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주택가. 봄빛이 건물 외벽에 부딪혀 찬란하게 부서진다. 수직으로 떨어지는 장식이 각도에 따라 홀로그램처럼 다양한 색을 낸다. 단색화 한 편 같다. 한국이 낳은 단색화 거장 박서보(91)가 그의 아내, 아들 부부와 사는 집이다.

1층에 들어서니 못 보던 풍의 그림들이 걸려 있다. 낡은 대걸레와 나무 바가지, 이 빠진 그릇 등을 그린 정물화다. 그림에는 ‘sook(숙)’이라는 날인이 적혀 있다. 박서보의 아내 윤명숙(83)이 그린 그림들이다. 화가를 꿈꿨으나 박서보를 만나 평생을 아내이자 엄마로 살아온 윤명숙이 83세에 도전한 첫 전시에 걸었던 작품들이다. 그림 제작 연도는 1980년대에서 끊겼다가 2021년에 다시 이어진다. 박서보가 미안한 듯 말했다. “다 나 때문이지. 그래서 아내가 그림 그리는 캔버스는 내가 최고급 천으로 직접 메꿔줘요(웃음).”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 있는 기지재단은 박서보 부부의 자택과 전시장을 겸한 복합문화공간이다. 흐드러지게 핀 홍매화 나무 밑에 박서보·윤명숙 부부가 섰다. '단색화 거장' 남편은 "63년 지난 지금도, 아내가 자는 모습만 봐도 예쁘다"고 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도라지 위스키 청혼

박서보 그림은 요즘 억대를 호가하고 있지만, 그가 단색화를 시작할 때만 해도 모두가 ‘안 팔린다’며 외면했던 작품이다. 박서보와 윤명숙은 그때 만났다. 박서보는 안국동에서 ‘현대미술연구소’라는 화실을 운영했고, 윤명숙은 홍익대 미대 1학년에 갓 입학한 신입생이었다.

윤명숙(이하 윤) : “학교에서 전시회가 있었어요. 신입생도 작품을 내라고 하더라고요. 그때는 집에 그림 그릴 공간이 없으니깐 선생님 화실에 등록했죠. 오래 다닐 형편은 안 됐고, 한 달 정도 다니면서 전시에 낼 작품을 준비했어요. 그때 전 스무 살, 선생님은 스물여덟 살이었으니 나이 많은 아저씨? 하하! 그냥 선생님이었죠.”

박서보(이하 박) : “이건 아내도 모르는 건데, 제가 당시 졸업생 자격으로 입학식에 참석했어요. 그때 얼굴이 너무 예쁜 학생이 있어서 눈도장을 찍어 놨었죠.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제 작업실로 쑥 들어오는 거예요. 그때 제가 사다리 위에서 작업하고 있었는데 떨어질 뻔했어요. 운명이다 싶었죠.”

스승과 제자 사이, 연애는 어떻게 했을까.

윤 : “연애라고 할 것도 없었어요. 그냥 같이 커피 마시고, 차 마시고. 저만 사주신 건 아니었고 다 같이. 그런데 한 달 뒤 레슨이 끝나던 날, 비가 부슬부슬 왔어요. 그때 종로에 서서 마시는 조그만 위스키 바가 있었는데, 거기서 제가 처음 위스키를 한 잔 맛보고 취한 거예요. 그때 선생님이 갑자기 ‘결혼하자’고 하시길래, ‘네’라고 답했지요. 술 한 잔 때문에, 하하!”

박 : “그 위스키가 도라지 위스키라고 좋은 국산 술이에요. 저렴해도 목 넘김이 좋아요. 많이 마시면 머리가 뽀개지는 것 같긴 하지만.”

가장이 된 박서보. 그러나 집도 돈도 없었다. 취직도 어려웠다. 1954년 광주 육군보병학교에 입대해 장교 훈련을 받았지만, 육군이 모집 때 약속을 번복하고 수료생들을 현역으로 끌고 가려 하자 도망갔기 때문이다. 그때 이름도 박재홍에서 박서보로 바꾸고, 수염도 길게 길렀다. 1961년 정부를 상대로 한 집단소송에서 이길 때까지 도망자 신세였다.

박 : “생활비를 벌 수 있는 건 거의 다 했어요. 신문에 글 쓰고, 잡지에 그림 그리고. 안국동 연구소는 돈이 안 됐어요. 다들 집사람처럼 첫 달만 내고 나중에는 안 내거든. 그래도 그 연구소에서 윤명로, 이만익 등이 나왔지요.”

윤 : “결혼하고 4년 동안은 6개월마다 이사를 다녔어요. 처음으로 내 집이라고 장만한 곳이 신촌 철길 옆 무허가 집. 화물 기차가 하루에도 몇 번씩 연탄 가루를 휘날리며 지나가던 곳이에요. 작업실은 물론이고 캔버스나 물감 살 돈도 없었어요. 그렇게 아이 셋을 키웠지요.”

화가의 꿈을 포기한 데에 미련은 없었을까.

윤 : “자존감도 낮았고, 환경도 열악했어요. 6·25전쟁 후 부모님은 피란 갔다가 서울로 올라오지 못하고 청주에서 살고 있었어요. 여운형을 도왔다는 이유로 고문까지 당한 아버지는 제 학비 내줄 형편이 안 됐고요. 서울 살던 언니가 겨우 마련해, 한 학기 학비를 내줬어요. 전 서울 언니 집에 얹혀살고 있었고요. 해군이던 형부와 어린 나이에 사별하고 애 둘 딸린 과부가 된 언니는 하숙도 치고, 보따리 장사로 옷도 팔면서 돈을 모았어요. 전 그 옆에서 같이 보따리 들고 다니며 팔기도 했고요. 어떻게 나온 학비인지 아는 거죠. 그 돈으로 제가 공부할 만큼 재주가 있다고 느끼진 않았어요. 당시엔 어쩔 수 없이 결혼을 선택했지요.”

스승과 제자로 만났지만 "지금은 내가 진다"며 웃는 박서보 화백. 뒤에 걸린 그림은 아내 윤명숙의 작품이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가난한 화가의 아내

박서보는 1961년 프랑스 파리로 세계청년작가대회 초청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도망자 신세였던 그는 제대증이 없어 출국할 수가 없었다.

박 : “국방부 승인이 필요한데 방법이 있어야지. 무작정 병무과를 찾아갔어요. 그때 대위 하나 앉아 있는데 인상이 괜찮아요. 제가 다가가 ‘잠깐 이야기 좀 하자’고 했어요. 사정을 설명했더니 깜짝 놀라요. 자기 전화 한 통이면 바로 헌병이 와 날 잡아간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저보고 ‘재입대한다’는 각서를 쓰래요. 전 ‘정부가 사기 친 거다, 협조 못 한다’고 했더니 저녁에 만나재요. 당당한 모습에 매력을 느꼈다고. 그때 서울 플라자호텔 뒤 차이나타운에서 만났는데, 내가 이 사람 만난다고 3000원을 친구한테 빌려서 갔어요. 딱 둘이 소주와 어묵 먹고 나니 3000원이 나와요. 그 친구 덕에 파리를 갈 수 있었지요.”

윤 : “그때가 첫아들 첫돌을 치르자마자였어요. 혼자 있을 수 없어 아들 데리고 친정으로 내려왔는데, 어머니가 만삭인 거예요. 안 되겠다 싶어 시댁으로 갔지요. 남편이 유럽에 있는 동안 살겠다며 제 발로 시집살이를 들어간 거지요.”

박서보는 조금씩 화가로 명성을 얻었지만, 그림은 여전히 안 팔렸다.

박 : “1970년대는 동양화가 인기였어요. 먹물이 마르기도 전에 팔려나갈 때라 다들 많이 바꿨죠. 난 굶어 죽더라도 추상화를 계속하겠다고 했어요. 제일 친한 친구가 김창열이었는데, 그 친구의 물방울 그림은 전시만 했다 하면 팔렸지요. 너무 기쁘고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속으로는 힘들었죠.”

아내도 남편에게 ‘왜 안 팔리는 그림을 그리느냐’고 구박하지 않았다. 남편 자존심이 다치는 것이 싫었다.

윤 : “그때 전시회를 하면 아내들이 그림 파는 악역을 맡아야 했어요. 친인척도 부르고, 친구들도 부르고. 그런데 그림을 사 갈 때 화랑에서 정해준 가격이 있는데, 몇 명이 자기들 마음대로 그림 가격을 깎아서 ‘이것만 받아’ 하고 가져가 버려요. 그때 정말 상처를 받았어요. 저도 전데, 제 남편 그림을 자기들 마음대로 평가한 거잖아요.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전시회에 친구들을 안 불렀어요. 그림 사겠다고 전화해도 거절하고요. 그래서 지금도 보관 중인 그림이 많아요.”

아버지와 자식들 뒷바라지에 붓을 놔버린 엄마를 안타까워한 건 막내딸이었다.

윤 : “제가 40대에 붓을 완전히 놨어요. 도저히 애 셋 키우면서 그림을 못 그리겠더라고요. 붓을 놓고 욕심을 전혀 안 냈는데, 어느 날 딸이 연필 드로잉반에 등록해 놨대요. 그리다 보니 적성에 맞는 것 같아요. 한때 사실화가 유행인 적도 있었거든요. 그때 나한테 물감 사 줬으면, 내가 돈 벌어서 호강시켜 줬을 텐데.”

◇85세에 얻은 富… “쓸 일 없어”

박서보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건 2015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단색화전을 치르고 난 뒤다. 당시 해외 언론들은 유학하지 않은 토종 한국 미술인인 그를 ‘한국 현대미술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2016년에는 영국 런던 화이트 큐브에서 한국 작가 최초로 개인전을 열었다. 박서보는 “화이트 큐브에서 보낸 이메일이 스팸 함에 들어가 있어서 한 달 만에 확인했다. 하마터면 영영 못 볼 뻔했다”며 “그 화이트 큐브 전시 이후 그림이 팔리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박서보는 85세에 잘 팔리는 화가가 됐다.

박 : “아직도 실감이 안 나니깐 좋거나 한 것도 없어요. 사는 것도 크게 변화가 없어요. 아, 살고 있는 이 건물! 이건 작품이 팔려서 지을 수가 있었죠.”

윤 : “전 이 건물 지으면서 작품 수장고 만든 게 너무 좋아요. 그동안 안 팔리는 그림들 싸 들고 이사 갈 때마다 끌고 다니니깐 망가지기도 하고 곰팡이도 생기고, 그러면 제가 물걸레로 닦곤 했는데 이젠 안전하게 보관할 곳이 생겼으니.”

박 : “나이 들어 돈이 생기니 쓸 곳이 없어요. 먹는 걸 마음껏 먹겠어요? 여행을 마음껏 가겠어요? 자식들도 다 컸는데. 젊어서는 먹고살기 바빠서 남 생각을 못했어요. 2010년엔가 신세계백화점이랑 여성 옷과 액세서리 콜라보(협업)를 했는데, 그때 받은 돈 내가 어디다 쓰냐 해서 삼성의료원에 기증했어요. 눈 안 좋은 어린 환자들 개안시키는 데 쓰라고. 그다음에는 2019년에 대한민국예술원상을 받았는데 상금이 5000만원이래요. 그 돈은 가난한 예술가들 도와주라고 청년예술가생애첫지원(구 아르코청년예술가지원)에 기증했어요. 기분이 더 좋아요. 그런데 그림이 계속 팔려요. 내가 죽는 날까지 쓸 돈은 딱 정해져 있잖아요. 그래서 앞으로 버는 돈은 모두 사회 환원하고 후학들을 위한 상을 만들겠다고 결심한 거지요. 그래서 지난 2월에 광주비엔날레에 10만달러씩 10회, 100만달러(약 12억 8000만원)를 지원하기로 한 거예요. 그러면 대회 격도 높아지고, 젊은 작가들도 더 열심히 할 테니. 모교인 홍대에도 장학 재단을 만들었지요. 우선 45억원으로 출발하고, 앞으로 그림 계속 팔릴 때마다 거기에 넣으려고요. 일단 100억원을 목표로.”

스승과 제자로 시작한 관계, 그러나 박서보는 “지금은 내가 진다”며 웃었다.

박 : “자는 것만 봐도 귀여워요. 새벽에 화장실 가려고 깨는데, 이불을 발로 차면서 자요. 그것만 봐도 예뻐요. 집사람이 작년에 에세이 책을 낼 때 내가 인사말을 써주기로 했는데, 그때 단짝 친구인 김창열이 죽었어요. 도저히 무슨 글을 쓸 심정이 안 되더라고요. 이 사람도 재촉을 안 해요. 그냥 책이 책상에 올려져 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집사람은 자고, 전 아직 안 자고 있었는데, 갑자기 ‘나한테 와서 평생 고생하고 저 책 한 권 썼는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책상에 앉아 종이에 생각나는 대로 단숨에 쓰고 올려놨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보더니 씩 웃더라고요.”

그렇게 그가 쓴 글은 이렇다.

“벌써 63년이 흘렀네. 잘 다니던 미술대학도 그만두고, 빈털터리인 내게 시집와서 그간 고생 많이 했구려. 현대미술 운동 한답시고 가정을 알뜰히 보살피지 못한 나 대신, 아이들 대학 갈 때마다 부엌에서 새우잠 자곤 하던 당신… 여전히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