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3월 9일 육군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 영문도 모르는 채 조사실로 끌려온 40대 육군 대령은 조사관이 시키는 대로 허겁지겁 옷을 갈아입었다. 계급장이 없는 해진 군복이었다. 며칠 동안 강도 높은 취조가 계속됐다. “수도경비사령관 윤필용 소장이 쿠데타에 성공하면 자리를 내주기로 했다면서? 모두 털어놔!” 세간에 박정희 정권 최대 권력 스캔들로 알려진 ‘윤필용 쿠데타 사건’의 시작이었다. 윤 소장이 한 술자리에서 쿠데타를 모의했다는 의혹이었다. 군 재판에서 이등병으로 강등된 윤 소장은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하다 1975년 형 집행정지로 석방됐다. 휘하 군 간부 40여 명도 강제로 군복을 벗거나 형을 살았다.

당시 윤 소장과 함께 내란 음모에 휘말려 옥고를 치른 사람 중 한 명이 자동차 부품 업체 한성실업 창업주인 지성한(90) 회장이다. 그는 지난 설 연휴 직전 윤필용 사건의 진상을 담은 책 ‘반추(反芻)’를 냈다. 군 엘리트가 한꺼번에 잡혀가고도 그 내막이 거의 알려지지 않아 미국 CIA조차 ‘실체를 알 수 없다’ 했던 사건의 블랙박스가 열린 셈이다. 최근 서울 논현동 자택에서 지 회장을 만났다. 그는 당시의 신문 기사나 재판 기록을 보지 않고도 2시간 넘게 그때 일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지성한 한성실업 회장은 1973년 '윤필용 쿠데타 사건'에 휘말려 억울한 옥살이를 한 뒤 군복을 벗고 사업가의 길을 걸었다. 서울 논현동 자택에서 만난 그는 "1970년대 정치판은 날카로운 발톱을 감춘 채 권력욕에 찬 맹수가 으르렁거리는 정글이었다"고 했다.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국운을 바꾼 윤필용 사건

-사건 50년 만에 책을 낸 이유는.

“윤필용 사건은 희생자가 너무 많았다. 사건 진상을 알리고 싶었다. 나이도 있고, 사건을 겪었던 사람도 나까지 셋 정도밖에 남지 않아 지금이 역사의 증인으로 나설 적기라 생각했다.”

지 회장은 당시 육군 중앙범죄수사단장(대령)이었다. 1972년 12월 모 일간지 사장 A씨 초대로 윤필용 소장, 김시진 청와대 정보비서관, 정소영 경제수석과 함께한 송년 모임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윤 장군이 술자리에서 A에게 나를 ‘이놈의 영감’ 하면서 후계자를 정해야 한다고 떠들었다며? 이런 버릇없는…”이라며 관련자 색출을 지시했다. 유신헌법(1972년 10월)을 선포한 직후였다.

-누군가 모함을 했다는 건가.

“윤필용 소장은 오히려 A 사장이 먼저 후계자 운운했고, 본인께서 ‘무슨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며 화를 냈다고 했다. 알고 보니 A 사장과 청와대 핵심 인사 B씨가 윤 소장과 나를 비롯한 여러 군인을 그물로 몰아넣으려던 시나리오였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함께 정권 실세였던 윤 소장이 하루아침에 반역자로 추락했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누명을 썼나.

“박 대통령이 대로(大怒)했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A 사장을 찾아가 녹음기를 켠 뒤 물었다. 보안사령관에게 무엇인가 시인한 게 있다던데 사실이냐고. A 사장에게 ‘별일 없었다’는 답을 들었고 그 녹음 테이프를 청와대에 전달했다. 하지만 이후 서빙고에 붙들려 가 ‘A 사장에게 총을 들이대며 협박했느냐’는 말을 들었다. 녹음 테이프는 대통령에게 보고되기 전 보안사에 압수됐고, A 사장은 사실과 다른 내용을 허위진술해 윤 소장과 내게 누명을 씌웠다.”

-왜 그런 음모를 벌였을까.

“권력 싸움이었다. 윤필용 소장은 당시 대통령의 총애와 확고한 지지 세력으로 입지가 강화됐다. 권력욕으로 눈이 맞은 A사장과 청와대 인사 B씨는 정권 2인자 이후락과 군의 수장 윤필용을 무너뜨리려 했다. 윤 장군이 대통령을 험담하며 후계자를 논했다고 보안사령부에 밀고했다.”

-그러나 이를 입증할 증거는 없지 않나.

“쿠데타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은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우리에게 누명을 씌운 배후자들에 대해서는 진상 조사나 재판이 이뤄지지 않았다. 진실이 담긴 녹음 테이프를 무시하고 사건을 쿠데타로 몰고 간 당시 보안사령관은 그후 좌천됐다. 쿠데타 모의가 터무니없음을 보여준 방증이다.”

-당신도 박정희의 신임을 받았는데.

“5·16 당시 전속 부관 등 모두 박정희의 총애를 받던 사람들이 사건에 연루됐다. 만날 때마다 내게 ‘지 대령’ 하던 박 대통령이 한마디도 소명할 기회를 주지 않고 나를 감옥으로 보냈다. 1970년대 정치는 정글과도 같았다.”

-고문 후유증은 없나.

“서빙고 분실을 떠올리면 아직도 등줄기가 뻣뻣해진다. 몇 번이나 기절하면 군의관이 와서 살리고 또 고문했다. 출소 후 당시 조사관을 우연히 마주쳤다. ‘처음엔 복수를 다짐했지만 당신도 국가의 공복으로 애쓴 것뿐’이라고 말해줬다. 그가 명함을 주며 ‘살다가 어려운 일 있으면 목숨 바치고 나를 돕겠다’고 했다. 그 이후로 만난 적 없다.”

수도경비사령부 시절 윤필용(왼쪽)과 지성한. /지성한 회장 제공

◇“그래도 박정희는 훌륭한 리더”

지 회장을 포함해 사건 연루자 대부분은 2000년대 들어 법원에서 폭행 등 가혹 행위를 당한 상태에서 진술을 한 점이 인정돼 무죄를 선고받았다. 윤 소장만 홀로 상고하지 않다가 2010년 세상을 떠났다.

-윤필용은 왜 명예회복을 하지 않았나.

“윤 장군은 ‘나는 대통령께 총애를 받던 사람이다. 재판으로 시시비비를 논하는 건 내가 모신 분께 불충’이라고 했다. 불명예 제대한 탓에 연금도 받지 못했고 사후 납골당에 묻혔다. 그의 아들이 2012년 재심을 청구해 무죄가 선고된 이후에야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사건 여파가 컸다.

“윤필용 사건 때문에 박정희 시해 사건이 일어났다고 본다. 이후락, 윤필용이 버티고 있었다면 김재규 같은 사람이 날뛰지 못했을 것이다. 언론인 조갑제가 ‘박정희 시절 최대 사건’이라고 평가했다.그 사건이 국운을 바꾼 거다.”

-책에서 박정희를 훌륭한 리더로 평가했는데.

“나를 감옥에 넣은 것이 사적인 감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를 딱 집어서 혼낸 게 아니라 전체 쿠데타가 있던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어떤 리더였나.

“청와대 특별민정반에 있던 시절 박 대통령 지시로 부산역 기차 암표 실태를 조사했다. 검은돈을 상납받은 부산역장이 파면됐다. 박 대통령은 정확히 3개월 뒤 암표 상황이 개선됐는지 확인하라 했는데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철도청장이 잘리겠구나’ 생각했는데 얼마 뒤 경부고속도로 건설 계획이 발표되더라. 암표 실태 조사를 명목으로 교통 수요 조사를 했던 것이다. 보이는 것만 보지 않고 본질을 꿰뚫어 볼 줄 아는 리더십이었다.”

◇정치에 환멸, 사업가로 변신

지 회장은 1년 반 복역 후 풀려났다. 하지만 군에 복귀하는 대신 전역 후 1976년 자동차·냉장고 플라스틱 부품을 생산하는 한성실업을 창업했다.

-전역 후 사업가로 변신했다.

“더는 정치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TV가 많이 보급되던 시절이라 플라스틱 사업을 시작했다. 대한전선 설원량 회장이 일감을 많이 줬다. 덕분에 남들보다 더 많은 세상을 볼 수 있었다.”

-서울마주협회장을 지내며 영국 여왕과도 인연이 있었다.

“1999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방한할 당시 직접 만나 마주협회 명예회원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두달 뒤 여왕이 위촉을 수락했다. 영국 여왕이 외국 마주협회에 가입한 것은 드문 일이었다. 이는 국내에 경마를 제대로 즐기기 위한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국내에 처음 거짓말 탐지기를 도입했다.

“미 육군 헌병학교에서 과학 수사를 배운 이후 육군과학수사연구소 소장으로 부임하면서 거짓말 탐지기 교육을 처음 시작했다. 이걸 계기로 한국의 모든 거짓말 탐지기 자격증은 지금도 국방부에서 발급한다. 대기업에서도 보안을 위해 주요 임원을 대상으로 거짓말 탐지기를 사용하는 것으로 안다.”

-올해로 90세다. 건강 비결은.

“현역 경영인으로 있는 것이 비결이다. 매달 1,2 차례 구미 공장에 간다. 새벽 5시에 서울에서 출발해 차로 3시간30분 달리면 하루 만에 다녀올 수 있다.”

지 회장은 지상욱 전 의원(현 여의도연구원장)의 아버지이자 배우 심은하의 시아버지로도 잘 알려져 있다. 지 회장은 아들을 ‘지 의원’이라 불렀다.

-정치하는 아들에겐 어떤 조언을 하시나.

“지 의원은 정치를 하면서도 아버지인 내 후광을 보지 않으려 했다. 내게 ‘아버지도 군인 시절 누구의 도움을 안 받지 않았느냐’고 하더라. 본인이 자신의 일을 헤쳐 나가는 스타일이다. 내가 장사를 하는 사람이라 (정치에 대해) 의논 대상도 아니어서 아들 일에 대해 나도 묻지 않고 지 의원도 거의 말하지 않는다(웃음).”

지 회장은 가족 얘기엔 말을 아꼈지만 책 말미에 아들을 향한 애정을 드러냈다. ‘우리 부자는 서로 바쁘게 살다 보니 얼굴을 자주 보지는 못하지만, 마음은 늘 가깝다. 소신 있게 살아 가는 아들의 모습을 보니 흐뭇하고 자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