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구 역삼역 사거리 주변 보도는 직장인들에게 ‘킥라니(킥보드+고라니) 출몰지역’이라 불린다. 전동 킥보드가 고라니처럼 갑자기 튀어나와 차량 운전자나 보행자가 놀라는 경우가 많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인도 가운데를 따라 성인 키 높이의 사철나무 화단이 조성돼 있어 보행자 시야가 가려진 탓에 킥보드와 충돌하는 사고가 심심치 않게 발생한다. 회사원 정희욱(42)씨는 지난 4일, 지하철 2호선 역삼역 출구를 나온 직후 정장 차림의 남성이 전동 킥보드를 타고 자기 앞을 지나가자 깜짝 놀라 손에 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바닥에 떨어뜨려 화면 액정이 깨지는 사고를 겪었다. 정씨는 “전동 킥보드가 내리막길을 내려올 경우 속도가 더해지기 때문에 출퇴근길 킥보드에 치이지 않을까 신경이 곤두설 때가 있다”며 “한 손으로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곡예 운전을 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이달로 전동 킥보드에 대한 안전 규제가 도입된 지 1년이 됐다. 전동 킥보드는 오토바이처럼 손으로 핸들을 돌리면 자동으로 속도가 올라가는 개인 이동장치. 2018년 국내에 도입돼 10~30대층을 중심으로 교통 정체를 피해 짧은 거리를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교통수단으로 각광받았지만, 이용자 상당수가 인도 위를 달려 사고 위험에 대한 우려도 높았다. 결국 지난해 5월 도로교통법 개정안이 시행되면서 전동 킥보드의 인도 주행이 금지되고, 운행 시 안전모 착용이 의무화됐다. 전동 킥보드로 인한 위험은 이제 사라졌을까. 지난 10일 오후 5~7시 강남역 사거리에서 삼성역 사거리까지 인도를 걸어다니며 전동 킥보드 이용자들이 얼마나 안전 규정을 준수하고 있는지 점검해봤다.
여전한 킥보드 무법지대
실제 가본 운행 현장은 아직 불안해 보였다. 2시간 동안 테헤란로 일대에서 확인한 전동 킥보드 이용자는 57명, 이 중 안전모를 착용한 사람은 4명이었다. 그나마 3명은 음식배달원이었고, 나머지 1명은 개인 자가용 킥보드를 타는 사람이었다. 보도가 아닌 곳을 다니는 킥보드 이용자는 1명도 없었다. 퇴근 인파 사이로 전동 킥보드가 휙휙 지나갔다. 킥보드 사용자를 붙잡고 바뀐 안전 규정을 아는지 물었다. 대부분은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차도를 달리자니 무섭고, 자전거 도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란다. 대부분 공유 킥보드 업체들은 사용자에게 헬멧을 제공하지 않는다.
전동 킥보드는 최근 4~5년 사이 서울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서울시에 따르면 지난 2018년 150대 수준이던 공유 전동 킥보드는 지난 3월 기준 4만2000여 대(14개 업체)까지 늘어났다. 지난해 코로나로 대외 활동이 줄면서 킥보드 이용자 성장세도 둔화되는 모습을 보였지만, 최근 사회적 거리 두기 해제 영향으로 다시 증가세로 돌아섰다. 공유 킥보드 업체들도 앞다퉈 신규 가입 이벤트, 할인 쿠폰 프로모션을 선보이며 사용자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문제는 킥보드 사용자가 다시 늘면서 도로 위 사고 위험도 높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경찰청에 따르면 2018년 117건이던 개인형 이동장치 사고 건수가 지난해엔 1735건으로 14배 늘었다. 현재 서울 인도 위에서 전동 킥보드가 가장 빠르게 달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내 전동 킥보드의 허용 최고 속도는 시속 25㎞. 인도에선 보행자·장애물 때문에 실제 달리는 속도는 그보다 낮은 시속 10~15㎞ 정도이지만, 이 정도도 1초 만에 3~4m를 지나갈 수 있다. 자전거보다 빠른 데다 킥보드는 순간 가속이 빠르기 때문에 사고 위험은 더 크다. 김규현 홍익대 교수(기계시스템디자인공학과)에 따르면 시속 25㎞로 운행하는 개인형 이동장치가 정지해 있는 보행자와 부딪히면 보행자의 중상 가능성이 95%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동 킥보드와 부딪힌 사고를 겪은 적 있는 최순찬씨는 “킥보드는 전기차처럼 갑자기 소리 없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아 더 놀란다”고 했다.
법 개정 이후 안전모 미착용, 2인 이상 탑승 금지 규정을 위반한 사용자는 20만원 이하의 범칙금을 내야 한다. 하지만 실제 길 위에서 순식간에 사라지는 킥보드를 단속하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경찰 관계자는 “독일, 프랑스 등 일부 유럽 국가들은 전동 킥보드의 최고 운행 속도를 시속 20㎞로 제한한다”며 “프랑스 파리의 경우 유동 인구가 많은 시내 지역에선 별도로 슬로존(slow zone)을 지정해 시속 10㎞로 속도 제한을 더 강하게 하고 있다”고 했다.
택시 안 잡히자 음주 킥보드
최근 사회적 거리 두기 해제로 회식 자리가 늘어나면서 킥보드 음주 운전도 늘고 있다. 심야 시간 택시 탑승이 어려워지자 근처 인도에 세워진 전동 킥보드를 타고 귀가를 시도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경찰은 이달부터 자동차뿐 아니라 전동 킥보드, 배달 오토바이까지 대상을 넓혀 음주 운전 집중 단속을 하고 있다. 전동 킥보드를 포함한 개인형 이동장치 탑승자의 음주운전은 지난해 5월 법 시행 이후 같은 해 12월까지 2589건이 적발됐는데 업계에선 실제론 이보다 2~3배 더 많을 것으로 추정한다. 경찰 관계자는 “자동차와 달리 킥보드는 경찰이 보이면 길을 돌려 피하기 쉽기 때문에 음주 단속이 가장 어렵다”며 “단속을 피하려 갑자기 방향을 트는 과정에서 충돌 사고도 일어난다”고 했다.
킥보드 운행 대수가 크게 늘면서 주정차 문제도 대두되고 있다. 공유 전동 킥보드는 공유 자전거와 달리 별도 거치대가 없어 인도 곳곳에 아무렇지 않게 방치되는 경우가 많다. 업체별로 지정 주차 구역에 킥보드를 반납하면 운행료를 할인해주며 인센티브를 주고 있지만, 킥보드 주차가 금지된 한강 공원 등에 버려지는 경우는 줄지 않고 있다. 회사원 김성훈씨는 “지난달 출근 길에 회사 앞 주차 자리에 자동차를 주차하려는데 킥보드 5개가 세워져 있어 1대당 20kg 나가는 킥보드를 직접 들어 옮기느라 진땀을 뺐다”고 했다.
서울시는 부정 주차에 대한 시민 민원이 늘자 지하철 출구·횡단보도 주변, 점자 블록 위 등 주차 금지 구역을 정하고 위반 시 방치된 킥보드를 견인하거나 운영 업체를 통해 수거하도록 하고 있다. 일부 업체는 누적 견인 비용이 수억원 수준으로 불어나자 올 들어 불법 주정차 사용자에게 견인료를 부과하기 시작했다.
인프라 부족부터 해결돼야
일각에선 전동 킥보드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 문제가 단순히 이용자의 의식 부족 때문에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도 나온다. 전동 킥보드 시장이 짧은 시간에 폭발적으로 성장했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인프라가 부족하면서 문제가 발생한 영향도 있다는 것이다. 전동 킥보드는 법 개정에 따라 인도가 아닌 자전거 도로나 일반 차도에서 달릴 수 있는데, 자전거 전용 도로의 경우 서울 전체 도로의 3%에 불과하다. 자전거 도로의 76%는 인도의 일부 구획을 자전거 도로로 활용하는 ‘자전거·보행자 겸용 도로’ 형태다. 지난해 한국소비자원 조사에서 전동 킥보드 이용자의 69%는 운행이 금지된 보도를 이용한다고 답했다.
킥보드의 경우 자전거와 달리 주차 공간 인프라가 부족해 무리한 견인으로 공유 킥보드 업체 부담도 커지고 있다. 서울에서 킥보드 1대당 견인 비용은 경차와 같은 4만원이다. 공유 킥보드 업체 관계자는 “킥보드는 차보다 크기가 작아 일부 견인 업체들이 견인료 수입을 늘리기 위해 차도에 세워진 킥보드를 보면 직접 시에 신고하고 바로 견인하는 ‘셀프 견인’이 이뤄지고 있다”며 “서울시에 견인료를 낮춰달라고 요구한 상황”이라고 했다.
서울시의회 추승우 의원은 “새로운 교통수단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무조건 규제만 할 게 아니라 인프라 확충을 진지하게 고민할 때”라며 “상대적으로 보도가 넓은 지역에 한 차선을 킥보드 같은 개인 이동장치가 다닐 수 있는 길로 만들어 시범 운영해 보는 것도 방법”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