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준수 선생이 제주 비자림로 30만평에 조성한 숲길. /김두규 교수 제공

경험하지 않으면 공감할 수 없다. 백석의 시를 좋아하지만, 무엇인가 늘 거리감이 있었다. 그의 ‘자작나무[白樺]’도 그렇다.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도 자작나무다/...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북방의 어느 산골을 묘사한 것은 알겠으나, 남방에서 자란 필자로서는 자작나무를 본 일이 없었다.

이론적으로 풍수는 나무를 서열화한다. 꽃 중의 왕[花王]이 모란이라면, 나무[木]가운데 공작[公]의 지위를 갖는 것은 소나무[松]이다. 그래서 묘지와 주택 정원수로 소나무가 으뜸이라고 풍수책은 가르친다. 이게 틀릴 수 있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이북 출신 기업인들은 소나무보다 잣나무[栢]를 더 선호한다. 시베리아, 만주, 강원도에서는 자작나무를 선호한다.

필자가 자작나무 숲을 보며 백석의 시를 이해한 것도, 자작나무 숲 풍수를 체득한 것도 최근의 일이다. 최기순 자연다큐멘터리 감독을 통해서이다. 최 감독은 ‘시베리아 호랑이 촬영’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영하 30도의 추운 겨울, 15m 높이 나무에 텐트를 치고 열흘을 기다려 호랑이를 촬영했다. 그 열흘은 일반인의 열흘이 아니었다. 호랑이에게 인간의 냄새와 소리를 전달하지 않기 위하여 식사에서 배변까지 초인적 절제를 해야 했다. 그렇게 러시아에서 10년 넘게 호랑이를 찍고, 표범을 찍고, 숲을 찍었다. 호랑이와 표범을 알게 되었고, 숲 또한 알아갔다. 사람의 발자국이 대지를 흔들면, 곤충과 짐승들은 일시에 사방으로 흩어진다. 한참을 기다리면 흩어진 그들이 다시 사람에게 다가온다. 호랑이도 표범도 그렇게 그에게 다가왔다. 계절마다 숲의 소리와 색, 그리고 냄새가 다르다.

20년 전 최 감독은 홍천 화전민이 살다가 간 콩밭을 사들였다. 그곳에 자작나무 숲을 만들고 ‘숲속의 작은 집’을 지었다. 그 집 한편에 ‘나는 숲이다(I am the forest)’라고 써붙였다. 진정 그는 숲이 되었다.

유학 시절 필자의 전공 주제어 가운데 하나가 ‘문학 속의 숲’이었다. 19세기 산업화와 잦은 전쟁으로 인류와 숲(자연) 사이에 대립 관계가 형성됐다. 숲과 인간 사이에 ‘의미론적 경계선(Semantische Grenze)’이 그어졌다. 아예 그 경계선을 넘으려 하지 않은 자도 있었고, 넘을까 말까 망설이는 자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늘 숲은 고향이었다. 철학자 하이데거에게도 숲은 고향이었다. ‘숲길(Holzweg)’은 그를 진리로 인도하는 길이었다. 그런데 숲으로 대변되는 고향은 파괴되었고, 신들은 떠나버렸다. ‘고향 상실(Heimatlosigkeit)’의 시대를 하이데거는 화두로 삼았다. 지금 소멸 위기를 맞고 있는 농촌 지자체가 관광객 유치 명분으로 산하를 에너지 자원(대형축사·태양광발전시설)이나 관광 자원(구름다리·현수교·전망대·잔도)으로 전락시킨다. 분명 그러한 행위는 대지를 파괴하고 고향 상실을 촉발시키는 행위일 뿐이다.

하이데거 말고도 독일의 천재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도 숲은 고향이자 조국이었다. 대학생 시절부터 숲길을 걸으며 가설을 세우고 동료들과 토론으로 그의 이론을 완성했다. 숲(고향)은 그에게 “자신을 성장시키고 능률적으로 일할 수 있는 곳”이었다. 히틀러 치하에서도 끝내 망명을 하지 않는 이유였다.

제주에서 또 다른 숲을 만드는 신준수 선생을 만났다. 제주 비자림로 30만평에 20년째 숲을 조성 중이다. 퇴비도 농약도 치지 않는다. 가끔 잡목을 제거하거나 무성한 가지를 쳐낼 뿐이다. 사이사이 이끼 낀 ‘숲길’을 만들었다. 필자 부부가 가끔 찾는다. 보름 전 그 숲길을 걸으며 쑥을 캐는 이인호 전 러시아 대사 일행을 조우하였다.

지금은 분명 ‘고향 상실’의 시대이다. ‘숲’이 필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