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종시에 사는 직장인 심모(31)씨는 최근 헬스장 이용권을 연장했다. 지난주에는 테니스 학원도 새로 등록했다. 하루에 한 끼 정도는 샐러드로 식사하고, 매일 종합 비타민과 밀크시슬, 루테인 등 영양제를 챙겨 먹는다. 그가 건강 관리 비용으로 들이는 돈은 한 달에 45만원 정도. 심씨는 “코로나 때문에 갈 데도 없고 돈 쓸 데도 딱히 없어서 나한테 투자하기로 한 것”이라고 말했다.
#2. 경기도 성남에 사는 대학원생 김준석(27)씨는 일주일에 두 차례 필라테스 학원에 다닌다. 최근 부쩍 허리 통증을 느꼈기 때문이다. 레슨 비용이 1회 9만원으로 만만치 않지만, 자신에 대한 투자라고 생각하고 석 달째 등록했다. 주말에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만난 러닝크루 멤버들과 한강변 달리기를 한다. 김씨는 “몇 년 전만 해도 친구들과 (컴퓨터) 게임을 하거나 술을 마시면서 놀았는데, 그런 시간들이 몸에 독이 돼온 걸 뒤늦게 알았다”며 “지금은 운동하고 몸을 만드는 데 재미를 느낀다”고 했다.
MZ세대의 대세 트렌드로 즐겁게 건강을 관리하는 ‘헬시플레저(Healthy Pleasure)’가 부상했다. 과거의 건강 관리가 고통을 감수하며 억지로 해야 하는 일이었다면, 헬시플레저는 재밌고 효율적인 건강 관리를 의미한다. 저칼로리 아이스크림, 곤약 떡볶이, 프로틴 브라우니 등 속세의 맛을 가미한 건강식 섭취, 놀이처럼 즐기는 운동 등이 대표적인 실천 방법이다.
◇‘덤벨 이코노미’ 주도하는 밀레니얼 세대
MZ세대가 많이 이용하는 인스타그램에 ‘헬시플레저’란 해시태그(#)를 단 게시물은 약 3만건. 주로 운동하는 모습, 샐러드나 영양제를 찍은 사진 등이다. ‘헬스타그램’ ‘런스타그램’ ‘샐러드’ 등의 해시태그를 포함한 게시물은 각각 100만건에 육박한다. 한 20대 남성은 인스타에 아침 운동을 하는 자신의 모습과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 즐거움을 알았으면 좋겠다. #오운완’이라고 올렸다. ‘오운완’은 ‘오늘 운동 완료’를 줄인 말. ‘오운완’과 함께 단골로 등장하는 해시태그는 ‘어차피 다이어트할 거면 행복하게 다이어트하자’란 뜻의 ‘어다행다’다. 웨이트트레이닝에 빠졌다는 취업 준비생 최동준(26)씨는 “주변에 헬스장 등록을 안 한 친구가 거의 없다”며 “술 마시고 노는 것보다 몸을 만드는 게 재밌고 성취감도 크다”고 했다. 서울 구로구에서 퍼스널트레이닝 전문 숍을 운영하는 박진규(32)씨는 “회원 70~80%가 2030세대로, 과거엔 체중 감량을 목표로 하는 이가 많았지만 요즘에는 즐기면서 운동하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문화체육관광부에 따르면, 1회 30분 이상, 1주일에 2회 이상 규칙적으로 체육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의 비율은 2021년 20대 53.3%, 30대 48.4%였다. 이는 5년 전인 2016년 20대 46.9%, 30대 46.8%보다 증가한 것이다. 특히 피트니스센터는 2000년 이후 꾸준히 늘어 2020년 전국 1만개소에 육박했다.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는 “밀레니얼 세대를 중심으로 덤벨 이코노미(운동에 관한 소비가 늘고 관련 시장이 호황을 누리는 경제 현상)가 성장하면서 피트니스센터는 계속 성장할 전망”이라고 내다보며, MZ세대의 자기 표현 욕구, 주 52시간 근무제도 시행 등을 주요 배경으로 꼽았다.
샐러드 등 다이어트식은 몇 년 새 ‘사이드 메뉴’에서 ‘메인 메뉴’로 변신했다. 대학생 이지영(23)씨는 이번 학기 들어 ‘샐러드 모임’을 결성했다. 이씨는 “함께 다이어트하자는 취지로 모임을 만들었다”며 “모이지 못할 땐 각자 자신이 먹은 것을 사진으로 찍어 단톡방에 공유한다”고 전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국내 샐러드 시장의 가늠자 역할을 하는 신선편이 과일·채소 시장 규모는 2010년 이후 연평균 20%가량 성장률을 기록, 2020년 1조원을 넘어섰다. 샐러드 구독 서비스 프레시코드는 지난해 8월 정기 회원 20만명을 돌파했는데, 이 중 64.5%가 2030세대다. 영양제 등 건강기능식품 시장도 활황이다. 한국건강기능식품협회에 따르면, 건강기능식품 시장 규모는 지난해 5조원을 넘어섰다. 전체 소비자 중 2030세대는 전년보다 4%포인트 늘어 32%를 차지, 중장년층 위주였던 건강기능식품 시장에서 MZ세대가 ‘큰손’이 돼 가는 추세를 보였다. 대학내일20대연구소에 따르면, MZ세대가 건강을 위해 하는 일은 ‘건강기능식품 섭취’가 31.7%로 1위였고, ‘설탕 및 액상과당 섭취 줄이기(22.6%)’ ‘저칼로리 식품 섭취(20.7%)’가 뒤를 이었다.
◇미국 MZ는 ‘웰니스’, 중국 MZ는 ‘양생’
헬시플레저 바람은 숙면, 정신 건강 분야에도 불고 있다. 직장인 김상연(28)씨는 지난해 불면증에 시달려 침대 매트리스와 베개 등을 싹 바꿨다. 수면에 도움을 준다는 영양제도 3종류나 해외에서 직구하고 있다. 김씨는 “자기 전 유튜브로 ‘수면 유도 음악’ ‘수면 ASMR’ 등을 검색해 듣고, 명상 앱 ‘헤드스페이스’도 종종 사용한다”며 “밤 11시엔 비대면 요가 코칭 프로그램도 수강 중”이라고 했다. 한국 수면산업협회에 따르면, 숙면을 돕는 침구나 의료기기 등 수면 산업 시장 규모는 2019년 3조원을 넘어섰다. 우울감·무기력증 등 정서적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이들도 적지 않다. MZ세대 사이에선 ‘하늘 사진 찍기’ ‘노래 들으며 산책’과 같은 작은 계획을 30개가량 세우고 이를 실천하는 ‘무기력 극복 챌린지’가 유행했고, 온라인 교육 플랫폼에서는 ‘미술치료사와 함께하는 힐링 시간’ ‘일상을 치유하는 습관, 미라클 그림일기’ 등의 수업이 인기를 끌고 있다.
헬시플레저는 세계적인 트렌드다. 미국 MZ세대들의 웰니스(wellness)에 대한 높은 관심, 중국 젊은 층의 양생(養生) 소비 등은 모두 헬시플레저와 결이 비슷한 현상. 일본 닌텐도사가 2019년 출시한 피트니스 게임 ‘링피트’는 지난해 말까지 13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시장조사업체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글로벌 건강관리 시장 규모는 2019년 4조4280억달러(약 5466조원)로 추산됐고, 2025년에는 6조332억달러(약 7447조원)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김난도 서울대 교수 연구팀의 책 ‘트렌드 코리아 2022′는 헬시플레저를 올해의 주요 트렌드 키워드로 꼽았다. 연구진은 건강을 원하면서도 현재의 즐거움을 놓칠 수 없는 MZ세대의 특성이 건강관리 패러다임을 ‘인내와 절제’에서 ‘즐거움과 편리함’으로 변화시켰다고 분석했다. 이은희 인하대 교수는 “자기 자신을 굉장히 소중하게 여기는 ‘미이즘(Meism)’적 특징을 갖고 있는 MZ세대는 단시간에 가시적 효과를 볼 수 있는 몸 가꾸기에 재미를 느끼며 운동·샐러드 사진 등을 매개로 타인과 소통한다”며 “중장년층이나 노년층과 달리 이들은 누군가에게 보여줄 수 있는 건강을 추구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