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골때리는 그녀들’에서 모델 한혜진 등이 소속된 ‘구척장신’팀은 매회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프로그램의 인기를 견인했다. /SBS

“나 그거 새벽 1시까지 연습했는데 왜 못 차···.”

데뷔 27년 차 방송인 최은경이 승부차기 실축 후 두 손으로 머리를 치며 엉엉 운다. 같은 아나운서팀 골키퍼 오정연은 공을 막다 손가락 골절로 깁스했고, 박은영은 훈련 중 동료와 부딪쳐 눈에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프로팀 대회라도 출전했나 싶지만, SBS 예능 프로그램 ‘골 때리는 그녀들(이하 골때녀)’ 이야기다. ‘여자 축구의 르네상스’를 목표로 한 골때녀는 10%에 육박하는 시청률로 5주 연속 수요 예능 시청률 1위를 달리고 있다. 골때녀뿐 아니다. 스포츠 예능 부활의 시초가 된 JTBC의 ‘뭉쳐야 찬다’를 비롯해 지난달 인기리에 종영한 TV조선 ‘골프왕’, KBS ‘우리끼리 작전타임’, tvN ‘올 탁구나!’, MBN ‘국대는 국대다’ 등 스포츠 예능의 인기는 지상파와 종편을 넘나든다. ‘쿡방’을 넘어 ‘관찰 예능’을 지나, 바야흐로 스포츠 예능 춘추전국시대가 열렸다.

◇스포츠엔 ‘성장 캐릭터’가 있다

“K리그 선수들 정신 차려야 한다. ‘구척장신’보다 못한 멘털과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다. 경기에 목숨 걸어야 하는데, 그런 간절함이 사라졌다.”

골때녀 ‘구척장신’팀 감독이었던 최용수 강원FC 감독이 언론 인터뷰에서 프로 선수들을 질책하며 한 말이다. 최 감독의 말을 뒤집어 보면 왜 시청자들이 스포츠 예능에 열광하는지 알 수 있다. 프로 스포츠에서 사라지고 있는 진정성과 간절함이 스포츠 예능에는 담겨 있기 때문이다.

김교석 문화평론가는 “한동안 예능에서 일상을 공개하거나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관찰 예능이 대세였는데 이제는 그 포맷에 한계가 온 것 같다”며 “스포츠 경기를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하듯, 스포츠 예능은 관찰 예능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진정성’이라는 새로운 볼거리를 끌어낸다”고 했다.

이 과정에서 시청자는 ‘성장 캐릭터’를 통해, 배신하지 않는 노력이 주는 감동과 웃음을 만난다. 한 예능 베테랑 관계자는 “요즘 시청자들은 그냥 말장난으로 웃기는 예능은 보지 않는다”며 “성장하는 캐릭터가 있어야 하는데, 스포츠 예능은 그걸 제대로 보여준다. 일부 출연자들은 방송 시간이 아닌데도 따로 시간을 내서 연습한다. 이런 승부욕과 치열한 노력에 시청자는 감동을 느낀다”고 했다.

지난달 종영한 TV조선 ‘골프왕’도 게스트들이 매회 일취월장하는 골프 실력을 보여주며 ‘성장캐’로 큰 인기를 끌었다. 여기에 MC 김국진이 매 순간 골프 용어와 규칙 등을 알기 쉽게 전해, 골프 붐과 더불어 예능 프로만이 줄 수 있는 장점도 그대로 살렸다.

TV조선 ‘골프왕’은 김미현 프로의 지도를 받아 멤버들의 실력이 일취월장하는 모습으로 사랑받았다.

◇예능 시장에 쏟아지는 스포테이너들

허재, 김병현, 김동현, 유승민, 양준혁, 이형택, 이대훈, 모태범···.

최근 TV에서 사랑받는 스포테이너(스포츠 선수 출신 방송인)들이다. 어림잡아 세어봐도 양손에 다 꼽히지 않을 정도로 여러 종목의 다양한 선수들이 예능 시장으로 입성하고 있다. SBS 예능본부 김진호 PD는 “스포츠 예능의 인기에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스포테이너 전성시대가 인기를 견인하는 한 축”이라고 했다. 김 PD는 “스포테이너들과 얘기를 나눠보면 해설위원이나 지도자 정도로 진로를 생각했던 과거와 달리 방송에도 거부감이 없다. 대중도 많이 응원해주고, 자기 분야를 알릴 기회라고도 생각해 적극적으로 뛰어든다”고 했다.

또 다른 방송 관계자는 “입담 좋은 연예인들이 반복 출연하며 그 나물에 그 밥처럼 보였던 기존 예능에 식상해진 시청자들에게 스포테이너들은 새 그림을 보여준다”며 “시청자들은 운동선수 특유의 솔직한 화법과 유머, 근육질과 달리 수줍어하는 모습 등에서 순수함을 느낀다. 운동하는 사람에겐 지극히 평범한 재주가 시청자들에겐 웃음 포인트가 되기도 한다”고 했다.

김진호 PD는 “방송을 제작하는 입장에서도 스포테이너들은 같이 일하기가 좋다”고 했다. “방송은 팀워크가 중요한데, 운동선수들은 팀 운동을 많이 해서 시야가 넓고 소외된 사람들을 잘 챙기며, 현장에 잘 녹아든다. 또 몸을 썼던 분들이라 그런지 새로운 걸 배울 때 습득력이 굉장히 빠르다.”

◇여성·비주류 종목으로 신선함 줘

최근의 스포츠 예능은 과거와 달리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거나 비주류 종목을 다룬다는 점에서도 신선한 재미를 준다. 박세리, 한유미 등이 나왔던 E 채널의 ‘노는 언니’나, MBC 파일럿 프로그램 ‘컬링 퀸즈’, JTBC의 ‘마녀 체력 농구부’ 등이 대표적이다.

정덕현 문화평론가는 “코로나 때문에 스포츠를 할 기회나 중계 자체가 많이 없어지다 보니, 스포츠를 보고 싶은 욕망이 스포츠 예능 콘텐츠로 옮겨간 것 같다”며 “다만 예능과 스포츠가 같이 엮이면서, 어느 쪽에 방점을 찍는지에 따라 마찰이 생길 수 있어 주의해야 한다”고 했다.

SBS ‘골때녀’는 출연진의 골 득점 순서를 임의로 조작해 한동안 시청자들의 거센 반발을 사기도 했다.

김교석 평론가는 “골때녀의 편집 논란은 프로그램의 인기 요인이었던 진정성에 어긋나는 가장 큰 실책”이라며 “과거 스포츠 예능이 오합지졸 한 팀이 성장하는 서사에 집중했다면 최근엔 승부에 집중하는 경향이 커서, 지나친 편집은 조작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