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변리사 신형규(48)씨는 최근 다니던 특허 법률 사무소에 6개월 휴직을 신청했다. 초등학교 6학년 아들의 입시 준비에 ‘올인’하기 위해서다. 신씨의 목표는 아들을 노스런던칼리지에잇스쿨(NLCS), 한국국제학교(KIS) 등 제주도 국제학교에 진학시키는 것. 지난달 말부터 영어 전공 대학 강사를 집으로 불러 1주일에 2번, 하루 1시간 30분씩 영어 모의 면접 수업을 진행하고 있고, 국제학교 교재를 구해 직접 아들에게 ‘과외’ 수업을 하고 있다. 신씨는 “최근 회사가 바쁜 상황이지만 지금이 아이 진로에 매우 중요한 시기라 내 모든 시간과 노력을 입시에 쏟아붓기로 했다”며 “입시는 정보 싸움이기 때문에 국제학교에 자녀를 입학시킨 고객이나 사업 파트너들에게 교육 노하우도 듣고 있다”고 했다.

#2. 대전에 있는 정부 출연 연구소 책임연구원인 송현민(44)씨는 대학 병원 간호사로 바쁜 아내를 대신해 8세 딸의 육아를 도맡고 있다. 딸의 유치원 학예회와 학부모 모임엔 연차를 내고 참석했고, 인스타그램을 검색해 책가방·필통·공책 등 딸이 좋아할 만한 학교 준비물도 직접 구입했다. 지난 2일 초등학교 첫 등굣길도 함께 갔다. 송씨는 “학교에 가보니 절반 가까운 학생이 아빠와 같이 왔더라”며 “학교 정보 공유 차원에서, 입학 날 만난 반 학부모들의 연락처를 받아 SNS 모임도 만들었다”고 했다.

‘헬리콥터 대디(아빠)’가 늘고 있다. 헬리콥터 대디란, 자녀 주변을 맴돌며 공부·학교 생활을 챙기는 엄마를 가리키는 ‘헬리콥터 맘’처럼 자녀 교육에 열성적인 모습을 보이는 아빠들을 말한다. 과거 자녀 교육에 방관자 가까웠던 아빠들이 직접 학교 입시 정보를 알아보고, 자녀의 진로 결정에 깊숙이 개입하기 시작한 것. 코로나로 재택근무가 일상화되면서 교육에 관심 갖는 아빠가 크게 늘었다는 분석이다.

새 학년 새 학기가 시작된 지난 2일 경기도 분당의 한 초등학교에서 아빠들이 자녀의 손을 잡고 등교하고 있다. 최근 자녀의 입시를 직접 챙기고, 학업 성적 관리에 적극 나서는 '헬리콥터 대디'들이 크게 늘고 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치맛바람? 바짓바람도 매섭다

아빠들의 ‘바짓바람’은 특히 학원가에서 강하게 불고 있다. 올해 고등학교에 진학한 아들을 둔 박승환(51)씨는 지난해 11월부터 매주 대학·학원 입시 설명회를 찾고 있다. 박씨는 서울 주요 대학별 논술 전형 비율, 평가 항목 등을 모두 외우고 있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경험을 살려 집에서 아들에게 문학, 논술도 직접 가르친다. “요즘 아빠들 사이에선 생기부(학교생활기록부), 학종(학생부 종합 전형)이 뭔지도 모르면 바보 취급 받습니다. 아들의 고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생기부에 필요한 동아리·봉사 활동 계획도 이미 다 정해놨죠.”

허석진(45)씨는 지난 1월 명문 사립고에 진학하는 딸을 위해 수원에 있는 회사를 그만두고 서울 강동구의 학교 근처 회사로 이직했다. 허씨는 “딸 학교 수업이 끝나면 학원에도 직접 데려다줄 계획”이라고 했다. 서울의 한 인문계 고등학교 교사는 “4~5년 전엔 한 해 동안 얼굴 한 번 못 보는 아버지가 대부분이었는데 요즘엔 과목별 수행 평가 결과가 나오면 바로 문의 전화를 하는 아버지가 많다”며 “점수 산정 기준에 대해서도 자세히 물을 만큼 자녀 성적에 관심이 높다”고 말했다.

교육 전문가들은 “아버지가 교육에 관심을 갖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말한다. 한 대학 입시 전문가는 “과거엔 자녀의 성공엔 조부모의 재력,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심이 필수라고 했지만 입시 전형이 복잡해지는 요즘엔 아버지의 역할도 중요해지고 있다”며 “아버지들이 적극적으로 코치해주면 아이들이 더 좋은 결과를 얻는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다른 입시 관계자는 “아버지의 교육열이 입시에만 초점이 맞춰질 경우 아이가 부담을 느껴 오히려 나쁜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했다.

◇책, 웹툰으로 육아 경험 공유

자신만의 교육 철학에 따라 아이를 키우고 각종 콘텐츠를 통해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는 아빠들도 늘고 있다. 제주도에서 내과 병원을 운영하는 김석씨는 지난해 3월, 8년간 아들 둘을 키운 경험을 담은 책 ‘아빠의 교육법’을 펴냈다. 김씨는 책에 ‘아이들과 대화를 많이 해야 한다’는 식의 뻔한 말보다 자녀들이 스스로 좋은 습관을 갖도록 유도하는 노하우를 담았다. 김씨는 컴퓨터 게임에 열광하는 아이들에게 계약서를 쓰고 약속을 이행하면 게임을 하도록 허락하는 등 보상을 주고 있다. 무턱대고 게임을 못 하게 하거나 게임 시간을 줄인다고 해서 그 시간만큼 공부를 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고 나서 시작한 일이다. 김씨는 “게임을 하기 위해 알아서 공부하기 때문에 우리 집에선 잔소리가 거의 없다”며 “과거엔 나도 주 6일 회식하고, 주말에 골프에 빠졌던 아빠였지만 지금은 아이들과 잘 놀아주는 아빠가 됐다”고 했다. 서울대 공대 박사 출신의 이대양씨는 지난해 11월까지 2년 동안 네이버 포털에 자신의 육아 경험을 담은 웹툰 ‘닥터앤닥터 육아 일기’를 연재했다. 이씨는 교수 꿈을 접고 자녀를 키우면서 느낀 고민을 담담히 웹툰으로 표현해 전국 아빠·엄마들의 큰 공감을 얻어냈다.

◇아버지회, 온라인 카페 만들어 서로 응원

‘열성 아빠’가 늘면서 학교에서 아빠들이 주축이 되는 학부모 모임도 많아지고 있다. 어머니회와 별개로 ‘아버지회’가 결성되고 있는 것. 아버지회를 통해 교육에 필요한 정보를 서로 나누고, 자녀들과 함께 캠핑, 봉사 활동을 다니기도 한다. 최근 서울 한 초등학교의 아버지회에 가입했다는 40대 남성은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아들, 딸과 소통이 줄어드는 것 같아 고민하다 아버지회에 들었다”며 “아저씨들끼리 모여서 술 마시는 모임이 아닐까 걱정했는데 도움 되는 활동이 많아 놀랐다”고 했다.

배우 이창훈씨도 최근 한 방송에서 딸이 다니던 초등학교에서 6년 내내 녹색 아버지회로 활동했다고 밝혀 화제가 됐다. 중학생 자녀를 둔 한 50대 남성은 “중학생 아빠들이 모인 온라인 카페에선 ‘아빠가 자녀의 독서 지도에 적극 나서면 자녀의 독해력과 수학 성취도가 높아진다’는 최신 연구 결과를 공유하며 서로를 응원해준다”며 “우리 아버지 세대는 자식 교육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나는 아이가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최대로 지원해줄 생각”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