 나오, 아무카르, 고우에게 특명을 내린다. 불을 찾아오라고.

검치호에게 쫓기고 물에 빠져가며 고생하던 세 용사는 식인종에게 잡혀왔지만 아직 잡아먹히지 않은 이카를 구해준다. 이카는 우람족보다 기술과 문화가 발전한 다른 부족의 원시인이다. 이카는 힘세고 리더십이 있는 나오에게 여자로서 매력을 느낀다. 하지만 나오에게 남녀 관계란 번식을 위한 짝짓기에 불과하다. 게다가 생존에만 급급한 우람족은 유머와 웃음을 알지 못한다. 이카는 실망하여 자기 부족으로 돌아가 버린다. 상실감이 든 나오는 불을 찾겠다는 본래 목적도 잊은 채 이카의 고향 마을로 향한다. 장 자크 아노 감독의 1981년 작 <불을 찾아서>의 내용이다.

어린 시절 비디오로 처음 봤을 때, 필자는 의아했다. 불을 사용할 줄 알지만 스스로 피우지는 못한다니 이건 작위적 설정 아닐까? 그렇게 볼 수만은 없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화로의 신이자 가정의 신인 헤스티아가 있다. 우리의 고대 신화에도 부뚜막의 신, 아궁이의 불씨를 지키는 조왕신이 존재한다. 원시시대를 넘어선 후에도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유지하는 것은 신의 이름을 부르고 싶을 만큼 어렵고 중요한 일이었다는 뜻이다. 불을 가지고 있다는 것, 원하는 목적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과 동물을 구분한 최초의 에너지 전환(Energy Transition)이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에너지 전환은 GE에 고용되었던 이탈리아의 핵물리학자 체사레 마르체티가 주창한 개념이다. 마르체티가 볼 때 인류 역사는 에너지의 발전사와 동일했다. 나무로 불을 지피던 시절, 석탄이 주요 에너지원이던 시기, 석유가 핵심 에너지원이자 전략 자산이던 시대, 그리고 원자력이라는 전혀 다른 힘을 발견하고 활용할 수 있게 된 오늘날로 나눌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인간은 나무나 풀을 소화할 수 없다. 대신 불을 붙인다. 나무는 활활 타오르면서 인간에게 따스함을 전해준다. 나무를 ‘먹지’ 않고도 그 에너지를 꺼내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듯 인류는 불을 통해 다른 동물들과 다른 에너지 생산·소비 시스템을 확보했다. 불을 이용해 손쉽게 동물을 사냥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요리를 함으로써 영양분을 남김없이 섭취할 수도 있게 되었다. 불을 피우고 모여 앉아 음식을 나누고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인류는 문화를 형성해 나갔다.

인류 문명은 그 후 급속도로 발전했지만 사용하는 에너지 수준은 <불을 찾아서>의 고인류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자연 속에서 자라는 나무를 베어 불을 때는 차원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사정이 본격적으로 달라진 것은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일이다. 석탄과 증기기관의 힘으로 작은 섬나라 영국은 세계를 지배하는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거듭났다. 하지만 넓은 땅에서 뿜어져 나오는 석유의 힘으로 미국이 영국 자리를 빼앗았고, 세계 최초의 원자폭탄을 개발하면서 또 다른 에너지 시대를 열어젖힌 미국은 오늘날까지도 세계 최강국 자리를 지키고 있다.

탈원전은 에너지 전환일까? 나무에서 석탄으로, 석탄에서 석유를 지나 천연가스로 이행한 과정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다. 연료에 포함된 탄소(C)는 줄어들고 수소(H)가 늘어난 것이다. 그을음은 덜 생기면서 효율 높은 화력을 얻게 되었다는 말과 같다. 최종적으로 발견한 고밀도 에너지 원자력은 심지어 에너지 생성 과정에서 탄소를 전혀 발생시키지 않는다. 그러니 원자력을 버리고 태양광과 풍력을 늘리는 것을 ‘전환’이라 할 수는 있겠지만, 마르체티가 말한 에너지 전환 개념에는 맞지 않는다. 구름이 끼고 바람이 멈추면 작동하지 않는 비효율적 발전에 의존하는 것은 ‘에너지 전환’이 아니라 ‘에너지 퇴행’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원자력으로 에너지를 전환하는 일은 선택이 아니라 필연이다. 인류 발전 궤적을 놓고 봐도 그렇거니와, 기후변화가 중요한 의제로 떠오른 오늘날 상황을 놓고 보면 더욱 그렇다. 인류는 저탄소 에너지를 넘어 무탄소 에너지 사용을 대폭 늘려야 한다. 지난 10일 ‘원자력 르네상스’를 선언하며 원전을 추가 건설하겠다고 선언한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은 역사의 올바른 방향에 섰다고 할 수 있다. 다른 나라들도 결국 그 행렬에 동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 현실은 어떨까? 임기를 석 달도 남기지 않은 문재인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의 행보를 보면 황당하다 못해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원자력안전재단 이사장에 탈원전 인사를 임명한 것부터 그렇다. 애견협회 회장 자리에 보신탕 집 사장을 앉혀놓은 꼴이다. 탈원전에 대한 국민적 반감이 녹록지 않자 이재명 후보는 ‘탈원전이 아니라 감원전’이라고 양두구육(羊頭狗肉)하더니, 대선 후보 토론에서는 ‘RE100′ 같은 전문용어를 부정확하게 인용하기도 했다. 핵심은 RE100(재생에너지 100%)이 아니라 탄소 배출을 최소화하는 것이며, 그러자면 탈원전을 철폐하고 원자력을 더 활용하며 발전시킬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어떻게든 호도하고자 한 것이다.

<불을 찾아서>의 마지막 장면. 나오는 이카와 함께 불씨를 들고 우람족에게 돌아온다. 그런데 힘겹게 얻은 불씨를 누군가 실수로 또 꺼뜨리고 만다. 하지만 좌절은 금물. 이제는 불을 피울 줄 아는 이카가 있다. 이카는 능숙한 솜씨로 나뭇가지를 비벼 불을 붙인다. 나오와 우람족은 환호성을 터뜨리며, 그 전까지 몰랐던 사랑과 웃음까지 깨닫게 된다. 에너지 전환이 가져다 준 해피엔딩인 셈이다.

대한민국은 세계 최빈국 시절부터 원자력에 고급 두뇌와 예산을 투자한 나라다. 이카가 속한 선진 부족의 길을 일찌감치 걷고 있었다는 소리다. 이렇게 손에 넣고 키워온 소중한 과학의 불씨를 꺼뜨리려는 자들이 있다. 실수라고 보자니 너무도 초지일관하여 의도를 의심하게 된다. 우리를 식인종의 먹잇감으로 만들 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