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승무원이 꿈이던 착하고 곱던 딸이었다. 고등학교 때 만난 또래 남자친구와 예쁘게 연애도 잘 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어느 날 딸이 문자를 보냈다. “죄송해요. 임신 8개월이에요.” 지금껏 몰랐다니, 어려서인지 티도 안 났었다. 다행히 사돈은 남편의 학교 후배. 좋은 시댁을 만난 것 같아 안심된다. 그러나 외손자 하랑의 돌잔치 날, 49세에 외할머니가 된 그는 울먹이며 말한다. “만감이 교차했어요. 뿌듯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민아 키우면서 힘들었던 게 생각나기도 하고. 아직 앞날이 창창한데, 제 친구들은 다 대학 들어가서 하랑이 축하해주러 왔는데. 민아 친구들만 봐도 눈물이 날 것 같더라고요.”

#2.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전교 1등 딸이었다. 가난한 살림에 아내가 집 나가고, 혼자 얼음 장사 하며 힘들게 딸을 키웠다. 이제 딸이 의대만 들어가면 고생 끝. 바다낚시나 하며 여생을 보낼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집에서 TV 드라마를 보고 있던 내게 딸이 말한다. 임신을 했단다. 심지어 애 아빠는 내가 싫어하는 원수의 아들이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로미오와 줄리엣’ 부모들의 마음이 이랬을까. 낙태 수술하자고 하니 절대 못 한단다. 아기의 심장 소리가 뇌리에서 떠나질 않는단다. 차마 사랑하는 딸을 때리지는 못하고 제 가슴을 치며 말한다. “애 키우는 건 쉬운 줄 알아? 내가 너 키우며 먹은 두통약이 한 트럭이고, 너 키우며 흘린 눈물이 바다야.”

MBN 예능 ‘어른들은 모르는 고딩엄빠’에 나온 하랑이네 가족. / MBN

TV를 보는 시청자들 마음이 착잡하다. #1은 MBN 리얼리티 예능 ‘어른들은 모르는 고딩엄빠’(이하 ‘고딩엄빠’)의 한 장면, #2는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10대에 임신을 한 영주와 현의 이야기다. 두 프로그램은 현재 국내 넷플릭스 순위 1위(#2)와 9위(#1)를 차지하며 큰 인기를 끌고 있다. 10대들의 임신을 수면 위에서 다루는 것도 처음이다.

과거에도 10대들의 임신을 다룬 드라마나 영화들은 있었다. 2015년 SBS 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 2005년 영화 ‘제니 주노’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들의 임신이 잘 모르는 상태에서 저질러진 하룻밤의 실수라면, 최근 이 두 프로그램에서의 임신은 인지한 상태에서의 결과다. 그래서 이들은 임신으로 인한 놀라움보다, 주변 관계의 변화, 출산 후 현실에 더욱 초점을 맞춘다.

현실이 그렇다. 통계청이 조사한 인구동향조사 2020에 따르면, 한 해에 아기를 출산하는 10대들의 숫자는 918명, 이 중 15세 미만이 11명이다. 국내 청소년들의 성관계 시작 나이도 평균 13.6세(청소년 시기 성관계 경험자 중)다. 특히, 초등학교 6학년에서 중학교 1학년에 올라갈 때, 새로운 사람도 만나고 소셜미디어도 시작하면서 호기심이 많아져 성관계를 맺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요즘 10대들에게 성관계란, 인싸(인사이더)와 아싸(아웃사이더)를 나누는 하나의 라벨이다. 그러나 피임도구 착용 비율은 66.8%에 불과하다.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10대 예비 부모 영주와 현. / tvN

일부 불량 학생들의 일탈 이야기만도 아니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예비 부모가 된 10대 남녀는 전교 1등과 전교 2등이다. 예능 ‘고딩엄빠’에서도 9회에 합류한 박수현은 출산으로 학교를 자퇴하기 전 성적이 전교 10등 안이었다고 한다. “내 자녀는 모범생이라 괜찮아”라고 안심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시훈 성교육 강사는 “보통 10대들이 임신을 하면 부모들이 나서서 임신중절 합의서를 쓰고 금액을 협의한 후 무마시킨다. 출산을 하든 중절을 하든 보육원을 보내든 한쪽이 알아서 처리하겠다는 합의서다. 이 합의금 시세는 보통 3억에서 5억원 선이다. 부모 욕심이나 체면치레 때문에 무리하게 무마시키려고 하고, 그 사이에서 예비 부모가 된 아이들은 상처받는다”고 말했다.

임신을 안 순간부터 출산까지를 다루는 영화나 드라마와 달리, 예능은 출산 이후의 현실을 보여준다. 소아암에 걸린 첫아들의 병원 치료로 집에서 제대로 쉬지도 못하지만, 둘째 아들을 위한 이유식 재료를 다져서 큐브에 냉동해 놓는 도도형제 엄마 김효진, 좋은 시댁과 든든한 친정으로 나름 행복한 삶을 보내고 있지만, 곧 남편을 군대에 보내야 하는 하랑이 엄마 민아, 미혼모로 아이를 꿋꿋하게 잘 키우지만 늘 생활고에 시달리고, 갑자기 찾아온 애 아빠에게 폭행을 당하는 봄이 엄마 지우. 어린 나이에 엄마가 된 그들에겐 당장 학업과 경력 단절, 생활고, 육아 등 수많은 문제들이 기다리고 있다.

‘고딩엄빠’를 연출한 남성현 PD는 “섭외가 가장 어려웠다. 첫 번째로 생각한 기준은 바로 ‘당당함’이었다. 우리의 고딩엄빠들은 이 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이고, 쉽지 않은 선택과 그 책임을 다하고 있는 아들딸, 그리고 친구이자 동생들이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고민과 어려움을 굳세게 이겨내는 모습, 혹은 힘들어하는 과정들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22개월 아들을 둔 이루시아는 출연 동기에 대해 “나중에 아들에게 ‘엄마는 네가 부끄럽지 않았어’라고 말하고 싶어서 나왔다”고 했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속 영주도 마찬가지다. “죽어도 잘못했다고 안 할 거야. 내 아기가 실수라고 죽어도 말 못해.” 남자친구 현에게도 말한다. “너 우리가 아빠들 진짜 실망시키고 못되게 상처주고 있는 거 알지? 그러니까 이제부터 우린 지금보다 더 많이, 서로 사랑하고, 더 믿고, 더 잘해줘야 해.”

눈물 나는 10대들의 사랑. 이 두 프로그램은 그들의 임신을 미화하려는 것일까. 이시훈 성교육 강사는 “아이들을 제대로 교육하지 않고 책임감만 강요하는 건 역설적으로 어른들의 무책임”이라고 말한다. 남 PD는 “많은 사람들이 쉬쉬하지만, 우리 주변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10대의 성 이야기’를 알리며 사회에 화두를 던지고 싶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