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라이트의 영화 ‘다키스트 아워’에서 영국 총리가 된 처칠에게 제일 먼저 뭐할 거냐고 묻는 장면을 보고 실소했다. 샴페인부터 한잔할 거라고 했기 때문이다. 총리가 된 사람이 처칠이 아니었다면 그렇구나 하고 넘어갔겠지만, 처칠이라면 상황이 다르다. 매일 술을 마시고, 샴페인도 매일 마셨던 사람이 처칠이라서다.
그러니 보통 사람들이 축하할 일이 있을 때 샴페인을 마시는 것처럼 샴페인을 마시겠다는 걸 듣고 웃음이 나왔다. “물이나 한 잔 할게요” 정도로 들렸으니까. 이분은 유머를 즐겼고, 어찌나 유머를 사랑했는지 키웠던 고양이의 이름마저 ‘조크’로 지을 정도였으니 충분히 그럴 만하다고 본다. 알아들을 사람은 알아서 웃으라는 그 정도의 조크랄까.
술을 누구보다도 많이 마시고, 매일 마시고, 그럼에도 취하지 않았던 사람으로 유명한 게 이분이시다. 보리스 옐친이 술을 마시고 이런저런 기행(?)을 벌인 것과 달리 처칠은 술과 관련된 별 사고 없이 죽을 때까지 술을 드셨다. 숙취 없이, 활력과 용기라는 술에서 얻을 수 있는 장점만 취하면서 말이다. 취하지도 않고, 건강도 문제없이 내내 마셨다. 조지 6세가 어찌 그렇게 낮술을 잘 드시냐며, 반은 감탄 또 반은 의아해서 묻는데 처칠은 이렇게 말한다. “연습하면 됩니다.” 역시 조크라고 생각한다. 술을 그렇게나 많이 마시고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던 건 집안 내력이었다고 들었다.
눈 뜨자마자 스카치를 마시고, 점심에 샴페인 한 병, 저녁에 또 샴페인 한 병, 새벽까지 브랜디와 와인을 드시는 게 매일의 일정이었다고 ‘다키스트 아워’에 나온다. 남들이 보리차를 먹듯이 스카치를, 탄산수를 먹듯이 샴페인을 마시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과시적인 음주 일정표를 본 적이 없다. 비싼 게 특성인 브랜디와 샴페인을 쉬지 않고 들이마시는 매일매일이라니.
처칠에게는 돈 문제가 있었다. 나름대로 있는 집안의 자제에다 돈도 꽤나 버셨지만 비싼 술을 너무 마셨다. 돈을 많이 번다고 해도 그보다 더 쓰게 되면 돈이 모자란 것은 당연한 일. 어디 술만 드셨나? 시가도 피웠다. 영화에서도 내내 그러고 있다. 공과금도 못 내게 생겼다고 아내가 돈 걱정을 하자 그는 해결책을 내놓는다. 하루에 시가 4대만 피우겠다고.
정말 그랬을 것 같진 않다. 그건 그냥 순간을 넘어가려는 귀여운 면피용 발언인 것 같고, 시가를 줄일 수 있는 사람으로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 더 많이 벌려고 했다.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엥겔지수를 줄이기 위해 식비를 줄이겠지만, 그는 상식적인 사람이 아니고 또 시가와 샴페인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이니까.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한 가지다. 분모에 해당하는 식비를 줄일 게 아니라 분자에 해당하는 소득을 높이면 된다.
그래서 술값을 충당하기 위해 정치를 하면서도 끊임없이 신문과 잡지에 글을 썼다고…. 나중에 2차 세계대전 중에 했던 연설로 노벨문학상을 받게 되는데, 나는 이걸 샴페인의 힘이라고 본다. 샴페인 값을 벌기 위해 글을 썼고, 잘 써야 했고, 계속 써야 했으니 점점 더 잘 쓰게 된 게 아닌가라고. 글은 쓸수록 는다. 술도 마시면 늘 듯이.
처칠의 낭비를 다룬 책이 있는데 제목이 ‘No more Champagne’이라고. 언젠가 번역되길 바라고 있는 이 책에 따르면 처칠이 평생 소비한 샴페인이 무려 4만2000병이었다고 한다. 하루에 2병을 드시니 일 년이면 730병…. 하루에 2병씩 매일 마신다고 했을 때 무려 쉬지 않고 57년을 마실 수 있는 양이다. 또 웬만한 걸 드시지 않았을 테니 한 병에 20만원이라고 치면, 하루에 40만원, 한 달 샴페인 값만 1200만원이다. 샴페인 값만 따진 게 그렇다. 샴페인과 함께 매일 즐겼다는 시가와 브랜디와 스카치는 포함시키지 않은 게 이 정도.
시가를 샴페인에 찍어서 피우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이게 가능할까 싶었고, 그래서 어떻게 마시고 어떻게 피우는지 궁금해서 ‘다키스트 아워’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또 하나 궁금했던 것은, 하루종일 양손에 시가와 술잔이 들려 있는데 글은 어떻게 썼을까 하는 점이었다. 쿠바산 시가를 잘 때 빼고 늘 손에 들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샴페인에 시가를 찍어서 피웠다는 것만큼이나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 어느 정도 궁금증이 풀렸다. 처칠이 한 손에는 시가를, 다른 한 손에는 술잔을 들고서 문장을 웅얼거리면 타이피스트가 열심히 타자기를 두드린다. 욕조에 들어가 역시 한 손에는 시가를, 한 손에는 술잔을 들고 또 웅얼거리면 타이피스트가 문밖에서 귀를 기울이며 타자기를 친다.
이 처칠의 샴페인으로 유명한 게 폴 로저(Pol Roger)다. 그가 즐겨 피웠다는 쿠바산 시가는 로메오 이 훌리에타(Romeo y Julieya)로 알려져 있다. 프랑스에서 영국 공사가 주최한 오찬장에서 1928년산 폴 로저에 반한 처칠은 그 후 대량으로 폴 로저를 구입한다. 영국군이 세계대전에 참전할 때 처칠은 이런 말을 남겼다고. “프랑스를 위해 싸우는 게 아니라 샴페인을 위해 싸우는 것이다.”
샴페인(champagne)이 샹파뉴(Champagne)에서 나기 때문이다. 샴페인이 나는 곳이 프랑스의 샹파뉴 지방이고, 샹파뉴에서 생산되는 스파클링와인에 대해서만 샴페인이라고 부른다. 샴페인은 샹파뉴의 영어식 발음인 것이다. 스파클링와인인 프로세코나 까바도 ‘샴페인’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원칙적으로는 샴페인이 아니라는 말이다. 프로세코나 까바는 샹파뉴에서 생산되지 않으니까. 샹퍄뉴 지방의 중심은 랭스(Reims)로, 스테인드글라스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랭스 대성당이 있는 그곳이다. 폴 로저의 박스에는 랭스와 랭스 부근의 샹파뉴 지역이 그려져 있다.
그렇다. 나는 폴 로저를 한 병 샀다. 글도 좀 쓰시고 술도 좀 드시는 분이 쌓아놓고 먹었던 샴페인이라니 흥미가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작은 와인셀러에 넣어놓고 딸 수 있는 날을 기다리는 중이다. 처칠이 아닌 나는 폴 로저를 아무 때나 마실 수는 없으니까.
박스에는 처칠과 젊은 숙녀가 함께 있는 모습도 그려져 있다. 숙녀는 폴 로저의 상속자로 알고 있는데, 그들은 가끔 만나며 친교를 나누었다고 한다. 1965년 처칠이 죽었을 때 이분께서 1965년산 폴 로저에 애도의 뜻으로 검은 띠를 두르게 하셨다고. 10년 후인 1975년 폴 로저는 처칠을 기리는 새로운 라인을 발표하는데 이름도 ‘서 윈스턴 처칠’이다. 폴 로저를 매일 드셨던 분이 ‘폴 로저 경’이 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