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사는 음식을 통해 변화를 중개하는 직업입니다.”
마시모 보투라(Bottura·60)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요리사다. 이탈리아 북부 중세 도시 모데나에 있는 그의 레스토랑 ‘오스테리아 프란체스카나’는 미쉐린 가이드로부터 최고 평점인 별 셋을 획득했고, 세계 베스트 레스토랑 50(World’s 50 Best Restaurants) 1위(2016·2018년)와 2위(2015·2017년)에 꾸준히 오르며 ‘장기 집권’하다가 2019년 명예의 전당 격인 ‘베스트 오브 더 베스트’에 헌정됐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보투라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명’(2019년)에 선정했다. 세계 미식계에서 차지하는 그의 위상이나 영향력 때문만은 아니다. 보투라는 요리사가 책임 의식을 가지고 사회와 지구를 위해 행동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는 “요리사의 역할은 그가 창조해낸 레시피들의 총합보다 훨씬 더 크다”고 했다.
2015년 밀라노 세계 엑스포 기간, 보투라는 무료 급식소 ‘레페토리오(Refettorio)’를 열었다. 버려질 식재료를 모아다가 근사한 3코스 정찬을 만들어 노숙자와 외국인 난민 등 사회적 약자들을 대접했다. 보투라의 레페토리오는 “음식쓰레기·지구온난화·기아·소외 등 다양한 문제에 대한 참신한 해법”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는 아내와 함께 ‘푸드 포 솔(Food for Soul)’ 재단을 설립했고, 런던·파리·리우데자네이루·샌프란시스코 등 세계 각국 빈곤·소외계층 지역에 레페토리오를 계속해서 세우고 있다.
음식을 통해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보투라는 정식으로 요리학교에서 배우지 않았다. 변호사가 되려고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던 23세 때 고향인 모데나의 외곽 시골 식당 경영을 우연히 맡게 되었다가 요리에 빠졌다. 처음엔 전통적인 이탈리아 음식을 내다가 “전통은 박제해놓으면 썩는다”는 생각에 ‘진화하는 전통(tradition in evolution)’을 내세우며 파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현지인들은 “이건 이탈리아 음식이 아니다”라며 외면했고 6년간 손님도 뚝 끊겼지만, 혁신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는 28일 ‘구찌 오스테리아 서울’ 오픈을 앞두고 있는 보투라를 화상으로 인터뷰했다. 그는 2018년부터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구찌와 함께 ‘구찌 오스테리아’를 구찌 본사가 있는 피렌체, 미국 베벌리힐스, 일본 도쿄에 열어왔다. 보투라는 “2009·2015년 방한했을 때 알게 된 한식의 발효·숙성 기법을 오스테리아 프란체스카나에서 활용하고 있다”며 “이탈리아의 맛과 한국의 식재료를 결합한 새로운 메뉴를 기대해달라”고 했다.
◇우연히 접어든 요리사의 길
보투라는 모데나의 부유한 사업가 집안 5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할머니와 우리 가족, 삼촌 셋이 함께 사는 대가족이었다”고 했다. “어떤 이탈리아 가정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주방은 우리 집에서 제일 중요한 공간이었다. 어릴 적 나는 주방에서 할머니와 어머니 곁에 붙어 지냈다. 토르텔리니(이탈리아식 만두) 만드는 법, 식재료 맛보는 법, 여러 다른 재료들을 매칭하는 법 등 요리의 기본을 식탁 밑에서 배웠다”고 했다.
-요리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건 그때부터인가.
“14세 때 어머니가 ‘형들을 따라 프랑스 파리에 다녀오렴. 너는 먹고 요리하는 걸 좋아하잖니’라고 했다. 거기서 생애 첫 생굴 등 다양한 음식을 맛봤다. 너무나 놀라운 경험이었다. 그때 요리사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던 것 같다.”
-요리학교 대신 법대로 진학하지 않았나.
“아버지 뜻이었다. 아버지는 집안에 변호사가 하나쯤 있기를 바라셨다.”
-그런데 돌연 모데나 외곽 허름한 식당을 맡았다.
“1986년 5월 한 토요일, 자동차 딜러를 하던 형 파올로가 나를 ‘트라토리아(trattoria·지방 토속 음식을 내는 소규모 식당) 델 캄파초’라는 식당으로 데려갔다. ‘이 식당 주인이 우리 동네 최고의 정비사인데, 이걸 운영하느라 정비사를 안 하겠단다. 그를 고용하려면 여기를 인수하는 방법밖에 없어. 내가 인수할 테니까 네가 식당 운영을 맡아줘’라고 부탁했다.”
-아버지가 반대하진 않았나.
“물론 반대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내 편을 들어주셨다.”
-운영만 맡기로 했는데 주방에 요리사로 들어갔다.
“30년 경력의 요리사 리디아 크리스토니가 ‘길 건너편에 사는데 식당 주인이 바뀌었다길래 요리사가 필요한가 싶어서 왔다’고 했다. 그는 최고의 향토 음식 요리사였다. 그해 크리스마스가 되자 식당은 손님으로 넘쳐났다. 나는 거기 만족하지 못했고, 차츰 ‘음식을 업그레이드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려면 내가 요리를 제대로 배워서 주방에 들어가 직접 요리해야 했다. 옆 마을에 미쉐린 2스타 레스토랑을 총괄하다 은퇴하고 작은 식당을 운영하는 프랑스인 요리사 조르주 코니가 있었다. 그에게 ‘(서양 요리의 기본인) 프랑스 요리를 가르쳐달라’고 부탁했다. 식당이 문 닫는 매주 월요일과 화요일 코니를 찾아가 정통 프랑스 요리법을 배웠다.”
◇현대미술이 영감의 원천
보투라는 잘되던 식당을 1993년 접었다. 그리고 미국 뉴욕으로 무작정 떠났다.
“1992년 12월 창문 밖 짙게 낀 물안개를 바라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 자신을 발견하는 자유를 주었던 식당이 이제 나의 감옥이 되었구나.’ 그리고 ‘뉴욕에 가면 뭔가 되겠지’라는 마음이었다. 파인다이닝(고급) 레스토랑에 취업해 요리를 배우고 싶었지만, 소호에 있는 이탈리아식 카페에 들어갔다. 출근 첫날 지금의 아내 라라 길모어를 만났다. 더없이 행복한 9개월을 뉴욕에서 보냈지만, 고향에 남겨놓은 골칫거리(식당)를 처리하러 돌아가야 했다.”
-고향 모데나로 돌아오자, 운명처럼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왔다던데.
“발사믹식초 납품업자가 전화를 걸어왔다. ‘내일 식당 문 여나? 점심 때 알랭 뒤카스(Ducasse)를 모시고 가려고.’ 뒤카스가 온다니! 기뻐서 소리 질렀다. 뒤카스는 식사에 매우 흡족해했고, 몬테카를로에 있는 그의 레스토랑 ‘호텔 드 파리’에서 인턴으로 일할 기회를 주었다. 거기서 미쉐린 3스타 레스토랑 주방의 엄격하고 정밀한 조리 과정을 체험했다. 요리 노트를 써가며 열심히 배웠다.”
뒤카스는 ‘미식계 황제’로 불린다. 그가 세계 곳곳에 소유한 식당에서 받은 미쉐린 별은 모두 21개로, 한때 ‘미쉐린 스타 최다 보유자’이기도 했다.
-몬테카를로에 남을 수 있었는데 모데나로 돌아온 이유는.
“나의 식당을 열고 싶었고, 뉴욕을 떠나 모데나로 온 아내와 관계도 지키고 싶었다. 마침 부동산 중개인에게 전화가 왔다. 모데나 시내에 ‘오스테리아 프란체스카나’라는 오래된 식당이 매물로 나왔다는 전화였다. 작별 인사를 하러 뒤카스를 찾아갔다. 그가 ‘요리 노트를 보여달라’고 했다. 노트를 훑어본 뒤카스가 ‘이제 당신에게 이런 건 필요없다. 스스로 설 때가 왔다’며 노트를 돌려주지 않았다.”
-식당의 모토가 왜 ‘진화하는 전통’인가.
“전통을 유리 진열장에 박제하면 썩는다. 과거를 돌아보되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전통과 진화는 모순된 것 같지만, 동일한 사물의 양면이다.”
-이탈리아 음식을 진화시키는 힌트를 현대 미술에서 얻는다던데.
“25년 전 한 아트딜러가 들려준 이야기가 나의 시각을 바꿔놓았다. 이야기는 이렇다. 한 유명 미술 컬렉터가 지노 데 도미니치스(Gino De Dominicis)에게 초상화를 의뢰했다. 데 도미니치스는 컬렉터를 한참 앉혀놓기만 했다. 컬렉터가 슬슬 짜증 나려 할 때쯤, 데 도미니치스가 붓을 집어 들더니 캔버스 한복판에 빨간 점 하나를 쿡 찍었다. 그러고는 ‘초상화가 완성됐다’고 말했다. 컬렉터가 당황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데 도미니치스는 ‘10km 밖에서 본 당신의 초상화’라고 했다. 나의 음식은 ‘10km 밖에서 본 이탈리아 음식’이랄 수 있다. 전통을 존중하되 비판적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이 초상화를 식당에 걸고 싶은데 컬렉터가 팔 생각이 없어 아쉽다(웃음).”
-이탈리아에서 음식은 건드릴 수 없는 성역(聖域) 아닌가.
“그래서 엄청 고생했다. 손님들은 물론 음식 평론가들이 ‘이게 무슨 이탈리아 음식이냐’고 욕했다. 파르미자노(파르메산) 치즈를 다섯 가지 다른 식감으로 맛볼 수 있도록 개발한 요리는 파르미자노 치즈 생산자 협회에서 ‘우리의 이미지를 망치고 있으니 제발 메뉴에서 빼달라’고 항의하기도 했다. 식당 오픈하고 6년 동안 매일 텅 비다시피 했다. 식당을 유지하려 아끼던 자동차도, 오토바이도 팔아야 했다. 하지만 나는 내 생각이 옳다고 믿었다.”
흔히 ‘파르메산 치즈’라고 부르는 파르미자노는 이탈리아 대표 음식 중 하나로, 감칠맛과 짠맛이 강한 치즈. 대개는 얇게 썰어 그대로 먹거나 갈아서 파스타나 피자에 뿌려 먹는다. 보투라는 첨단 요리법을 동원해 파르미자노를 부드럽게 부풀린 ‘수플레’, 입안에서 가볍게 터지며 향만 남기는 ‘폼’(foam·거품), 바삭한 과자의 일종인 ‘웨이퍼’, 촉촉한 액체 상태의 ‘소스’, 솜사탕처럼 뽑아내 입에 넣으면 공기처럼 사라지는 ‘에어’(air) 등 5가지 질감으로 즐길 수 있는 요리를 개발했다. 파르미자노 치즈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요리였지만, 받아들여지기엔 너무 일렀던 것이다.
-그러다 2001년 드디어 인정받았다.
“존경받는 이탈리아 언론인 엔초 비자리가 식당에 왔다. 고속도로가 막히자 ‘점심이나 먹자’며 모데나로 빠져 나왔다가 우연히 들렀다. 일주일 뒤 그가 주간지 ‘에스프레소’에 ‘오스테리아 프란체스카나를 더 일찍 찾지 않아 미안하다’며 ‘완벽한 탈리아텔레(칼국수처럼 생긴 파스타) 알 라구’를 맛봤다’는 기사를 썼다. 우리는 삽시간 유명해졌고, 6개월 뒤 미쉐린 1스타를 받았다. 아, 나의 파르미자노 요리는 현재 파르미자노 치즈 생산자 협회 홈페이지 메인 화면을 장식하고 있다(웃음).”
◇남아도는 음식물과 싸워라!
보투라는 음식은 세상에 변화를 가져오는 매개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요리사들은 우리의 창의력을 이용해 사회 이슈에 대한 행동을 촉구할 수 있다”고 했다.
-레페토리오는 음식쓰레기·지구온난화·기아·소외 등에 대해 새로운 해법을 제시했다고 평가받는다.
“2015년 밀라노 세계 엑스포 주제는 ‘지구 식량 공급(Feeding the Planet)’이었다. 엑스포 조직위가 나를 홍보대사로 임명했고, 내가 레페토리오라는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식량 공급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선 남아도는 음식물과 싸워야 한다. 엑스포에서 사용하고 남은 자투리 식재료와 유통기한이 하루도 남지 않은 음식이 트럭에 실려 오면, 매일 저녁 80인분짜리 3코스 요리로 만들어 사회적 약자에게 제공하자고 했다.”
밀라노 북동쪽 노동계급 주거 지역인 그레코의 버려진 극장을 개조한 ‘레페토리오 암브로시아노’는 엑스포 기간 어떤 파빌리온보다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스페인 ‘엘불리’의 페란 아드리아, 덴마크 ‘노마’의 르네 레드제피, 프랑스의 알랭 뒤카스, 미국 ‘일레븐 메디슨 파크’의 대니얼 흄 등 보투라와 뜻을 함께하는 세계적 요리사들이 돌아가며 주방을 맡았다.
레페토리오는 가톨릭 수도사들의 공동 식당을 뜻하기도 한다. 노숙자, 외국인 난민 등 사회적 약자 80명이 수도사들처럼 기다란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나눴다. 재사회화 상담, 아트 워크숍, 영화 상영관 운영 등도 함께 진행했다.
밀라노에서의 대성공으로 보투라는 확신을 얻었고, 이듬해 아내와 함께 ‘푸드 포 솔’을 설립했다. 세계 각국 요리사와 자선단체, 기업들이 동참했다. 요리사들은 재능을 기부했고, 자선단체들이 레페토리오 운영을 맡았다. 수퍼마켓 등 유통체인들은 유통기한이 끝나기 직전의 음식을 모아 보냈다. 화가들은 벽화를 그렸고, 디자이너들은 인테리어를 공짜로 해줬다. 세계적 조명업체 아르테미데와 가구업체 비트라는 조명과 의자를 보냈다.
레페토리오 파리를 열면서 보투라는 알베르 카뮈를 인용했다. “아름다움은 혁명을 만들지 못하지만, 혁명은 반드시 아름다움을 필요로 하는 날을 맞는다. 나는 그날이 바로 오늘이라 믿는다.” 푸드 포 솔을 통해 레페토리오를 파리, 런던, 뉴욕, 샌프란시스코, 시드니, 제네바, 리마 등에 열었다. 보투라는 “지난해 전 세계 레페토리오를 통해 115만 명을 먹였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일반 무료 급식소가 식판을 들고 줄지어 음식을 받는 반면, 레페토리오에서는 레스토랑급 요리가 애피타이저·메인·디저트 3코스로 순차적으로 서빙된다.
“레페토리오가 자선 활동이 아닌 문화 프로젝트이기 때문이다. 문화는 지식을, 지식은 자각을 가져온다. 자각할 때 우리는 사회적 책임에 한 걸음 가까워진다.”
-고급 레스토랑과 같은 음식을 같은 방식으로 서비스받은 ‘손님’들의 반응이 어떤가(보투라는 급식소에서 식사하는 이들을 손님(customer)이라 부른다).
“‘손님’들이 처음에는 우리를 수상쩍어했다. 눈도 맞추지 않고 식사만 후딱 하고 나갔다. 한 달 뒤부터 ‘손님’들이 ‘수프 말고 파스타를 달라’는 등 불평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우리가 ‘손님’들에게 받아들여졌음을 알았다(웃음).”
◇구찌와 보투라의 만남
2018년 피렌체에 문을 연 ‘구찌 오스테리아’는 패션과 미식에서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두 이름의 만남으로 화제를 모았다. 구찌와 보투라는 피렌체를 시작으로 베벌리힐스(2020년)와 도쿄(2021년)에 이어 오는 28일 서울 이태원 ‘구찌 가옥’ 6층에 ‘구찌 오스테리아 서울’을 연다.
-구찌와 협업하게 된 계기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구찌 최고경영자인 마르코 비자리(Bizzari)와 뭔가 해보고 싶었다. 비자리와 나는 고등학교 첫날부터 책상을 함께 썼다. 졸업 후 각자의 커리어를 쌓아 오다가 이번 프로젝트로 다시 만났다. 구찌와 오스테리아 프란체스카나는 이탈리아의 아름다움을 대표한다. 그러니 둘의 만남은 매우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구찌를 비롯해 전 세계 레스토랑을 어떻게 관리하나.
“와츠앱(WhatsApp) 메신저를 통해 총괄한다.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마실 때쯤 도쿄 총괄셰프를 시작으로 서울, 피렌체, 베벌리힐스에서 메시지와 사진, 영상을 보내온다. 각 업장을 맡은 요리사가 제안한 아이디어를 동의하거나 수정한다. 아이디어를 나누는 걸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구찌 오스테리아 서울은 어떤 음식을 내게 될까.
“다른 세 곳과 전혀 다를 것이다. 첫째, 각 업장이 있는 도시와 국가의 환경과 음식이 다르다. 둘째, 나는 각 업장 요리사에게 자신을 표현할 자유를 준다. 무얼 해도 상관 없지만, 38년 동안 내가 창조해온 것들에 대한 존중은 필요하다.”
오는 28일 문 여는 ‘구찌 오스테리아 서울’ 총괄셰프 전형규와 헤드셰프 다비데 카르델리니는 “이탈리아 풍미와 한국 식재료를 구찌다운 화려함으로 조합해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음식을 선보이겠다”고 했다.
카르델리니 셰프는 “빵이 아닌 한국식 전 위에 이탈리아 재료를 올려 피자처럼 보이지만 전혀 다른 맛을 내는 요리가 대표적”이라고 했다. 전형규 셰프는 “파르미자노 치즈 소스에 버무린 토르텔리니처럼 보투라의 대표 메뉴는 모데나에서와 똑같은 맛으로 경험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두 셰프는 “한국과 이탈리아 음식문화는 세대를 통해 오래도록 전승됐다는 점, 소박하고 단순하지만 맛있다는 점, 여럿이 둘러앉아 나눠 먹기를 즐긴다는 점에서 같다”고도 했다.
-요리사로서 이룰 수 있는 건 다 이룬 듯하다. 아직 남은 목표가 있나.
“레페토리오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 지역인 요르단강 서안 지구에 있는) 베들레헴에 열고 싶다. 종교와 상관없이 모두 함께 긴 식탁에 앉아 한 끼 식사를 나눌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