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파 스님(조계종 종정)이 계신 통도사에서 한때 도자기 작업을 하던 여성 작가가 있었다. 성파는 그녀에게 호(號)를 지어주었는데, 그 호가 크고도 커서 놀랍다. ‘일무(一無)’! 하나이면서 없다는 의미이다. 무엇이 하나인데 없다는 건가? 우주가 그러하다. “우주는 하나이며, 동시에 무한하다. 하나여도 끝이 없다. 우주는 하나이며, (끝이 없으니) 그마저도 없는 거다. 일무(一無)는 하나밖에 없다. 하나. 그것도 없다.”(성파)
보통 사람이라면 감당하기 어려울 이 심오한 호를 받은 이는, 1918년 진주에서 태어난 화가 이성자(1918~2009)다. 사고의 스케일과 경지가 상상을 초월하게 크고 높을 뿐 아니라, 평생 부지런히 생산한 작품의 양도 어마어마하다. 2600여 점의 유화, 판화, 도자기, 태피스트리, 모자이크를 남겼으니까. 이중섭보다 불과 2년 늦게 태어났으니, 이중섭의 동시대인이 겪었을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다 통과하고도, 그녀는 어떻게 좌절하지 않고 예술가로 살아남았을까?
◇“즐거웠던 추억이며 가슴 아픈 기억들”
이성자의 어린 시절 첫 기억은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의 제의(祭儀)를 참관한 일이다. 다섯 살 때 김해 군수인 부친을 따라가서, 제례악이 울려 퍼지는 왕릉 앞의 엄숙하고 고귀한 분위기에 흠뻑 빠져든 것이다. 하늘과 인간을 매개하는 의례의 근본 의미가 순수한 어린아이 마음에 닿았던 걸까? 이성자는 김해와 창녕 군수를 지낸 부친과, 지극히 헌신적이고 자상한 모친 사이에서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부친 은퇴 후 진주에 정착한 이성자는 큰 한옥에 살며 말을 타고 학교에 다녔단다. 일신여고보(현 진주여고)를 졸업한 후, 단식투쟁으로 일본 유학을 허락받아 1935년 짓센(實踐)여자전문학교 가정과에 입학했다. 이 사립여학교는 여름에 후지산 인근 호수에서 모터보트를 타고, 겨울에 스키 강습을 하던 곳이다. 이성자는 여기서 수리, 기계, 양재, 요리, 건축 등 다양한 과목을 배웠다. 그야말로 ‘로열’ ‘엘리트’ 코스를 거치면서, 그녀는 자의식이 높고 충만한 여성으로 성장했다.
졸업 후 귀국한 이성자는 경성제대 의학부 출신 외과의사 신태범(1912~2001)과 결혼했다. 신태범은 1940년대 잡지 ‘문장’ ‘조광’에 글을 발표했을 만큼 뛰어난 문재(文才)를 지녔으나, 일본인에게 굽실대기 싫다는 이유로 의사라는 직업을 택했다. 1942년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고향 인천에 외과병원을 열었는데, 자꾸 창씨개명을 강요하면 병원 문을 닫고 경성으로 가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아 개명을 피했다고 한다. 신태범 또한 그렇게 자존감 높은 인물이었다.
이들 사이에 세 아들이 태어나자, 이성자는 모든 열정을 육아에 쏟아부었다. 경성 최고 사립초등학교를 보내기 위해, 이성자는 세 아들만 데리고 경성으로 분가해 나왔다. 그런데 이 상황이 가정 불화의 씨앗이 되었다. 각자 성격이 강했던 이 부부의 관계는 점차 최악으로 치달았고, 6·25전쟁이 터지기 직전 어느 날, 이성자가 외출한 사이 남편은 서울 집에 있던 세 아들을 인천으로 데려가 버렸다.
이렇게까지 하면 아내가 인천으로 돌아올 줄 알았겠지만, 이성자의 선택은 달랐다. 그녀는 그 길로 집을 나서서, 프랑스 파리로 갔다. 1951년 아직 전쟁이 한창이었는데, 파리행(行)을 가능케 한 그 수완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녀는 참담함과 희망을 함께 품은 당시 심경을 이렇게 썼다. “즐거웠던 추억이며 가슴 아픈 기억들, 모든 것이 태평양 한가운데 파묻혀 사라져갔다. 평화로운 나라 불란서… 불어 단어 하나 모르는 채로, 가진 것 없는 무일푼의, 무명의 처지로서 이국땅에서 다시 태어난 셈이다.”
◇이국땅에서 이룬 성취
파리로 간 이성자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파리 화단에 진입했다. 한국에서 한 번도 회화를 전공한 적이 없던 이가, 1953년 아카데미 드 그랑 쇼미에르에 입학한 지 단 3년 만에 국립미술전에 작품을 출품하여, 평론가의 호평을 받았다. 당시 파리 최고 갤러리였던 샤르팡티에 갤러리에서 열린 ‘에콜 드 파리’전에 쟁쟁한 화가들 작품과 함께 이성자의 ‘내가 아는 어머니’가 출품되었다. 1964년 같은 갤러리에서 이성자 개인전이 열렸다. 프랑스 문화부 관계자의 주목을 받아 작품이 국가에 영구 소장되었다. 이성자는 이 과정에서 화가, 미술행정가, 후원가, 평론가 할 것 없이 파리 미술계 주요 인사를 두루 사귀었다.
실제로 이 시기 이성자 작품은 파리에서도 놀랄 만한 독창성을 지니고 있었다. 대표작 ‘내가 아는 어머니’는 네모, 세모, 동그라미 등 수수께끼 같은 부호들이 조합된 완전한 추상 작품이다. 마치 땅을 일구어 밭을 갈 듯이,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하듯이, 수만 번의 촘촘한 붓질이 차곡차곡 쌓이고, 긁히고, 덧입혀진 화면이다. 이역만리에서도 어머니의 정성 가득한 고운 손결을 상상하면, 작가의 마음은 이렇게도 환해지는 것이었을까? 환상적인 색채와 섬세한 질감이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준다.
작품을 제작하면서 이성자는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리고, 동시에 어머니인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세 아들을 생각했다. “내가 붓질을 한 번 하면서, 이건 내가 우리 아이들 밥 한 술 떠먹이는 것이고, 이건 우리 아이들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이라고 여기며 그렸다”고 이성자는 말했다. 그녀는 자식을 키우던 모든 열정을 오롯이 작품을 생산하는 에너지로 변환시킨 것이다.
◇이성자의 세 아들
이성자는 진정 강한 정신력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고향이 그립고 그래서 슬프지 않으냐는 파리 친구들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나는 슬프지 않다. 내가 서 있는 곳 발끝에 내 고향이 있다.” 그런 ‘초월’의 세계관이 그녀의 삶을 지탱했다. 그러나 막상 그녀의 세 아들은 어땠을까? 진짜 밥을 주는 대신, 밥 주듯이 그림을 그린 어머니를 원망하지는 않았을까?
반전은 여기서 일어난다. 결론적으로 말해, 세 아들은 진정으로 예술가 이성자를 이해하고 존중했다. 물론 성장기에는 고난이 있었겠지만, 세 아들은 결국 이성자를 지탱하는 진정한 지원군으로 자라났다. 1965년, 14년 만에 성공한 화가가 되어 귀국한 이성자의 귀국전을 열어준 것도 첫째 아들 신용석(1941~ )이었다. 신용석은 그새 서울대에 입학하여 ‘대학신문’ 편집장이 되어 있었다. 그는 엄마의 귀국 소식을 듣고, 전시할 장소를 마련하기 위해 서울대 학생처장을 찾아갔다. 당시 서울에는 대작을 전시할 만한 공간이 없었기 때문에, 신용석은 서울대 교수회관 자리를 일주일만 빌려달라고 학생처장을 졸랐다. 학생이 와서 교수들 밥 먹는 곳을 비워달라고 하니, 처음에는 어이없어하던 학생처장은 어머니를 위한 아들의 간곡한 부탁에 감동했는지, 결국 공간 사용을 허락했다. 신용석은 그 자리에서 큰절을 했다고 한다.
귀국전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이성자는 다시 파리로 갔다. 그 후 신용석은 조선일보에 입사해, 1969년 입사 3년 만에 조선일보 파리 특파원이 되었다. 28세 신임 기자를 특파원으로 임명한 파격 인사였다. 신용석은 어머니가 계신 파리로 보내주면, 루브르나 현대미술관 명화를 매년 한국에 보내 전시하겠다고 호언장담한 덕분에 파리행에 성공했다. 실제로 그는 가자마자 이성자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 문화부 고위 관계자를 만났고, 결국 이 일을 성사시켰다. 1970년 경복궁 국립미술관에서 열린 ‘프랑스 현대명화전’을 시작으로, 1972년 밀레전, 1974년 피카소전 등 한국 블록버스터 역사를 쓴 전시들이 그렇게 가능했다. 광화문까지 줄을 섰다는 이 전시들이 이성자와 그의 아들을 함께 파리에 있게 한 ‘오작교’였던 셈이다. 신용석은 11년간 파리에 있으면서, 12번의 전시를 한국으로 보냈다.
둘째 아들 신용학은 이미 1967년 파리로 유학 갔다. 그는 건축을 전공해서 파리7대학 교수가 되어, 평생 파리에 살며 어머니 옆을 지켰다. 셋째 아들 신용극은 프랑스 명품 수입 사업에 일찍부터 뛰어들어, 사업가로 대성공했다. 그는 파리와 서울을 오가며, 평생 어머니 작품을 구입하는 든든한 후원자를 자청했다. 화가가 아들에게 작품을 물려준 것이 아니라, 화가 생존 시 자식이 작품을 사주는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다.
◇‘은하수’에서 살다
이성자의 ‘자장(磁場)’ 안으로 세 아들이 자발적으로 모여들자, 이성자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녀는 ‘우주’로 날아올랐다. 더 이상 그 촘촘하고 고단한 작업을 계속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그녀는 1969년 이후 ‘중복’ ‘도시’ ‘초월’ ‘자연’ ‘극지(極地)’ 연작을 선보이더니 결국 ‘우주’를 화두로 삼았다. 처음에는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꼭대기에서 내려다본 도시의 모습을 그리다가, 점차 비행기 위에서 하늘과 자연을 바라보더니, 급기야 대기권 밖으로 날아오른 셈이다.
1992년 이성자는 프랑스 남부 투레트에 ‘음양’의 모티브를 형상화한 아틀리에 ‘은하수’를 지었다. ‘양’의 건물에서는 낮에 회화 작업을 하고, ‘음’의 건물에서는 밤에 판화 작업을 했다. 완전히 합일하지 않은 음양의 건물 사이로 시냇물이 흘러 ‘은하수’를 형성한다. 상징적이고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이곳 투레트에서 이성자는 2009년 91세의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거의 마지막 작품은 성파에게 받은 ‘일무(一無)’라는 호가 새겨진 우주 그림이다. 오색영롱한 빛깔이 불꽃놀이를 하듯 환하게 흩뿌려진 작품이다. 그녀가 본 세계는 그렇게 찬란하고 황홀했다. 이성자는 평생 세 아들의 비호를 받으며, 나무를 깎아 판화를 만들고, 흙을 만져 도자기를 빚으며, ‘생산의 어머니’로 행복한 생을 살다 갔다. 화가가 사라져도 그림은 남았다. 이성자는 죽기 전 고향 진주시에 367점의 작품을 기증했고, 진주시는 2015년 이성자미술관을 개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