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어져도 괜찮다는 걸 알았어요. 다시 서핑 보드에 올라타기만 한다면 파도는 언제든 오니까요. 보드 위에서 처음 일어섰을 때, 친구들이 환호해준 그 순간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아요. 시스터후드(sisterhood·자매애) 그 자체였죠.”
여성 ‘혼행(혼자 떠나는 여행)’객들이 부산에 모였다. 코로나 거리 두기가 해제되고 본격 여행이 시작되기 전, 글로벌 여성 여행자 앱 ‘노매드헐’을 통해 모인 여자들의 여행 연습이다. 한국관광공사에 따르면 코로나 직전인 2019년 해외관광객 출국자 중 여성 비율은 10년 전인 36.9%보다 9.2%p 높아진 46.1%였다. 모두투어 이윤우 매니저는 “여행사 패키지 뿐만 아니라 독립적으로 여행 계획을 짜서 떠나는 이들도 최근 크게 늘었다”며 “독립적이고 자신의 감정에 충실해지려는 MZ세대 여성들이 ‘나 홀로 여행’을 떠나는 경우가 확산되며 트렌드로 자리매김했다”고 말했다.
여행 사이트 익스피디아에 따르면 2030 세대 여성들의 55.5%가 여행지를 선택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하는 것은 ‘안전’. 노매드헐은 안전을 위한 정보를 주고받는 것은 물론, 끊임없는 도전 의식과 여자들의 ‘찐 우정’까지 나누는 공간이다. 노매드헐이 여성 혼행자들을 위해 지난 23일 부산 해운대에서 개최한 1박 2일 캠프에 <아무튼, 주말>이 다녀왔다.
◇실패는 파도가 지워주니까
23일 낮 1시 반, 부산의 ‘송정서핑학교’로 배낭을 멘 이들이 들어섰다. 한국인 3명, 프랑스에서 온 6명. 그리고 김효정 노매드헐 대표와 배소연 사무국장이 이번 서핑 캠프 참가자다. 대부분 초면이지만 영어와 프랑스어로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본격 서핑을 시작하기 전, 이나라(25) 국가대표 서핑 선수가 실내에서 강습을 했다. 이 선수는 한국 1세대 여성 서퍼라는 서미희(56) 대표의 딸이기도 하다. 간단히 기본 동작을 설명하고 참가자들과 대화를 나눴다.
이 선수는 “매일 햇빛 아래 있으니 피부도 까맣고, 머리카락도 염색한 것처럼 상했죠. 여성으로서는 속상하지만, 이 모든 걸 포기해도 좋을 만큼 서퍼로서는 행복해요.” 한 참가자가 이 선수에게 ‘높은 파도가 무서운 적은 없었냐’고 물었다. “무섭죠. 하지만 큰 파도는 매일 오는 게 아니에요. 기회라 생각하고 두려움을 도전 의식으로 바꿔요. 서핑에는 입구는 있지만 출구가 없어요.”
강연이 끝나고 이제 실전에 들어갈 시간. 참가자들은 9피트(약 270cm) 길이 서핑보드를 머리에 이고 모래사장으로 내려갔다. 모래 위에서 엎드리기, 팔로 노를 젓는 패들링, 보드 위에서 일어서는 테이크 오프 자세를 연달아 반복했다. 차가운 바닷물이 몸에 닿자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들어간 지 1분도 안 돼 참가자 전원이 보드 올라타기에 성공했다. 그다음 관건은 중심 잡기. 보드 앞부분인 노즈 쪽으로 몸의 중심이 쏠리면 앞으로 뱅뱅 도는 일명 ‘세탁기’가 된다.
잔잔해 보이는 파도였지만 막상 딛고 일어서기는 쉽지 않았다. 균형 잡는 데 온 신경을 쓰느라 미간은 찌푸려지고 양팔은 이리저리 허우적거렸다. 하지만 넘어지는 순간에는 웃었고, 다시 차분히 때를 기다렸다. 마침내 아눅(25)씨가 처음으로 테이크 오프에 성공했다. 주위에 있던 참가자들은 ‘퍼스트 스탠딩(first standing)!’이라 소리치며 엄지를 척 들었다. 아눅씨는 양팔을 번쩍 들어 보였다. 캠프 참가자 송소영(34)씨는 “실수하고 넘어져도 파도 한번 치고 나면 잊는다. 그래서 다리가 삔 줄도 모르고 보드에 계속 올랐다. 혼자였다면 못 했겠지만 격려해주고 손뼉을 쳐주니 지치지 않고 계속 도전하게 되더라”고 말했다.
◇언니와 같이라면 어디든 간다
참가자들은 모두 흰 티셔츠를 받았다. ‘She can travel anywhere(그녀는 어디든 여행할 수 있다)’라고 적힌 반팔 티셔츠였다. 캠프를 주최한 김효정 대표는 44국을 여행한 ‘프로 여행가’다. 여성들이 어디든 갈 수 있게 하되, 여행 중 느끼는 불편함을 해결할 수 있도록 노매드헐 앱을 만들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여행 중 위험한 상황은 온다. 저 역시 여행 중 깨진 술병을 들고 쫓아오거나, 제 숙소 방에 낯선 사람이 들어온 경우가 있었다. 이런 일에 혼자서는 대처하기 어려워도 가까운 곳에 친구가 있다면 다르다. 그래서 각 지역 여성 여행객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고 안전한 곳을 공유하는 커뮤니티 앱을 만들게 됐다.”
‘노매드헐’은 여러 곳을 돌아다니는 ‘노마드(nomade·유목민)’와 여성을 가리키는 대명사 ‘her’를 합쳐 만든 이름이다. 전 세계 180국 여성 여행자 총 1만5000명은 소셜미디어에 게시 글을 올리듯 자신이 다녀온 여행지와 식당을 소개할 수 있다. 다른 여성 동행자를 구하거나 주기적으로 열리는 캠프에 참가할 수도 있다. 참가자 홍수민(28)씨는 “프랑스에서 유학한 적이 있는데, 지하철역을 지날 때마다 내 타투를 보고 치근덕대는 이들이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은 지하철 안까지 따라왔다. 노매드헐에서 만난 친구들은 내 모습 그대로 이해해주고, 비슷한 고민을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고 말했다.
이들은 여성 혼행족을 위한 팁도 소개했다. 숙소‧소셜 모임에 관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김효정 대표는 “숙소는 너무 저렴하고 외진 곳보다는 시내와 가까운 곳을 먼저 찾아보라. 낯선 곳에서 모르는 이들과 만난다면 1대 1보다는 여러 명을 만나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함께 땀 흘려야 진짜 ‘시스터’
서핑 다음 날, 참가자들은 일출을 보며 요가를 하기 위해 새벽 5시 30분부터 해운대 해수욕장으로 모였다. 평소에는 인파로 북적이는 곳이지만 동 트기 전 새벽에는 한산했다. 참가자들은 모래사장에 매트를 깔고 요가 선생님 예진서(32)씨를 빙 둘러싸고 앉았다. 예씨는 참가자들을 앞에 두고 말했다. “면이 고르지 않은 모래를 딛고 서면 중심 잡기가 더 힘들죠. 그래서 더 내 몸에 집중하게 돼요. 몸의 어느 곳이 약한지 불편한지 알게 되니까요.”
요가는 한 시간 동안 진행됐다. 한 발을 내밀고 몸을 굽히는 전사 자세, 몸의 긴장을 푸는 아기 자세 등. 초심자들도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동작이다. 숨을 내쉬고 들이쉬며 내 몸에 집중하고, 몸을 멈추는 순간에는 파도 소리에 집중했다. 참가자 마르타(35)씨는 “신체 조건이 다른 남성들과 할 때보다 부담도 작고 더 정확한 자세로 할 수 있었다. 어려운 자세를 할 때 옆에 있는 친구들을 봤더니 똑같이 힘들어하더라. 같이 새벽에 땀 흘리면서 ‘찐 우정’을 느꼈다”고 말했다.
캠프 참가자들의 맏언니 역할을 한 황모(53)씨는 “궁금한 건 못 참아서 이 나이에도 앱을 깔아 여행하게 됐다. 그 덕분에 갇힌 일상에서 벗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서핑하고 바다에서 요가하고 이런 걸 혼자서 어떻게 하겠나. 거의 딸 나이대의 친구들이지만 함께하니 안심도 되고 즐겁다”고 말했다.
오직 여성들만의 여행 앱. 그동안 남성을 배제한다는 비판은 없었는지 김효정 대표에게 물었다. “블루클럽(남성 전용 미용실) 가서 여자 머리 왜 안 해주냐고 묻지는 않잖아요. 남자를 배제했다기보다는 여성에게 집중한 거죠. 성별에 따라 원하는 게 다르니 여성 의류만 파는 앱, 여성 운동 앱이 나오잖아요. 우린 여행자를 성별로 나눠서 맞춤 서비스를 제공하는 거예요. 안전하게 친한 언니 동생과 여행하는 것 같은 만족을 느낄 수 있도록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