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올림픽에서 인기를 끈 고글 장면을 재현한 쇼트트랙 김아랑. /네이버·대한체육회

“형들은 다 복근 뽐내며 찍었는데 저만 흰 티를 입고 찍어서 아쉬웠어요.” (MBC ‘라디오 스타’에 출연한 쇼트트랙 이준서)

“작가님이 촬영할 때 이것저것 다 물려 보셨어요. 그런데 고글이 제일 낫다고 해서.” (tvN ‘유퀴즈온더블럭’에 출연한 쇼트트랙 김아랑)

역대 어느 올림픽도 이번처럼 선수들 프로필 사진이 화제가 된 적은 없었다. TV에서도, 인터넷에서도 베이징 동계 올림픽에 참가한 선수들의 프로필 사진 얘기가 쏟아진다. 선수들도 흡족해했다. 금메달리스트 황대헌은 왼쪽 어깨에 태극기를 반쯤 걸친 사진을 인스타그램 프로필로 바꿨다. 곽윤기는 목 뒤 오륜기 문신을 드러내고 옆으로 찍은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린 후 촬영한 사진작가를 태그해 ‘금손쓰’라고 적었다. ‘금손쓰’의 주인공은 사진작가 김민재(32)씨. 패럴림픽이 한창인 지난 6일, 서울 광화문에서 그를 만났다.

"누구나 태극기 앞에선 비장해지잖아요." 사진작가 김민재씨는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선수단 프로필 사진을 촬영한 콘셉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국가대표로 올림픽에 나가는 것이 전쟁터 나가는 독립군과 비슷하다고 했다. /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독립군 같은 국가대표

김민재씨는 스포츠마케팅전문 스타트업 세븐헌드레드가 기획하고, 네이버가 제작, 대한체육회가 후원한 올림픽 프로필 사진을 지난 2020 도쿄 하계 올림픽부터 2022 베이징 동계 올림픽, 이번 베이징 패럴럼픽까지 촬영했다. 오는 2024년 강원 동계청소년올림픽 사진까지 맡게 되면서 스포츠 프로필 사진 전문 작가로 주목받고 있다.

-이준서 선수가 복근을 찍지 못했다고 아쉬워하더라.

“쇼트트랙 선수들이 트리코(운동복) 지퍼를 내리는 건 경기 끝나고 쉬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평창올림픽에서 이상화 선수가 경기 끝나고 트리코 지퍼를 내리는 모습에서 영감을 받았다. 먼저 다른 선수들부터 촬영하고 이준서 선수 촬영을 했는데, 지퍼를 내리자 흰 티가 나와 내가 더 당황했다.”

-인터넷에선 ‘준서 선수가 막내라 흰 티’라는 밈(유행)도 돌았다.

“막내인 건 알았지만, 막내라 안 벗긴 것은 아니다(웃음). ‘벗어주세요’ 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은가. 당시 촬영장이 너무 추웠다. 추운데 과하게 부탁하면 안 될 것 같더라. 박장혁 선수도 흰 티를 입고 찍었는데, 당시 박 선수는 컨디션이 안 좋아 최대한 빨리 찍으려고 했다. 도쿄 올림픽 때도 펜싱 선수들이 지퍼를 내리고, 유도 선수들도 몸을 노출했다. 그땐 조용했는데 이번에 화제가 돼 놀랐다.”

-김아랑 선수의 평창 고글 짤(장면)을 재현한 것도 화제였다.

“여자 선수들은 지퍼를 내릴 수 없으니 장갑 등 이것저것 다 물려봤다. 김 선수를 촬영하는데 스태프가 ‘고글!’을 외치더라. 그래서 ‘고글 한번 입에 물어보세요’ 했는데, 역시나 가장 잘 어울렸다. 장갑을 물고 찍은 이유빈 선수는 정말 끼가 많았다. 그 사진은 딱 한 컷 만에 나온 것이다.”

-곽윤기 선수는 어땠나.

“정말 조용했다. MBTI(성격유형검사)가 내향적인 ISTP라더니 조용하면서도 잘 웃고, 촬영장 분위기도 풀어줬다. 곽 선수와 김아랑 선수는 같이 촬영했는데, 곽 선수 촬영할 때 김 선수가 옆에서 옷을 벗겨보자며 분위기를 띄웠다. 최민정 선수는 처음 촬영하러 왔을 때 혼자 트랙 주변을 뛰며 훈련하고 있었다. ‘월드 클래스는 다르구나’ 생각했다. 예민할 것 같아 조심했는데, 촬영장에서는 누구보다 잘 웃었다.”

-스피드스케이팅 김민석 선수의 화려한 고글도 인상적이었다.

“내가 ‘쇼트트랙 선수들이 잘 찍고 갔다. 스피드도 잘 찍어야 한다’고 하자, 김 선수가 ‘질 수 없지’라며 열심히 찍었다. 쓰고 있는 고글이랑 물고 있는 장갑은 박지우 선수 거다. 김 선수를 ‘스트릿 우먼 파이터’의 노제처럼 찍고 싶었다. 백댄서였던 노제가 가수 카이의 히트곡 ‘음’에서 고글을 쓰고 춤추던 모습을 표현했다. 남자 선수들의 고글은 다 진해서 박 선수의 고글을 빌렸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그룹 ‘샤이니’ 태민의 솔로곡 ‘무브’에서 영감을 받았다. 노제와 태민을 합친 모습이 김 선수다. 촬영할 때 옆에서 박지우 선수가 훈수를 많이 뒀다(웃음).”

-태극기를 선수들 한쪽 어깨에 걸치거나, 봉을 들고 휘날리게 한 사진도 화제였다.

“기본적으로 국가대표를 상징하는 것이 태극기라고 생각했다. 몸에 반쯤 걸친 것은 뮤지컬 ‘영웅’에서 영감을 받아 독립군 콘셉트로 찍은 것이다. 비장함, 쓸쓸함, 중압감, 고독감을 나타내고 싶었다. 국가대표로 올림픽에 나가는 것이 전쟁터에 나가는 것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윤봉길 의사 등 독립군들이 거사를 치르기 전 태극기 앞에서 기록을 남기는 느낌으로 촬영했다. 봉에 달린 태극기가 휘날리는 장면은 달에 착륙했을 때 국기를 꽂는 사진을 참고했다.”

-피겨 차준환 선수의 ‘어흥’ 동작은 소녀팬들 마음을 흔들었다.

“넷플릭스 ‘지금 우리 학교는’에서 영감을 받아 촬영했다. 근데 좀비 흉내를 내달라고 할 순 없어서 호랑이 해이니 어흥 동작을 주문했던 거다. 차 선수는 본인보다 피겨라는 종목을 알리고 싶어 했다. 스케이트는 종목별로 날이 다 다르다. 그래서 날이 강조되도록 얼굴 가운데에 오도록 하고, 눈을 감게 했다. 도쿄 때 김연경 선수도 같은 말을 했다. ‘나보다는 올림픽이, 배구라는 종목이 더 강조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것이 국가대표의 마음이구나’ 생각했다.”

-사진이 세련됐다는 평이 많다.

“사실 검은 배경 사진은 10년 전 유행한 것이다. 요즘 트렌드는 흰 빛이 들어오는 조금 더 감성적인 사진이다. 국가대표 프로필은 검은 배경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아 시도했는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하다. 내 직업은 감 떨어지면 끝난다. 그래서 그 감이 안 떨어지게 하려고 노력한다. 유행하는 밈(인터넷 유행)도 찾아보고, 넷플릭스에서 유명한 영화·드라마도 찾아 본다.”


왼쪽부터 '어흥' 하는 모습을 연출한 피겨스케이팅 차준환, 유니폼 안에 흰 티를 입고 찍은 쇼트트랙 막내 이준서. /네이버·대한체육회
왼쪽부터 베이징 동계올림픽 국내 첫 메달을 선사한 스피드스케이팅 김민석, 달에 국기 꽂는 느낌을 표현한 쇼트트랙 황대헌, 목 뒤 오륜기 문신을 강조한 쇼트트랙 곽윤기. /네이버·대한체육회

코로나로 잃은 기회, 코로나로 얻다

-어떻게 올림픽 프로필 사진을 찍게 됐나.

“원래는 패션 사진을 주로 찍었다. 무신사, 한섬 등과 일했다. 그런데 2020년 코로나로 패션계가 직격탄을 맞으면서 일 년에 이직을 네 번 했다. 당일 해고도 당하고, 수습 기간만 채우고 쫓겨나기도 하고, 임금 체불을 견디지 못해 그만두기도 했다. 원래 사진은 경력이 있으면 일거리는 금방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코로나가 터지고 한 3개월은 정말 일이 없었다. 그때 배민라이더(배달)하고, 쿠팡 택배 상하차도 하면서 버텼다. 한번은 신약 실험 아르바이트를 신청하러 입구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내가 내 몸까지 실험하면서 살아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더라. 당시 살던 집 계약이 3개월 남아, 이것만 버티고 고향인 대구로 돌아가자고 결심했다. 그때 스포츠 사진 촬영 작가를 구한다는 공고를 봤다. 올림픽 사진인지는 몰랐다. 스포츠를 좋아하니 스포츠 선수들은 실컷 볼 수 있겠구나 싶어 회사에 지원했다.”

-어떻게 선발됐나.

“간이 스튜디오를 만들어 놓고 촬영하는 방식을 테스트했다. 난 패션 사진 이전에 웨딩 스튜디오에 있었다. 내가 일반인 사진과 패션 사진을 모두 경험해 본 것이 도움 됐다.”

-꿈이 사진작가였나.

“원래 전공은 시각디자인(영남대)이다. 사촌형이 사진 스튜디오 열면서 사진 한번 배워보지 않겠느냐고 해서 시작했다. 스물세 살 때까지 여자에게 말도 못 붙일 정도로 내성적이었는데 사진을 배우면서 바뀌었다. 그러다 2016년 서울로 올라왔다.”

-올림픽 프로필 촬영할 때 가장 힘들었던 점은?

“코로나로 제한이 많았다. 선수촌 들어갈 때마다 PCR 검사를 받았다. 촬영 기간에 진천선수촌 게스트하우스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선수들이 강릉⋅평창 등에서 훈련하는 경우에는 그곳에 가서 부스를 설치하고 촬영했다. 기본적으로 동계는 하계보다 수퍼스타가 적고, 비인기 종목이 많았다. 그래서 내가 모르는 선수라도 사진을 클릭하고 싶은 느낌이 들도록 ‘유튜브 섬네일(축소판)’ 같은 느낌으로 찍었다.”

-앞으로 어떤 사진을 찍고 싶나.

“첫 꿈은 서른 전에 신사역 사거리에 내 사진이 걸리는 것이었다. 그건 면세점 촬영을 하며 이뤘다. 둘째 꿈은 서른다섯 전에 내가 서울에 온 의미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건 올림픽 촬영으로 이룬 것 같다. 셋째 꿈은 시대를 기록하고 싶다. 얼마 전 라이프 사진전을 봤는데 너무 인상적이었다. 이번 일로 화제가 되기 전까지 사진작가라는 일에 대한 걱정이 많았다. 유튜브 시대다 보니 사진보다는 영상에 더 집중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고민도 했다. 그러나 한 편의 영화보다 한 장의 사진이 더 기억되듯, 사진의 장점을 재발견한 것 같다. 모두의 기억에 남는 딱 한 컷을 남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