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울진 두천천 부근 호월3리 마을회관 뒷산은 새까맣게 타 있었다. 산 아래 옹기종기 자리 잡은 집 주변마다 불길이 남기고 간 검은 생채기에 탄식이 나오던 찰나, 하얗게 꽃봉오리를 터뜨린 매화가 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화마에 빼앗긴 산과 들에도 시나브로 봄은 오고 있었다.
지난 3월 장장 열흘간 이어진 울진·삼척 산불의 시작이자 끝이었던 울진의 안부가 궁금했다. 이심전심 마음의 풍향계가 그곳으로 향한 걸까. 울진, 그중에서도 산불 피해가 컸던 북면과 울진읍·죽변면 일대는 올봄 때 아닌 ‘돈쭐 여행’을 핑계 삼은 이들이 하나둘 발걸음 하고 있다. 돈쭐이란, 다른 이들에게 본보기가 된 가게를 찾아가 매상을 올려주며 ‘돈으로 혼쭐을 내준다’는 뜻. 산불 사고 당시 선행을 베풀어 더 유명해진 ‘착한 가게’들을 찾아 여행을 떠났다. 온정과 미담이 착착 쌓이고 있었다.
◇‘돈쭐 여행’의 시작
“방문 식사 주문은 직원이 받아서 (돈쭐을 맞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배달 주문이나 여기저기에서 전화 주시는 분들이 많이 늘었습니다(웃음).” 울진·삼척 산불 당시 소방관과 진화대원들에게 무상으로 음식을 제공해 화제가 됐던 울진읍 중식당 청목 신신짬뽕 본점의 주인은 쉴 새 없이 울리는 전화에 화답하느라 분주했다. 전화벨이 잠시 멎으면 다시 주방으로 뛰어들어가 음식 만들기에 열중했다. 오전 11시에 문을 열어 오후 7시까지, 운영 시간 내내(오후 2~5시 휴식) 식당은 만석이었다. 개점 30분 전부터 줄 서는 건 기본. 오후 느지막하게 방문했다가 자리가 없어 나가는 이들도 보였다.
식사하러 온 이곳 단골들은 이구동성 “이 집은 ‘돈쭐 내줄 맛집’이라고 알려지기 한참 전부터 울진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맛집이었다”며 “차돌짬뽕 외 탕수육과 멘보샤도 맛있다”고 귀띔했다. ‘돈쭐’ 행렬도 이어졌다. 경기도 분당에서 온 강희평(58)씨는 “평소 짬뽕을 좋아해서 울진 여행할 때 방문하려고 맛집 리스트에 올려두었던 식당인데, 지난 산불 때 선행을 베푼 곳이라고 뉴스에 나오기에 가족들과 일부러 울진 여행을 계획했다”고 했다. 강씨는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지난달 울진 산불 피해 현장에 방문했다가 이곳에 들러 먹었던 차돌짬뽕과 순두부짬뽕 등을 맛봤다. “주문했던 메뉴뿐 아니라 밥과 숭늉, 반찬을 셀프로 가져다 먹을 수 있어서 푸짐하고도 마음 따뜻한 만찬을 즐겼다”며 흡족해했다.
◇산불 꺼진 뒤 핀 미담 꽃
청목 신신짬뽕의 선행이 알려지면서 산불 피해 지역이었던 북면과 울진읍, 죽변면 상인들 사이에선 ‘착한 가게’ 동참 릴레이가 펼쳐졌다. 청목 신신짬뽕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울진읍 카페 아울정과 죽변항 부근에 있는 르 카페 말리는 산불 진압에 투입된 소방대원들과 군인 장병에게 무료 음료와 빵을 제공했다. 한우 정육 식당인 죽변면 한우백화점에선 빵과 김밥으로만 끼니를 때우던 이재민들을 위해 식당 메뉴에도 없던 곰탕을 끓여 날랐다. 일부 상인들은 생업을 뒤로하고 직접 피해 복구에 참여하기도 했다. 소문은 금세 퍼졌고, 미담은 또 다른 미담으로 이어지는 중. ‘아울정’ 주인 제아름(37)씨는 “음료 등 무료 제공 소식이 알려지면서 멀리서 찾아와 홍삼 영양제를 선물로 주고 간 손님도 있었다”며 “산불이 계속되던 당시 주민들이 거의 공황 상태였지만, 많은 분의 따뜻한 관심이 위로가 돼 차츰 일상을 회복해가고 있다”고 했다. 착한 가게들에 대해 관심이 쏠리자 울진군에서는 현황 파악을 위한 리스트까지 작성했다. 울진군 관계자는 “익명으로 동참한 가게들도 많아 정확한 파악이 쉽지 않다”면서 “식사, 음료뿐 아니라 산불 진압 대원들에게 쉼터, 무료 세탁 서비스를 제공하는 등 재난 극복에 동참하는 방법도 다양했다”고 전했다.
◇화마에 지켜낸 향나무·소나무
두천리에서 발화한 불꽃이 울진 곳곳을 위협하는 동안 문화재에도 비상이 걸렸다. 북면 나곡해변 쪽으로 북진하던 산불이 3월 5일 방향을 바꿔 죽변면 화성리를 덮치기 시작했다. 죽변면 화성리는 보호수이자 천연기념물인 울진 화성리 향나무와 1936년 세워진 한옥형 개신교회인 등록문화재 용장교회가 있는 곳. 소방대원들을 사전에 배치해 보호 작전에 총력을 기울인 덕분에 높이 14m, 둘레만 4.5m에 이르는 510여 년 수령의 거대한 향나무는 온전히 위용을 지키며 마을을 굽어 살피고 있었다. 향나무 뒤편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가면 산불이 훑고 간 잔해가 아직 남아 있다. 향긋한 봄바람이 불어 탄내를 어서 뒤덮어주길 기도했다.
불길이 번질까 가슴 졸였던 금강송면 금강송 군락지도 안도의 한숨을 뿜어내는 중이다. 한때 불씨가 소광리 일대의 금강송 군락지 인근까지 날아들었지만, 산림청 소속 특수 진화대까지 투입된 결과 무사 보전할 수 있었다. 보호림으로 조성된 두천리와 소광리 일대의 금강소나무숲길 탐방로는 매년 12~4월 입산 통제 기간이라 당장 탐방은 어렵다. 대신 굽이굽이 이어지는 ‘십이령길’ 부근에 있는 금강송테마전시관에서 금강송을 만나볼 수 있다. 2019년 개관한 전시관엔 소나무를 소재로 한 추사의 ‘세한도’ 이야기, 숙종 시대 바위에 새긴 황장봉산의 경계 표석 유래 등을 전시물로 만날 수 있다. 실제 표석은 소광리 대광천 부근에 있다. 영상실에선 금강소나무숲길의 사계를 실감 영상으로 감상한다. 입산 통제 기간에 속해 볼 수 없었던 금강소나무숲길의 겨울 풍경과 그곳에 서식하는 동식물이 영상으로 흐른다. 전시관 내엔 산불 감시를 위한 소방헬기를 체험하는 곳도 있다. 박종식 문화해설사는 “금강송은 예로부터 왕의 나무라 불렸다”며 “금강송군락지 일대는 조선 숙종 6년(1680년) 왕실의 황장봉산으로 지정된 이래 현재까지도 산림청에서 관리하는 중요한 국유림”이라고 설명했다. 곧고 튼튼해 조선 시대 궁궐을 짓는 목재로 쓰였다는 금강송은 화재로 불탄 서울 숭례문과 양양 낙산사 복구·복원의 주요 목재로도 활용됐다. 금강송테마전시관과 나란히 있는 금강송에코리움에선 치유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금강소나무숲을 내다보며 명상과 요가를 배우고, 스파와 숲 산책 등을 하며 금강송과 만난다. 박 해설사는 “인현왕후 이야기가 깃든 ‘불영사’, 숙종 어제 시가 남아 있는 관동팔경 중 하나인 ‘망양정’ 등으로 이어 달리면 숙종의 발자취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인근 죽변 해안의 ‘하트 해변’ ‘죽변항 등대’를 두루 거치는 죽변해안스카이레일도 산불이 진행되는 동안 멈춰 섰다가 얼마 전 운행을 재개했다. 장세석 죽변면장은 “무섭도록 확산하는 산불과 그로 인해 삶의 터전을 빼앗긴 이재민들 아픔에 당시 울진의 모든 것이 숨죽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죽변해안스카이레일에서 차로 5분 거리, 산불현장지휘본부로 활용했던 울진봉평신라비전시관도 정상 운영 중이다. 산불 피해 이재민들의 대피소이자 임시 거처 역할을 했던 덕구온천호텔과 함께 이재민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는 재난 극복 캠페인 ‘힘내라, 울진!’(~4월 3일)을 펼치고 있다.
◇울진의 봄을 만나려거든···
금강송으로 유명한 울진이라지만, 꽃 피는 계절에 가볼 만한 곳은 따로 있다. 매화면 이현세만화거리가 있는 매화마을은 봄이면 예쁜 매화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키 작은 옛날 집 담벼락 위로 빼꼼히 고개를 내민 매화만으로도 충분한데 이현세의 만화 벽화가 더해져 산책이 즐겁다. 울진은 이현세 작가의 고향과도 같은 곳. 매화면사무소부터 매화면 보건지소 일대엔 이현세 대표작인 ‘공포의 외인구단’부터 ‘창천 수호지’ ‘남벌’ ‘며느리밥풀꽃’ ‘만화 삼국지’ 등 400여 점이 그려져 있다. 시멘트를 뚫고 핀 민들레 그림에 공포의 외인구단 속 엄지처럼 발걸음이 멈춘다. 만화 속 명장면을 비롯해 명언들로 채운 담벼락을 느린 걸음으로 걷는 것만으로도 힐링되는 기분이다.
벽화를 감상하며 골목길을 빠져나오면 삼일다방이 기다린다. ‘since 1965′라 써있는 다방 문을 열면 시대극 속 옛날 다방으로 시간 여행을 떠나온 기분이다. 양은 쟁반에 달걀노른자 동동 띄워 내는 쌍화차(6000원) 한 잔에 피식 웃음이 터진다. 왕피천변 벚꽃은 아직 때를 기다리는 중. 가까운 선유산 성류굴로 이어가 볼 만하다. 젊은 층엔 ‘인증 샷 핫플’로 익숙한 곳. 알고 보면 겸재의 그림 ‘성류굴’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천연 석회암 동굴은 형상이 금강산을 방불케 한다 하여 ‘지하 금강’이라고도 불린다. 총 11개 ‘광장’으로 이뤄진 동굴 내부는 2억5000만 년이라는 시간이 빚은 작품들이 기다린다. 몸을 바짝 웅크려 거의 기어가다시피 통과해야 하는 ‘난코스’도, 배를 홀쭉하게 해야 지나갈 수 있는 곳도 있다. 울진 읍내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다.
2·7일로 끝나는 날 울진읍 울진시장 일대에 서는 울진 오일장을 지나칠 수 없다. 울진을 대표하는 오일장으로, ‘바지게 시장’이라 부르기도 한다. ‘바지게’는 싸리나무 등으로 엮어 만든 지게. 보부상들이 이 지게를 지고 십이령을 넘어다니다 이곳 장터로 모였다 해서 붙은 별칭이다. 매년 이맘때면 울진의 산과 들에서 난 쑥, 원추리 등 봄나물, 송이, 해산물 등 좌판이 빼곡하게 들어섰을 장터지만 코로나 확산에 산불 피해까지 겹쳐 듬성듬성 빈자리가 눈에 띈다. 가는 곳마다 흥정 소리보다는 산불 얘기, 코로나 확산 얘기에 이웃 걱정하는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리나 싶더니 좌판을 지키던 노인이 나물 담긴 소쿠리를 옮기며 말했다. “그래도 어에 하겠는겨, 살라믄 나와야제.” 근처 모종 좌판엔 푸릇푸릇한 상추, 산마늘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 집 잃은 식당 주인이 끓여준 미역국 한 그릇, 살아갈 힘 얻었네 ]
지금 가봐야 할 울진 맛집
“점심 땐 앉을 자리 없이 만석이었는데 요즘 손님이 평상시 절반도 안 오는 것 같아요. 여행객도 줄었고, 동네 사람도 모두 산불 공포에서 쉽사리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 같아요.”
울진읍 한정식 식당 연지가 주인 권혜순(65)씨 눈은 충혈돼 있었다. 며칠째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이다. 권씨는 지난 산불로 북면 부구3리에 있는 자택을 하루아침에 잃었다. 식당 역시 화마에 휩싸일 뻔했다가 불길 방향이 바뀌면서 화를 면했다. 그래도 식당을 찾는 손님을 위해 음식을 한다. 대표 메뉴는 미역국 정찬. 전복·가자미·황태 세 가지 미역국 정찬을 선보인다. 그중 시원하게 끓여 내는 전복미역국 정찬(1만5000원)이 인기다. 깔끔하고 정갈한 상차림에 멀리서 오는 이도 많다. 불영사에 다니는 불자들도 즐겨 찾는다. 식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왕피천’과 ‘성류굴’이 있다. 권씨는 “하루빨리 활기를 찾아 다시 봄다운 봄을 맞이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울진읍 소고기 구이 전문 천년한우는 축사가 산불 피해를 봤다.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지면서 동네 주민들과 옛 단골들이 다시 찾고 있다고. 주인이 농장에서 직접 기른 한우, 배추 등을 쓴다. 한우는 150g 기준, 등심·갈빗살·차돌박이 모두 2만5000원. 삼겹살·목살·돼지갈비 등은 200g 기준 모두 1만2000원으로 가성비 맛집으로 꼽힌다. 송이 버섯 전골도 유명하다.
코로나에 산불까지 겹쳐 시끌벅적함이 줄어든 시장의 맛집도 손님을 기다린다. 40여 년 전통을 자랑하는 울진시장의 새마을레스토랑은 상인들이 즐겨 찾는 식당. 대접에 시장 인심을 넉넉하게 담은 보리밥과 잔치국수 한 그릇은 상인들은 물론 시장을 찾는 단골들에게도 마음을 달래주는 음식이다. 주인이 직접 쑨 묵(5000원)은 있을 때 먹어야 한다. 회국수, 횟밥(모두 8000원)이 더 유명한 칼국수식당도 가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