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06세 최고령 현역 화가’의 별세를 알리는 기사가 일제히 언론에 보도됐다. 그 주인공은 김병기(1916~2022), 1916년에 태어난 화가이다. 이 해는 유독 천재 화가들이 많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롱 드 경성’ 연재에 등장했던 이중섭, 유영국, 변월룡, 최재덕이 모두 1916년생이다. 이런 쟁쟁한 이름들이 살아있던 같은 시대 인물이, 최근까지도 ‘현역 화가’로 작업에 몰두했다니…. 그저 존재만으로 대단해 보인다. 그 파란만장한 시대를 관통하며, 그치지 않는 열정으로 작업을 지속해온 예술가의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김찬영, 자유로운 영혼
김병기를 이야기하기 전에, 그의 부친 김찬영(1893~1960)을 먼저 소개할 필요가 있다. 김병기 예술 인생의 출발점이 그의 부친이기 때문이다. 유방(惟邦) 김찬영은 1893년 평양에서 최고 갑부의 아들로 태어나, 중학생 때 이미 도쿄 메이지학원에서 ‘조기 유학’을 했다. 일찍 신문물에 눈떠서 1912년 도쿄미술학교에 입학, 조선에서 세 번째로 서양화를 전공했다. 귀국 후 1920년대 신문, 잡지에 유럽의 후기 인상주의, 표현주의, 큐비즘, 미래파 연극 등을 소개했다. ‘최초’의 기록들이다.
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던 그는,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퇴폐주의 문학 잡지 ‘폐허’와 ‘창조’ 동인으로 활동했다. 같은 평양 출신의 소설가 김동인(‘감자’, ‘배따라기’의 저자)과는 절친으로, 둘은 함께 희대의 ‘한량’으로 소문났다. 일본에 새 넥타이가 나왔다는 신문 광고를 보고, 같이 도쿄에 쇼핑하러 갔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였으니까.
이들의 ‘유흥’ 문화는 나름대로 철학적 기반을 두고 있었다. 이들이 인식한 세계는 동시대 유럽 지식인이 느꼈던 것처럼,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인간은 저 밑바닥에서부터 절망과 우울, 허무의 정조를 지닐 수밖에 없다. 신은 죽었고, 인간은 의지할 데 없는데, 과거의 온갖 확고부동한 사상과 질서가 다 무슨 소용인가. 모두 의심의 대상일 뿐이다. 지금껏 사회가 인간에게 부과해온 관습과 규범의 덫에서 빠져나와, 오로지 자유! 자유! 진정한 자유를 인간은 추구해야 한다!
◇아버지를 사랑할 수도 미워할 수도 없었던 아들
제3자가 보면 그저 멋있고 댄디한 김찬영이었지만, 이런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이의 아들로 태어난다는 건 어떤 것일까? 김병기가 바로 그 일을 경험해야 할 운명을 타고났다. 김병기는 1916년 김찬영이 아직 도쿄 유학생일 때 평양에서 태어났다. 김찬영이 방학 때 잠시 집에 왔다가 가족의 성화에 못 이겨 잉태된 아기가 자신이라고, 김병기는 말하곤 했다.
이후 김찬영은 조혼 풍습에 따라 맺어진 본처(김병기의 친모)와는 결연한 채 평양을 떠나, 당대 최고 미인으로 이름난 여인과 경성에서 주로 생활했다. 김병기는 평양 대부호의 손자로 태어났지만, 머슴방에서 자랐다고 회고한 바 있다. 그는 스스로 ‘우발적으로’ 태어난 존재라고 생각했으며, 어디에서도 정착할 수 없는 ‘떠돌이’ 운명을 처음부터 타고났다고 말했다.
그러나 성장한 김병기가 도쿄에 미술 공부를 하러 가겠다며 부친을 찾아갔을 때, 김찬영은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김병기가 원한다면, 도쿄를 거쳐 파리로 유학 가도 좋다는 허락까지 받았다고. 이 시대 미술 유학생 중에 부친으로부터 이런 전폭 지지를 받은 이는 없었다. 사실 김찬영이야말로 김병기의 예술적 열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선각자였다.
김병기는 자신의 아버지를 사랑해야 할지 미워해야 할지, 평생 판단을 유보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증오심, 반항심이 있었다. 그것이 내 예술의 출발점이었다.” 이 말은 김병기의 매우 솔직한 고백이다. 그는 ‘모순’을 안고 태어났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예술의 출발점을 삼았다.
◇현대미술의 ‘모호한’ 매력
도쿄로 간 김병기는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라는 근사한 이름의 간판에 이끌려, 처음부터 당대 가장 전위적인 예술가 집단에 합류했다. 김찬영이 그랬던 것처럼, 김병기 또한 동시대 세계적으로 가장 앞선 미술 경향에 관심을 가진 것이다. 1930년대 도쿄에서 김병기가 제작한 작품 중에는, 캔버스를 뚫고 쇠줄이 튀어나와 사람 형태로 매달린 오브제 작품도 있었다고 하니,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최신 미술 경향에 발 들여놓은 김병기가 즉시 거기에 매료될 수 있었던 원인은, 현대미술 자체가 ‘모순’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김병기 자신처럼 말이다. 현대미술은 결코 확정된 답이나 고정된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파이프를 그려놓고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쓴 마그리트의 작품을 생각해보라. 대체 이게 파이프라는 것인가, 아니라는 것인가. 우리는 그것을 단순히 1차원적인 답변으로는 말할 수 없다.
마치 김병기가 김찬영을 사랑할지 미워할지 결정할 수 없는 것처럼, 주변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질문에 대해 우리는 쉽게 정답을 말할 수 없다. 아니, 정답이 없다! 태양을 그릴 때, 과연 어떻게 그리는 것이 참인가? 서양의 실증주의가 결국 20세기에 이르러 다다른 결론은, “A가 그린 태양과 B가 그린 태양은 다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김병기).”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1956년 김병기의 작품 ‘가로수’를 보자. 6·25전쟁이 끝나고 폐허가 된 서울 시가지에 가로수만 덩그러니 서 있는 모습을 그렸다고 작가는 말한다. 원래 북한산은 남성적인 산이라고 생각해왔는데, 그날 따라 그 산이 여성적으로 보였단다. “마치 피에타처럼” 북한산이 폐허의 시가지를 안고 있는 비참한 광경을 그린 것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그러나 우리는 작가의 말을 듣고서도 그 진의가 잘 이해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폐허의 풍경은 작가의 ‘주관적’ 시선이기 때문이다. 관객은 이 그림을 ‘상대적으로’ 다르게 보고 해석할 수도 있고, 또 그렇게 해석해도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이 작품의 감상 포인트이다.
◇아름다우면서 처절한 ‘글라디올러스’
해방 후 김병기와 김찬영의 관계는 역전됐다. 부친 김찬영의 비참한 말로를 김병기가 돌봐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김찬영과 함께 산 여인은 장안에서 가장 큰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소문나면서 권총 강도에 의해 살해되었다. 국보급 문화재를 소유하던 골동품 컬렉터 김찬영은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되었고, 6·25전쟁 중 눈앞에서 그 많은 유물이 불타 없어지는 장면을 목격해야 했다.
김병기는 같은 시기 서울에서 온갖 미술계 감투를 쓰며 평론가로 맹위를 떨쳤다. 그 시대 김병기만큼 철저한 이론가는 없었기 때문에, 서울대에 출강하며 다음 세대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현대미술의 눈을 열어주었다. 단색화의 대가 정상화가 그의 제자이다. 그러나 1965년 김병기는 돌연 모든 직책을 내던지고 미국으로 떠났다. 이 해 상파울로 비엔날레 커미셔너로 참가했다가 뉴욕에 망명하듯 정착한 것이다. 김환기가 딱 2년 전 했던 ‘수법’을 김병기에게 그대로 전수해줬다. “록펠러 재단의 누구를 찾아가 만나자마자 와락 반갑게 포옹해라!” 록펠러재단은 두 화가에게 같은 방법으로 체류 허가를 주선해줬다.
홍익대 학장까지 하던 김환기가 넥타이 공장에서 아르바이트하며 뉴욕 생활을 시작한 것처럼, 한국미협 이사장까지 하던 김병기도 생계를 위해 제도사로 일하며 동맥해부학을 그렸다. 완전히 ‘제로’에서 다시 시작한 삶이었다. 잠시 고국 땅을 밟은 적도 있지만, 김병기는 새러토가 스프링스, 뉴욕, LA를 전전하며 거의 반세기를 미국에서 보냈다.
그렇게 ‘떠돌이’ 생활을 하던 김병기는 2014년에야 다시 한국에 돌아와 이렇게 말했다. “나는 49년을 동양에서, 49년을 서양에서 살았다. 동양에 있을 때는 서양을 연구하고, 서양에 있을 때는 다시 동양을 생각했다.” 실제로 김병기는 일본과 한국에서 추상의 단계를 극단적으로 밟아갔지만, 미국에서는 다시 구상을 돌아봤다.
왜 그런 판단을 할 수밖에 없었을까? 그는 어느 한쪽이든 확고부동하고 고정불변한 정통 관념을 극도로 경계했기 때문이다. 동양적인 것과 서양적인 것, 감성과 이성, 구상과 추상, 아름다움과 추함 등등. 이런 종류의 단순한 이분법적 구분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기! 그것도 ‘적극적으로’ 속하지 않기! 그것이 그가 추구한 예술의 세계이자, 그가 선택한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그로 인해, 그의 작품은 언제나 어떤 ‘경계’ 위에서 외줄 타기를 하듯 아슬아슬한 긴장 상태에 놓여 있다. 김병기의 ‘글라디올러스’는 보기에 따라 아름답기도 하고 처절하기도 한데, 바로 그 ‘아름다움’과 ‘처절함’의 경계 지점에서 화가가 붓을 놓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김병기가 ‘결정장애’를 가진 우유부단한 인물이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철저히 그 반대이다. 그는 어떤 점에서 현대미술의 ‘맹신자’였다. ‘이 세상에 절대적 진리란 없다’는 것이 유일한 절대적 진리라고 믿는 사람이었다. 이 모순된 문장을 사랑했던 사람이다. 김병기는 온갖 모순과 불확실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진정한 용기와 관용을 지닌 사람이었다. 바로 그런 용기가 예술가의 멈추지 않는 도전을 가능케 한 힘이다.
김병기는 잭슨 폴록의 말을 인용하기 좋아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기 전에 나는 내가 무슨 그림을 그릴지 알지 못한다.” 우리도 우리의 인생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지 않나. 다만, 그런 불확실성을 안고서도, 하루하루 용기를 내어 도전할 뿐! 그것이 인생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