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는 서로를 ‘다산’과 ‘연암’이라고 불렀다. 치밀하고 논리적인 검사 출신 남편은 다산 정약용, 창의력 풍부한 예술가 아내는 연암 박지원을 닮았다. 유창종(77)은 서울지검 강력부장 시절 권력 실세들을 구속한 ‘슬롯머신 사건’을 지휘했고, 대검찰청 초대 마약과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취미로 즐기던 ‘와당(瓦當·막새기와) 수집’도 수사하듯 몰두해 국내 최고의 기와 전문가가 됐다. 서울지검장 시절이던 2002년 그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와전 1873점은 단일 종류 유물 기증으로 박물관 역사상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우리나라 와전을 시대별로 망라했고, 중국·일본·동남아시아 와전까지 체계적으로 수집해 컬렉션 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
찔러도 바늘 하나 안 들어갈 듯한 천생 검사지만, 아내 얘기만 나오면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 개폐회식 의상감독으로 활약한 금기숙(70) 전 홍익대 섬유미술패션디자인과 교수가 그의 아내다. “집사람 자랑 좀 할까요? 세계 최대 규모의 유람선 ‘얼루어 오브 더 시즈(Allure of the Seas)’호에 아내의 패션 아트 작품이 설치돼 있어요. 변호사 생활 정리하고 2019년에야 타봤는데, 축구장 3개 반 크기 유람선의 6층부터 15층까지 시원하게 뚫린 중정에 층층이 걸린 작품이 얼마나 멋지던지! 직원에게 ‘마이 와이프(내 아내)’라고 자랑했더니 ‘오, 유 아 러키(당신은 운이 좋네요)!라고 하더군요.”
부부는 2008년 서울 부암동에 유금와당박물관을 세우고 인생 2막을 시작했다. 국내 유일 기와전문박물관으로 동아시아 와당·전돌 5000여 점과 중국 도용(흙인형) 20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박물관 이름은 부부의 성을 따서 지었다. 주변에선 이들을 ‘와당 부부’라고 부른다. 성격은 정반대지만 투닥거리면서도 서로를 응원하는 유쾌한 부부를 만났다. “세계 최고(最高)의 와당박물관에 오셨다”고 반기는 유 관장을 금 관장이 쿡 찌른다. “아우, 시작부터 잘난 척! 내가 겸손하라고 그렇게 얘기했잖아(웃음).”
◇베이징 개막식 한복은 경복궁 스트리트 한복!
부부는 올림픽과 인연이 깊다. 유 관장은 1988년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법무실장을 지냈다. 그는 “직전 LA올림픽은 ‘소송 올림픽’이란 별명이 생길 정도로 사후에 소송과 분쟁이 많이 일어났다”며 “처음부터 소송 없는 올림픽을 만들자는 목표를 세워 분쟁 당사자들을 설득하고 타협하는 데 주력했더니 태풍·소송·테러 없는 ‘3무 올림픽’ 기록을 세웠다”고 했다. 그로부터 30년 뒤 금 관장은 평창올림픽 개폐회식 의상 감독으로 발탁된다. 개회식에서 각국 선수단 피켓을 들었던 요원의 ‘눈꽃 요정’ 드레스가 특히 화제가 됐다. 드레스는 목선이 한복 동정을 닮았고, 메달을 들고 시상식에 등장한 도우미들의 털모자는 한복 방한모를 연상시켰다.
-한복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해서 눈에 띄었다.
금기숙(이하 금): “준비 과정부터 한국적이지 않다는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21세기 감성에 맞는 한복은 달라야 하지 않나. 88 서울올림픽 피켓요원이 입었던 한복과는 달라야 했고, 연달아 올림픽을 개최하는 일본·중국 전통의상과도 차별화해야 했다.”
-철사로 형태를 엮고 구슬을 꿰어 장식하는 대표작 ‘와이어 드레스’를 눈꽃 요정 드레스로 살렸더라.
금: 준비 과정에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자문단이 조언해줬다. 피켓요원 의상이 성공하면 그 올림픽은 성공한 거라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한국적이면서도 내가 제일 잘할 수 있고, 차별화할 수 있는 거. 내 작품밖에 없었다. 흰색 철사에 반짝이는 구슬, 비닐, 실크 등을 끼워 넣는 방식으로 수작업했다. 한복의 정수는 흔들림과 떨림이다. 저고리의 고름과 치마의 날림, 족두리의 떨새 장식, 저고리에 다는 노리개에서 느껴지는 율동감을 차용했다. 평창 바람이 굉장히 세니까, 바람에 따라 장식이 자연스럽게 흔들리게 했다. 일본의 기모노나 중국의 치파오에서는 볼 수 없는 한복 고유의 아름다움이다.”
유창종(이하 유): “IOC 전문가가 역대 최고의 피켓요원 의상이라고 칭송을 했다. 하하!”
-지난달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막식은 어떻게 보셨나.
금: 평창 개·폐회식 송승환 총감독을 비롯해 의상·음악 등 감독들이 만든 단톡방이 아직도 있다. 2년 전 도쿄올림픽 개막식 때도, 이번에도 다들 ‘우리가 잘했지?’라고 한마디씩 했다(웃음).”
-개막식에 한복 입은 여성이 등장해 논란이 됐는데.
금: “중국은 여러 소수민족 중 ‘조선족’ 의상을 입고 나온 것이라고 했는데, 조선족이 입는 한복이 아니라 요즘 경복궁 앞에서 유행하는 최신 스트리트 한복 디자인이다. 원래 패션은 최고로 좋아 보이는 걸 베끼게 돼있다. 양장 디자이너들이 파리 패션을 베끼는 것처럼.”
-문화공정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금: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다. 어, 그랬니? 우리 것이 그렇게 예뻤어? 웃으면 될 일이다.”
◇“검찰의 수사권은 장군의 칼”
유창종은 사건을 몰고 다니는 검사였다. 초년병 시절부터 수사 검사로 이름을 날렸다. 1974년 초임 검사로 부임한 지 한 달도 안 돼 전국 자동차 보험 사기단을 일망타진해 ‘자해공갈단’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고, 거북선에 실린 대포라던 국보 ‘별황자총통’이 가짜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장기 미제 사건이었던 민주통일당 창당방해사건(일명 용팔이 사건)을 수사해 거물 이택돈 전 의원과 장세동 전 안기부장을 구속시켰고, 서울지검 강력부장 시절엔 슬롯머신 사건을 지휘하며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당시 슬롯머신 사건 주임검사가 홍준표 국민의힘 의원이다.
-수사 착수부터 온갖 방해와 조직적 음해에 시달렸다고 들었다.
“정관계 인사와 검찰·경찰 간부들이 연루된 대형 사건이었다. 검찰 역사엔 치욕적인 사건이고. 압력도 많이 받았지만 항상 두 가지 기준만 생각했다. 피해자 입장에서 최대한 열심히 추궁해 조사하고, 결론을 내릴 땐 피의자 입장에서 혹시 억울한 일이 없는지 챙겨볼 것. 스스로에게도, 후배들에게도 그것만 지키자고 했다.”
-홍준표 의원과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 둘 다 휘하에 있었는데 검사로서 그들은 어땠나.
“홍준표는 정의감이 뻗치고 강직하지만 감정이 얼굴과 행동에 다 드러나는 사람이다. 윤석열은 성남지청장 시절 같이 일했다. 정의감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따뜻한 사람이다. 인간을 사랑할 줄 안다. 국민이 원해서 정치판에 불려 나왔지만, 모두 감내할 만큼 그릇이 크다고 본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2년 수사 사령탑을 맡았던 이용호 게이트 부실 수사로 대검 중수부장에서 법무연수원으로 좌천됐던 그는 같은 해 ‘검찰의 꽃’이라는 서울지검장으로 복귀했다. 당시 취임사에서 “거악 척결에 힘써야 할 검찰이 경찰을 상대로 강력사범 검거 실적 경쟁이나 해왔다”며 검찰의 수사 관행을 강하게 비판했다. “검찰의 수사권은 장군의 칼과 같이 절제와 위엄을 지켜야 하는데, 장군이 직접 소총 들고 실적 경쟁을 해온 것은 아닌지 반성해야 한다는 뜻이다. 검사는 사병이 아니라 장군이고, 장군은 전쟁 전체를 보는 지휘 능력이 있어야 된다. 검사가 권총 차고 소매치기 잡으러 다니면 되겠나. 어떻게 하면 소매치기를 일망타진할까 구상을 하고 지휘해야지.”
-하지만 검찰에 대한 국민의 반감이 어느 때보다 심하다.
유: “검찰이 경찰화되면서 자초한 측면이 크다. 수사 실적에 빠져서 인권 보장 기관이 인권 침해 기관처럼 국민에게 상처 주는 집단이 돼버렸는데, 수사권은 장군의 칼처럼 함부로 휘둘러선 안 된다. 그런데 요즘은 대놓고 칼을 휘두르는 경우가 많아 부끄럽고 안타깝다.”
-2003년 노무현 정부 ‘검찰 인사 파동’ 때 대검 마약부장으로 후배를 상사로 모시게 되자 사표를 냈다.
“착잡했다. 언제 검찰을 떠나도 상관없다는 자세로 일했으니 자리에 연연하진 않았다. 다만, 사회적 중증 환자(범죄)를 처리하는 외과 의사인 검찰 조직이 이렇게 상처받으면 거악은 누가 척결을 하나 하는 안타까움이 컸다. 요즘 말하는 검찰 개혁이라는 것도 그렇다. 외과 의사들이 수술하다가 실수하는 사람 있다고 외과 의사 다 없애버리고 수술하지 말라는 식이면 안되지 않나.”
◇기와 검사, 수집에 빠지다
그날은 운명처럼 왔다. 1978년 8월 5일 충주시 가금면 탑평리 중앙탑 주변 밭. 충주지청에서 근무하던 검사 유창종은 기와 파편 한 조각을 주워 들었다. 그 후로 40년, 그는 ‘기와 검사’로 불리며 우리나라를 비롯한 중국·일본 와당 5000여 점을 수집해 국내 최고의 와당 전문가가 됐다. 그는 “처음엔 재미로 수집했지만 와당에 담긴 문화·역사·철학을 배우다 보니 어느새 와당이 내 인생의 스승이자 친구가 됐다”고 했다.
-탑평리에서 주운 기와 조각이 시작이 된 건가.
“그해 식목일 아내와 함께 부여에 있는 골동상에서 조선 민화 두 점을 구입하고 기와 두 점을 개평(덤)으로 받았다. 망태기에 와당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는데 골라서 가져가라고 하더라. 와당 귀한 줄 모르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충주 탑평리에서 연화문 수막새를 발견했는데 빛깔은 백제 특유의 회백색인데 연꽃 이파리가 여섯 개인 것은 신라의 특색이고, 웅건한 맛은 고구려더라. 한 개의 와당에 고구려·백제·신라가 다 깃들어 있다니 신기했다. 그때부터 ‘와당 수사’가 시작됐다.”
절터와 건물지에 버려진 기와 파편을 모으는 것으로 수집을 시작한 그는 이후 전국 곳곳의 골동품상들을 뒤지고 다녔다. 당시만 해도 와당 값이 낮아서 얄팍한 평검사 월급으로도 사모을 수 있었다. 그는 “검사라는 업의 본질이 기와 연구와 다르지 않더라”며 “증거를 갖고 범죄 사실을 입증해내는 것처럼 와당이라는 증거를 가지고 당시의 역사와 문화를 추론해가는 과정이 즐거웠다”고 했다. 금 관장도 골동 가게를 같이 다니며 ‘기와 사랑’을 함께 키워나갔다.
-진짜 국보도 찾고, 가짜 국보도 찾은 별난 이력을 갖고 있다.
유: “충주지청 시절 예성문화연구회라는 동호회를 만들어 주말마다 답사를 다녔다. 마지막 답사날 기적처럼 ‘충주 고구려비’를 발견했다. 마을 앞에 서있던 비석에 석양빛이 비치는 순간, 누군가 ‘글자다!’ 소리를 질렀다. 이끼를 벗겨보니 글자들이 빼곡히 적혀있는 거다. 나중에 국보로 지정이 됐다. 1996년 순천지청장 시절에는 거북선 별황자총통(국보 274호)이 가짜라는 수사를 성공해서 국보가 취소되는 사건이 있었다. 진짜 국보도 찾고, 가짜 국보도 찾은 기록은 아마 앞으로도 안 나오지 않을까.”
그는 2002년 자식처럼 아끼던 와당 1873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박물관에 갈 때마다 일본인 와당 수집가 이우치 이사오(井內功)의 기증품으로 만들어진 ‘이우치실’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일본인도 이렇게 하는데 수집품을 꽉 틀어쥐고 있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고 했다.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엔 그의 이름을 딴 ‘유창종실’이 ‘이우치실’과 나란히 자리하게 됐다.
유: “누가 보면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할 정도로 미친 듯이 모으고 아낌없이 기증했다.”
금: “학예실에서 연구에 필요하다고 해서 가짜까지 기증했으니까. 이우치실과 비교해서 컬렉션이 떨어지면 안 되니까, 막판에 귀한 발해 와당까지 입수해서 기증했다.”
-서울공예박물관 ‘허동화·박영숙 컬렉션’이 인상적이더라. 자수공예 유물 수집과 연구에 헌신한 고(故) 허동화 한국자수박물관장이 생전 수집품 5000여 점을 기증하면서, 부부의 이름을 공동으로 넣어 기증 증서를 작성했다.
금: “좋은 포인트(웃음)!”
유: “내가 문화계에서 가장 존경했던 어른이다. 늘 부부가 함께 문화 행사에 다니는 모습이 보기 좋았고, 본받으려 노력한다. 나도 국립중앙박물관에 ‘유창종·금기숙’ 이름으로 기증을 했어야 했는데 그때 생각이 모자랐다. 두고두고 후회가 돼서 박물관 개관할 때는 부부의 성을 같이 넣었다.”
-수집하면서 별별 에피소드도 많았겠다.
유: “와당뿐 아니라 모든 골동 수집은 결국 눈싸움이다. 감정 능력 싸움. 한번은 골동 가게 사장이 와당 석 점을 내놓으면서 10만원, 10만원, 50만원을 부르더라. 내가 100만원을 주면서 당신이 말한 50만원짜리는 10만원 값이고, 10만원짜리는 적어도 100만원 이상 불러야 되는 물건이라고 말했더니 사장 얼굴이 벌게졌다. 그다음에 갔더니 ‘알아서 값을 쳐달라’고 하더라.”
금: “수집이란 게 중독성이 강해서 중앙박물관에 전부 기증하고 나서도 계속 모았다. 이 양반이 변호사 된 뒤에는 주말마다 도쿄·오사카·홍콩·베이징을 신나게 쏘다녔다. 매주 금요일 밤 비행기 타고 가서 일요일 밤 비행기로 돌아오는 일정을 몇 달간 쉬지 않고 했다. 이건희 회장 부부는 워낙 격이 높은 걸 많이 모았지만, 우리처럼 이렇게 같이 즐기지는 못했을 것 같다.”
유: “가기 전에는 두근두근 설레고, 좋은 물건 만나면 쌩쌩한데 아무것도 못 사고 돌아올 때는 얼마나 피곤한지 모른다. 그래도 좋았다. 변호사 해서 버는 돈을 죄다 털었으니까. 하하!”
◇끊임없이 배우고 도전한다
-유 관장의 고등학교 은사 소개로 두 분이 처음 만나셨다고 들었다.
유: “아주 좋은 규수가 있다고 해서 나갔다. 이 여자가 내 짝이구나! 첫눈에 반했다. 저돌적으로 추진해서 결혼했다. 원래 부부가 이성형과 감성형이 만나는 게 좋다더라. 나는 아주 전형적인 이성형이고 집사람은 전형적인 감성형이라 단점을 보완해준다.”
-졸업과 동시에 결혼해서 아이 둘 낳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쉽지 않았을 텐데.
금: “학부 땐 재미없던 공부가 스스로 하니까 그렇게 재미있더라. 대학원장 면접 때 내가 한 얘기가 지금도 생각 난다. 왜 공부하냐고 묻길래, 저처럼 집에 있는 아줌마들도 하면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유 관장이 응원해주셨나.
금: “어우, 적극 응원했지!”
유: “내가 이 사람 패션 아트나 복식 강의를 대신 할 수 있을 정도다(웃음).”
부부의 인생은 끊임없는 도전의 연속이다. 유 관장은 “인생이란 100년짜리 지구 여행을 온 것이니 행복하게 여행을 즐기기 위해서는 풍성하게 경험하자는 게 삶의 신조”라고 했다. 풍성한 경험을 위해 문화를 즐기고, 사고의 시공을 넓히며, 남을 배려하고 나누자는 것. 검사들에게 인생의 목적이 뭐냐고 물었다가 ‘검사장’이라는 대답이 나오면 ‘검사장 된 이후에는 뭘 할 거냐, 덜 떨어진 생각 말라’고 호통을 쳤다는 그는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수단이 아닌 인생의 목적을 분명히 정해야 하고, 능력과 용기, 지혜, 끈기를 가지고 준비해야 한다”는 말을 꼭 써달라고 했다.
-중국과 일본에서 강의하려고 환갑인 2005년부터 중국어와 일본어를 공부했다던데.
유: “와당 공부를 해보니 한·중·일 삼국의 역사와 문화는 아주 긴밀하게 연결돼 있어서, 한국 와당을 모르면 중국 와당을 제대로 연구할 수가 없고 일본 와당을 알려면 한국 와당을 배워야 한다. 중국어·일본어 배워서 중국과 일본 대학에서 특강 형식으로 강의를 했는데, 반응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요즘 젊은 세대 사이에서 반중 정서가 심하다.
유: “한·중·일은 국민들이 의식했든 안 했든 역사적인 동북아시아 공동체로 살아왔다. 세 나라 중 어느 한 곳의 문화가 발전하면 부지불식간에 다른 두 나라는 그걸 배우며 지내왔고, 서로 협력하며 살아야 한다는 걸 와당에서 배운다. 내가 와당 강의를 다닌 중요한 이유가 바로 그거다. 새 대통령이 취임하면 한·중·일 관계를 미래 지향적인 안목으로 이끌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 세 나라가 100년 후를 바라보며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 서로 협력해 세계의 정치·경제·문화 중심지가 되는 것이 우리 부부의 꿈이다.”
두 사람에게 서로에게 받은 가장 큰 선물이 뭐냐고 물었다. 금 관장은 곰곰이 생각하다 “손자”라고 답했다. “이 사람과 결혼했으니까 사랑스러운 손자를 만났죠.” 유 관장은 고민 없이 답했다. “금기숙이 나랑 결혼해준 거! 내 인생 최고의 선물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