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H’. 청와대(Blue House)를 가리키는 이 두 글자는 한때 공직 사회를 벌벌 떨게 한 공포의 단어였다. 그런 ‘BH’가 이제 역사의 뒤안길 앞에 섰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청와대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결심을 굳혔기 때문이다. 김은혜 대통령 당선인 대변인은 16일 브리핑에서 “당선인이 기존 청와대로 들어갈 가능성은 제로(0)”라고 단언했다. 당선인 측근들은 “당선인의 의지가 그야말로 엄청나다”고 말했다.
새로운 대통령 집무실로 서울 광화문 정부청사와 용산 국방부 청사 등이 검토됐지만 후자가 더 유력한 상황. 하지만 여전히 경호와 보안 등 풀어야 할 문제가 많다. 과거 대통령들은 집무실을 이전하려다 번번이 마음을 접었다. “광화문 대통령이 되겠다”고 공언했던 문재인 대통령도 2년여 검토 끝에 “현실적으로 이전은 어렵다”며 보류 결정을 내렸다.
윤 당선인도 이런 난점에 대한 보고를 받았지만 뜻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박근혜 정부 시절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낸 김재원 국민의힘 최고위원은 “대통령 보안과 경호는 배설물과 사용한 티슈 처리까지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그만큼 집무실 이전은 현실적 어려움이 많다”며 “그만큼 당선인이 경호와 의전을 일부 포기하면서라도 기존의 청와대 정치를 바꾸겠다는 뜻이 강한 것 같다”고 했다.
공교롭게도 <아무튼, 주말>이 만난 각계 전문가들도 “일단 청와대에서 나오는 게 좋다”고 입을 모았다. 각자 이유는 달랐지만 이들은 “지금 청와대가 가진 문제는 알려진 것보다 심각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풍수? 소통 단절시키는 공간 배치가 문제
청와대 이전 논의가 나올 때마다 거론되는 게 풍수다. 풍수적으로 청와대 터가 흉지(凶地)라 국운이 사납고 역대 대통령들의 말로가 좋지 않다는 주장이 세간에선 기정사실처럼 알려져 있다.
하지만 청와대 흉지설은 정설이 아닌 데다 갑론을박이 많다. 풍수연구가 김두규 우석대 교양학부 교수는 “관점의 차이일 뿐 답은 없다”고 했다. 그는 “청와대 터에 물이 부족하고 바위가 많다는 결함이 있었지만, 현대 토목 기술로 다 해결된 상태”라며 “청와대 터가 흉지라 대통령들이 불행한 말로를 맞았다고 한다면, 청와대 터 덕분에 세계 최빈국인 대한민국이 선진국 반열까지 발전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권력을 남용한 게 문제지 풍수를 탓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건축학자들은 건축학·공간학적으로 문제가 명백한 청와대에 굳이 들어갈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청와대의 권위적이고 화려한 내부 구조가 ‘구중궁궐’ 같다는 지적도 있지만, 무엇보다 대통령과 참모, 대통령과 직원들을 단절시키는 구조적 결함이 가장 큰 문제란다.
일단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청와대 본관과 대통령 관저가 수석비서관과 직원들이 일하는 여민관 건물과 각각 500~600m 떨어져 있다. 비상사태가 벌어져도 대통령이 곧장 참모들과 모이기조차 어렵다. 세월호 사고 당시 김장수 청와대 안보실장이 정리한 관련 보고서를 대통령에게 전하려 보좌진이 자전거를 타고 본관까지 달려간 일화도 있다. 정치권에서도 “그전에도 급한 일로 대통령을 만나려면 자전거나 승용차를 타야 했다”고 할 정도로 악명높다.
◇ ‘구중궁궐’ 청와대와 백악관의 웨스트윙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본관의 구조도 문제다. 참모들이 본관에 머물 사무실도 없고, 대통령 홀로 2층에 있는 넓은 집무실을 쓴다. 참모들이 대통령을 만나려면 부속실을 거쳐야 하는 탓에 부속실에 근무하는 소수 비서관이 ‘실세’ ‘문고리 권력’이 되는 문제가 거듭 지적된다.
미국 백악관 내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웨스트윙(West Wing)’과 비교하면 문제는 더 선명해진다. 대통령 집무실과 부속실만 달랑 놓인 청와대 본관과 달리 웨스트윙 내 대통령 집무실 ‘오벌 오피스(Oval Office)’는 주요 참모들의 사무실과 같은 층에 수평으로 위치한다. 오벌 오피스 중앙에는 대통령과 참모들이 수시로 앉아서 회의하는 테이블과 소파가 놓여 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 시절 참모들이 이 테이블에 발을 올리고 앉아 오바마 대통령과 격 없이 국정을 논의하는 모습이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과거 청와대 본관과 미 백악관 웨스트윙 내부를 비교 분석한 김영욱 세종대 건축학과 교수는 “노태우 대통령 시절 신축된 청와대 본관은 대통령의 권위를 부각하는 데 집중한 나머지 소통과 통합이라는 측면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웨스트윙은 내부 구성원들의 동선과 시선이 대통령 집무실인 오벌 오피스로 향해 있다. 오벌 오피스가 웨스트 윙 내 가장 활발한 소통과 협의가 이뤄지도록 설계됐고, 실제로 그렇다”고 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여민관에 따로 집무실을 만든 적이 있다. 문재인 대통령도 이를 이용했다. 하지만 임시방편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최근 청와대를 답사한 유현준 홍익대 건축학과 교수는 “여민관도 이미 낡은 건물이고 청와대 전체가 1960년대에 머물러 있는 상태”라며 “마스터플랜이나 건축학적 검토 없이 경호 논리에 맞춰 깨작깨작 고친 수준이라 장기적 해결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재원 최고위원은 “1968년 1·21 사태와 전두환 대통령 시절 아웅산 테러 사건 등 북한의 거듭된 국가원수 저격 시도로 대통령·청와대 경호와 보안은 계속해서 강화됐다”며 “그만큼 대통령이 고립될 여지도 커진 것”이라고 했다.
◇제왕적 대통령이 드러낸 ‘청와대 정치’의 취약성
윤 당선인이 청와대 입성을 거부하는 궁극적인 취지는 제왕적 대통령, 즉 독선과 권위주의의 ‘청와대 정치’에서 벗어나겠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문재인 정부도 장관들이 결정권 없는 ‘식물 장관’으로 전락하고 최측근이 모인 청와대 정치만 고집하는 제왕적 대통령의 문제가 고스란히 나타났다는 게 전문가들 지적이다. 박원호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윤 당선인이 청와대를 벗어나겠다는 것 자체가 새로운 정치에 대한 메시지가 될 수 있다”면서도 “청와대 정치를 벗어나는 건 결국 당선인이 어떤 정치를 하느냐에 달린 것”이라고 말했다.
박 교수는 “제왕적 대통령 논란은 사실 청와대 정치의 취약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겉으로는 대통령이 권위와 권력을 앞세워 행정부를 압박하는 형국으로 보이지만, 실질적으론 청와대가 지속성과 현실 가능성을 중시하는 관료와 행정부를 민주적으로 통제하지 못해 억지를 부리는 것에 가깝다는 것이다. 정치 컨설턴트 박동원 폴리컴 대표는 “문재인 정권은 정부가 가진 고유의 지속성과 전문성, 실행 가능성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이념과 지향을 무리하게 관철하려 했다”며 “과거 DJ의 경우 장관과 국무회의를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한 것과 대비되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이런 맥락에서 윤 당선인이 각 부 장관에게 공무원 인사권을 부여하고 실적과 책임을 동시에 요구하는 책임장관제를 공언한 것은 일단 의미가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재묵 한국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인수위부터 당선인이 수석(참모)과 장관 역할에 대한 명확한 교통정리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효율적인 내각 중심의 통치를 위해선 인사 청문회 제도 개선과 청와대와 정부세종청사가 떨어져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필요하다. 박원호 교수는 “과도한 인사 검증 때문에 대통령이 측근을 장관으로 임명하길 꺼리면서 장관을 형식적으로 임명하고 측근이 모인 청와대를 중심으로 통치하려는 경향성이 굳어졌다”며 “책임 장관제가 시행되더라도 장관들이 세종시와 서울을 오가는 현 상황에서는 대통령과 물리적으로 가깝게 소통하며 국정을 논의하는 파트너 역할을 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 “재건축·이전 신축도 검토해야”
윤 당선인이 청와대에 입성하지 않더라도 당장 청와대 전체를 국정에서 배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외국 정상들이 내한하면 이들이 대통령과 회담을 할 곳은 청와대 내 영빈관 외에는 마땅한 곳이 없는 실정이다. 김재원 최고위원은 “경호실과 비서실 인력만 해도 1000명이 넘는다”며 “이들이 당장 옮겨 갈 곳을 마련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장기적으로 청와대 전체를 재건축하거나 이전해서 신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당장 광화문이나 용산으로 이전해도 임시 방책일 뿐 근본적 해결책은 아니라는 것이다. 박동원 대표는 “대통령 집무실이 가지는 국가적 상징성도 감안해야 한다”며 “대통령의 업무 효율과 보안·경호, 대외 소통, 세종청사와 떨어진 문제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국가적 과제로 새 집무실 마련을 정치권이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배준용 주말뉴스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