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안 찢어져 고무장갑! 보세요. 쭉 늘어납니다. 어라랏…?”
청량리행 지하철 1호선. 승객들의 무채색 표정을 뚫고 잡상인의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 상인이 내린 뒤엔 사이비 교주, 자해 공갈범, 가출 소녀가 차례로 전동차에 오르내린다. 극단 학전의 1990년대를 배경으로 한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의 장면이다.
무대 밖 2020년대 서울 도시철도 1호선은 더 극적이다. 손잡이 봉에 거꾸로 매달린 ‘박쥐맨’, 황금 갑옷을 두른 ‘장군 할아버지’, 빨간 전차로 꾸민 수레에 올라탄 ‘매드맥스’. 지난달 16일 노인 승객을 향해 무차별 폭언을 한 ‘1호선 패륜아’ 사건도 화제였다.
우리나라 최초 지하철 노선인 1호선은 서울역과 시청, 동대문 등을 포함한 10개 역으로 1974년 개통했다. 서울 인구 폭발과 함께 확장되어 온 1호선 노선은 현재 200㎞가 넘는다. 수도권 전철 중 가장 긴 노선답게 사건 사고도 많다. 작년 한해 수도권 도시철도 승객으로부터 접수된 민원 건수는 76만1043건. 그중 1호선은 전체의 절반에 해당하는 37만9426건(49.9%)이었다. 시민의 발 1호선은 어쩌다 ‘빌런(괴짜 악당)의 성지’가 됐을까.
◇40%가 20년 이상… ‘낡은 전동차의 법칙’?
“XX. 미친놈 다 죽여. 카악 퉤!”
금요일이었던 지난 1일 저녁, 종로3가역에서 불콰한 얼굴의 50대 남성이 지하철에 올라탔다. 객실 통로문 앞에 서서 다가오는 사람에게 분노에 찬 말을 되뇌다가, 마스크를 내리더니 바닥에 침을 뱉었다. 대학 통학 때문에 5년 동안 1호선을 이용해 온 한모(26)씨는 “오래되고 승객이 많은 탓인지 1호선은 의자도 축축하고 냄새가 난다. 특히 저녁엔 술 취한 사람들이 고성을 지르거나 다른 승객에게 시비 거는 일도 흔하다”고 했다.
1호선은 욕설 취객뿐 아니라, 열차 유리창을 맨손으로 깨거나(2020년), 객실 의자에 소변을 본 승객(2021년) 등 기물 파손도 끊이지 않는다. 왜 하필 1호선일까. 주희연 한양대 상담심리대학원 교수는 “낙후한 곳에서 경미한 범죄가 잘 일어나고, 그를 방치하면 더 큰 범죄가 일어난다는 ‘깨진 유리창의 법칙’처럼, 오래된 1호선 차량 내부의 환경이 연쇄 범죄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공정식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일대일 대면 관계에서 주목받지 못해 피해 의식을 가진 일부 사람은 다수가 모인 공공장소에서 자신을 과시하는 방식으로 스트레스를 완화한다”며 “인파가 몰린 곳에서는 이상 행동 후 도주하는 것도 유리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1호선 전동차 노후화는 심각한 수준이다. 1호선 차량 116대 중 100대는 코레일, 16대는 서울교통공사가 관리한다. 그중 사용 연수 20년이 넘은 차량은 서울교통공사 보유 차량의 77%, 코레일의 39%가 해당한다. 서울교통공사 관계자는 “48년간 쉬지 않고 달려온 노선인 만큼 노후한 것이 사실”이지만 “2024년부터 1호선 전체 차량을 순차적으로 교체해 2027년까지는 마무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1호선에 많은 3가지… ‘기차역·시장·노인’
1호선은 수도권의 주요 기차역 5곳을 모두 지난다. 청량리·서울·용산·영등포·수원역 등이다. 유동 인구가 많고 기차역에 노숙하는 부랑인들이 지하철로 유입될 가능성도 높다. 주거 지역보다 상업 지역을 더 많이 지난다는 것도 특징이다. 서울연구원에 따르면 생활·강력범죄율은 주거 지역보다는 상업 시설이 밀집된 곳에서 많게는 3배까지 높게 나타난다. 지하철 1호선은 영등포시장, 노량진수산시장, 동대문평화시장을 지난다.
이용 연령 또한 높다. 약령시장이 위치한 제기동역은 연간 이용객 746만명 중 65세 이상 승객이 356만명(2019년 기준)으로 절반을 차지한다. 어르신들이 주로 찾는 탑골공원 인근에 위치한 종로3가역. 일일 이용객 2만1083명(작년 기준)으로 신도림, 서울역 등 다음으로 1호선에서 5번째로 이용객이 많다. 양승우 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교수는 “1호선이 서울을 관통하는 교통 중심축 역할을 하면서 수도권 외곽 지역의 저소득층, 노인들을 실어 날랐다. 특히 기차역과 상업 지역은 불특정 다수가 모이고 흩어지기 때문에 범죄율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요인들이 1호선 내 이상 행동이나 범죄 발생에 영향을 줬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지난달 25일 1호선 승객 최모(38)씨는 불법 촬영으로 의심되는 장면을 목격했다. 동묘앞역을 지나던 중 객실 내 20대 후반 여성이 40대 남성에게 “휴대폰 보자고요!”라고 소리쳤다. 여성은 자신이 잠들어 있는 동안 남성이 스마트폰으로 몰래 촬영했다고 의심했다. 최씨는 “남성이 거리낄 게 없었다면 휴대폰을 보여줬을 텐데, 실랑이만 10분가량 이어졌다”고 했다.
서울교통공사는 상인이나 취객 등 객실에서 난동 부리는 이들을 단속하기 위해 지하철 보안관을 운영 중이다. 작년 5월 기준, 전체 노선에 배치된 274명 중 27명(9.9%)이 1호선에 배치돼 있다. 그러나 인력과 권한이 부족해 현장에서 단속을 거부하는 이들을 통제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국민의힘 성중기 서울시의원은 “지금의 지하철 보안관 인력으로는 한 역사에 한 명도 배치하기 어렵고,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할 권한조차 없어 실제로 난동을 제압하기 힘들다”며 “역사에서 일어나는 폭력 사건에 한정해서라도 지하철 보안관에게 사법 경찰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양쪽 시선 받는 ‘런웨이’ 무대 효과
지난 4일 낮, 용산역을 지나는 1호선 열차에 선글라스를 낀 남성이 올라탔다. 분홍색 플라스틱 바구니를 든 채 객차의 끝에서 끝까지 걸었다. 기부를 청하는 말 한마디 없이 발을 끌며 걷는 그에게 승객들 시선이 닿았다. 스마트폰에 열중하던 승객도 남성이 가까이 오자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한 40대 여성은 “저기요”라며 남성을 멈춰 세우더니 천 원짜리 지폐를 바구니에 넣었다.
폭 2m가량 객차 내부 통로. 이 공간은 양옆에 앉은 승객이 집중하게 만드는 런웨이 무대와 같은 효과를 지닌다. 노호성 무대 연출가는 “버스나 기차와 달리 지하철은 승객의 시선이 중앙으로 모이기 때문에 통로가 하나의 돌출 무대 역할을 한다”며 “불특정 다수가 모인 대중교통은 군중의 탈을 쓸 수 있기 때문에 무대에 서더라도 익명성이 보장된다”고 했다.
승객은 강제로 관객이 된다. 김한신 백석대 문화예술학부 교수는 “앞에서 어떤 행동이 벌어져도 승객은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일정 시간 열차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버스와 달리 흔들림이 적어 집중도도 높다”고 말했다. 그는 “정형화된 무대를 벗어나 극을 벌이는 것이 포스트 모더니즘 기조다. 물론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특이 행동을 보이는 이들이 관객의 스마트폰으로 녹화되고 소셜미디어로 퍼지며 2차⋅3차 재연되는 것 또한 주목할 만하다”고 말했다.
48년 동안 서울을 이어온 중심축 1호선. 쉬지 않고 달려온 열차 안에는 온갖 민낯이 모인다. 김수박 작가는 서울 지하철 1호선을 주제로 한 르포 만화 ‘사람의 곳으로부터’에서 ‘장미꽃 파는 아주머니’를 그렸다. 다짜고짜 승객에게 꽃을 내밀고 나서, 다시 한 바퀴 돌며 꽃을 수거하거나 돈을 받는 아주머니였다. 김 작가는 말했다.
“그를 빌런으로 치부해버릴 수도 있었겠죠. 그런데 전 다르게 보였어요. 혹시 저 아주머니가 ‘장미 백만송이를 선물해야만 그립고 아름다운 별나라로 돌아가는 외계인이 아닐까’ 하고요. 1호선은 원래 온갖 사람이 모여요. 이곳에 빌런이 왜 많을까 고민하는 것보다, 저 사람에게 어떤 사연이 있어서 저런 행동을 할까? 곰곰이 생각해보는 편을 택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