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절터의 초석(礎石·기둥 받침돌)에 앉는 것은 불교 문화유산 훼손 행위일까?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가 지난 5일 북악산 산행 도중 법흥사 터 초석을 깔고 앉은 것을 두고 뜻밖의 논란이 터졌다. 불교중앙박물관장 탄탄 스님은 법보신문 인터뷰에서 “사진을 보고 참담했다”며 “대통령 부부도 독실한 신앙인으로 아는데 자신이 믿는 종교의 성물이라도 이렇게 대했을까 싶다”고 했다. 문화재청이 “이 초석은 지정 또는 등록문화재가 아니다”라고 해명하면서 논란은 더 커졌다. 조계종은 “자칫 국민에게 지정 문화재가 아니면 아무렇게나 대해도 상관없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는 대단히 위험한 발언”이라고 했다.
◇초석에 앉으면 안된다고?
하지만 상당수 불교 문화재 전문가는 “폐사지(廢寺址)에선 답사객들이 초석에 앉아 쉬거나, 그 위에 서서 사진 찍는 풍경을 흔히 볼 수 있다”며 “옛 절터의 흔적을 감상하며 적극적으로 문화유산을 향유하는 모습이고, 유적지 관광 활성화 차원에서도 막을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한 문화재계 인사는 “문화재청이 잘못 대응하면서 논란을 키웠다. 지정 문화재든 아니든 초석에 앉는 게 문제 될 건 없다”며 “조계종의 주장대로라면 폐사지 중 으뜸이랄 수 있는 경주 황룡사 터는 사람들이 발도 못 붙이게 출입을 금지해야 될 것”이라고 했다.
국가 사적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경주 황룡사 터는 신라 진흥왕 14년(553) 창건한 신라 최대 사찰 황룡사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광활한 목탑 터엔 심초석(心礎石·사리를 봉안하는 기둥 받침돌)을 중심으로 초석이 64개 놓여 있고, 금당 터엔 지대석(址臺石·건물을 세우기 위해 잡은 터에 빙 둘러 쌓은 돌) 수십 개가 널려 있다. 웅장한 ‘폐허의 미(美)’가 느껴지는 데다 일몰이 아름답기로도 유명해 경주를 찾는 관람객들은 이 거대한 돌 위에 앉아 ‘일몰 인증샷’을 남긴다. 경주 답사를 즐긴다는 유모(46)씨는 “열 번도 넘게 황룡사 터를 가봤지만 초석에 앉거나 밟지 말라는 제지를 받은 적은 없다”고 했다.
◇“신라 법흥사 터가 아니라 조선 연굴사 터”
진짜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이날 청와대 행사에서 ‘법흥사 터’라고 소개된 곳은 북악산 남동쪽 기슭에 있는 서울시 종로구 삼청동 산 2-1. 청와대 경호처가 2007년 펴낸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에는 “신라 진평왕 때 나옹(懶翁) 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하지만 이에 관한 뚜렷한 역사 기록은 없다”며 “1955년 청오 스님이 증축한 바 있으나 1968년 1·21 사태 이후 신자들의 출입을 제한했고 이후 폐쇄돼 지금은 건물 터, 축대, 주춧돌 등만 남아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북악산 전면 개방을 앞두고 지난해 이곳을 조사한 문화재청과 종로구청은 “구전으로 신라 법흥사 터라고 전해지지만 문헌 기록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했다. 종로구청 용역을 받아 현장과 자료 조사를 진행한 기호철 문화유산연구소 ‘길’ 소장은 “법흥사라는 사찰은 문헌 기록상 근거가 전혀 없고, 고려 때 나옹이라는 고승이 있지만 신라 시대에는 나옹이라는 승려 이름도 전하지 않는다”며 “김신조 사태 직전에 절을 지으려고 축대를 쌓고 초석과 기와, 목재를 운반해 쌓아둔 상태에서 짓지 못한 채 버려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했다. 지난해 7월 ‘명승 북악산 일원 역사 문화 이야기 자원 발굴 용역 보고서’를 작성한 그는 “15세기 분청사기 조각들이 쉽게 발견되는 등 이곳에 조선 초기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세조실록 등 여러 기록을 통해 연굴사라는 절이 있었고 세조 때 훼철해 이후 인수대비 원찰(願刹·죽은 이의 명복을 비는 사찰)로 아래 삼청동에 지었다가 연산군이 다시 옮기면서 이름이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며 “법흥사 터가 아니라 연굴사 터로 불러야 한다”고 했다.
◇배경은 ‘불교 홀대’ 인식
6일 북악산이 전면 개방되면서 ‘초석’은 뜻밖의 명소로 떠올랐다. SNS에는 “여기가 문 대통령이 앉았던 자리”라며 초석에 앉아서 찍은 기념사진들이 올라오고 있다. 불교계 안팎에선 이번 논란이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문재인 대통령이 불교를 홀대해왔다는 내부 인식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취임 직후 청와대 관저에서 가톨릭 사제의 집례로 축복식을 열고, 역대 정부 최초로 교황청에 특사를 파견한 일이나 재임 기간 중 두 차례 교황청을 방문한 일 등 ‘천주교 편향’이 집권 내내 깔려 있었다는 것이다. 정청래 민주당 의원이 문화재 관람료 문제를 제기하며 해인사 사찰을 ‘봉이 김선달’에 빗대 불심이 폭발하는 사태까지 있었다. 불교미술사학자 A 교수는 “이번 논란은 조계종이 초기 과하게 반응한 측면이 분명 있지만, 문화재청과 청와대의 서투른 해명이 기름을 더 부었다”며 “특히 박수현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이 ‘버려져 있던 그냥 그런 돌’이라는 식으로 해명하는 등 불교계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게 문제”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