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전혁림의 ‘통영항’(2006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작가에게 직접 주문해 1억5000만원에 구입한 그림이다. 지난 2018년 청와대 사랑채에서 열린 '함께, 보다' 특별전에서 공개됐다. /조선일보 DB

청전 이상범의 ‘산수’, 운보 김기창의 ‘농악’, 서세옥의 ‘백두산 천지도’...

10일 청와대 개방을 앞두고 청와대가 소장한 미술품의 향방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일각에선 청와대 소장 미술품으로 경내에서 전시회를 여는 방안과 함께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부인 김건희 여사가 전문성을 살려 전시회를 열 수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연합뉴스는 지난달 27일 “청와대 소장 미술품을 정리하고 일반에 공개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얘기가 김 여사 주변에서 비공식적으로 오간 적이 있다”고 김 여사 측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이에 대해 청와대 미술품 관리에 관여했던 미술계 인사 A씨는 “아마 청와대가 소장한 작품 규모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라서 하는 말일 것”이라며 “전시회라는 게 작품의 맥락이 있어야 가능한데 청와대가 체계적으로 미술품을 수집하고 관리한 적이 없는 데다가 일부를 제외하곤 한국을 대표하는 그림이라고 할 수 없는 민망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박수학 작가의 ‘책거리’(1991년). 지난 2018년 청와대 사랑채에서 열린 '함께, 보다' 특별전에서 공개됐다. /조선일보 DB

◇도록 한 권 없는 깜깜이 관리

미술계와 정부에 따르면 청와대가 소장한 미술품은 현재 600여 점 이상인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한번도 소장 미술품 목록을 공개하거나 도록을 제작한 적이 없다. 문재인 정부 초기인 지난 2018년 청와대 사랑채에서 ‘함께, 보다’라는 제목의 전시를 열고 소장품 중 한국화·서양화·조각·벽화 등 31점을 공개한 게 전부다. 1966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출품작부터 2006년 작품까지 청와대가 40년에 걸쳐 수집한 작품 중 일부를 공개했고, 작은 전시인데도 71일 동안 13만 명의 관람객이 다녀갔다.

청와대 그림은 우리 작품을 해외에 널리 알릴 수 있는 창(窓)이다. 외국 귀빈이 청와대 방문 시 찍은 사진이 외신을 통해 전해지면서 배경으로 등장하는 그림이 자연스럽게 노출되기 때문이다. 1966년 이후로 청와대에서 미술품 수집이 본격적으로 이뤄졌고, 1981년까지 국전 대통령상 수상작은 대부분 청와대가 구매했다. 하지만 작품 관리는 체계적이지 못했다. 소장품 목록도 김영삼 대통령 때 처음 만들었다고 한다. A씨는 “청와대 그림 중에 상당수가 1994년 취득한 것으로 기록돼 있는데, 정확한 구입 연도를 알 수 없는 그림들을 그때 일괄 정리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지난 2017년 9월 대통령비서실이 보유한 미술품을 전수조사해 도록을 만들어 공개하겠다고 밝혔으나 아직까지 감감무소식이다. 감사원도 2년 전 대통령비서실이 청와대에 있는 미술품의 이력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청와대에 미술품을 판매한 경험이 있다는 화랑 대표 B씨는 “대통령 집무실 등을 둘러봤는데 벽이 도드라지거나 인테리어가 너무 세서 그림을 걸어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구조였다”며 “작품 수집에 대한 인식도 없어서 친분 있는 화가 그림으로 연회장을 도배하거나, 퇴임하면서 그림을 가지고 나오는 대통령도 있었을 정도”라고 했다. 또 다른 미술계 인사는 “청와대가 습한 편인데 그림을 교체하지 않고 오랫동안 걸어둬 변색된 것도 꽤 있었다”고 했다.

강태성 작가의 '해율(1961년)'. 지난 2018년 청와대 사랑채에서 열린 '함께, 보다' 특별전에서 공개됐다. /조선일보 DB

◇권력 따라 작품 운명도 바뀌어

미술품도 권력에 따라 부침을 겪었다. 노태우 대통령 때 청와대 본관 국무회의장에 송규태 작가의 ‘일월도’를 걸었다. 김영삼 대통령 때는 제왕적 통치의 상징이라며 이 그림을 떼어 냈다. 김대중 대통령 말기에는 그 자리에 박영율의 소나무 그림 ‘일자곡선’을 걸었다. 이명박 대통령 때는 회의장 배치가 대폭 바뀌면서 그림을 커튼으로 가렸고, 문재인 정부에서 다시 ‘일월도’로 바꿨다.

전혁림의 ‘통영항’은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주문해 1억5000만원에 구입한 것이다. 2005년 우연히 TV를 통해 이 그림을 본 노 전 대통령이 작가의 전시가 열리던 경기도 용인 이영미술관으로 찾아가 “힘들 때마다 다도해를 내려다보며 위안을 받았다”고 고백한 뒤 화가에게 청와대에 걸 그림을 그려 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구순이었던 전혁림은 4개월간 작업해 한산섬과 미륵섬을 품고 있는 ‘통영항’을 완성했다. 청와대 인왕실에 걸려 있던 그림은 이후 이명박 대통령 때 교체됐다가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한 뒤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권력의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작품의 운명도 달라진다는 걸 보여준 대표 사례다.

청와대 그림 관리는 총무비서관실에서 담당한다. 보통 정권 말기부터 다음 정부 중반까지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사가 파견 근무를 하지만, 현재는 전문 인력이 없다. 미술평론가 정준모씨는 “백악관은 케네디 대통령 시절부터 내부에 학예실을 두고 소장품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윌리엄 올먼 백악관 7대 학예실장이 40년 넘게 근무하다 퇴임했을 정도”라며 “국빈 방문 시 걸리는 작품은 문화적 자부심을 보여줄 뿐 아니라 대통령의 정치적 메시지까지 효율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우리도 청와대에 걸리는 미술 수준부터 업그레이드해서 국격(國格)에 맞는 ‘문화 외교’를 펼칠 때가 됐다. 청와대 작품 관리·전시를 담당할 전문가를 상설 제도화하고, 수집도 심의위원회를 구성해 체계적으로 진행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