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소(활자 주조를 관장하는 곳)가 완성되면 다시 들어와 교서(교정 및 수정 작업을 하는 관직)를 맡아달라.”
1800년 6월 12일 늦은 밤,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은 서울 명동 집 ‘죽난서옥’에서 정조의 부탁과 함께 그가 보낸 책 ‘한서선(漢書選)’ 열 권을 받는다. 노론의 공격으로 탄핵받아 스스로 관직을 떠난 다산을 배려해 정조가 보낸 선물이었다. 마음을 비우고 고향에 내려가려던 다산은 정조의 뜻에 따라 서울에 머물기로 한다. 하지만 다산과 함께 개혁을 꿈꿨던 정조는 마지막 선물을 보내고 난 뒤 6월 28일 승하한다. 더는 서울에 머물 이유가 없어진 정약용은 고향인 쇠내, 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로 내려간다. 귀향한 그는 자신의 생가 사랑채의 당호(堂號)를 여유(與猶)라 짓는다. ‘겨울 냇물을 건너는 듯[與] 머뭇머뭇하노라, 사방을 두려워하는 듯[猶] 조심조심하노라’. 즉 ‘머뭇거리고 조심한다’는 다짐을 담아 여유당에 머문 것도 잠시, 다시 1년 뒤 18년의 길고 긴 귀양길에 오른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나는 다산이오’의 저자인 김형섭 남양주시립박물관 학예사는 “강진은 다산이 학자로서 면모를 발휘한 곳이라면, 지금의 여유당 일대는 다산이 태어나 유년을 보내고, 해배(解配)돼 돌아와 생을 마감한 의미가 깊은 곳”이라며 “정약용의 인간적인 면모와 일화들을 만날 수 있다”고 했다.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제자 황상에게 ‘붓을 놓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던 정약용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다양한 분야에서, 가장 많은 어록을 남긴 스승이기도 하다.
시대를 초월한 가르침을 만나러 남양주 정약용유적지를 찾았다. 때마침 다산생태공원 등 일대에선 이달 말까지 봄 ‘여유당 야행(與猶堂 夜行)’이 열린다. 정약용이 동양인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등재된 지 10주년을 맞는 해이기도 하다. 봄밤, 여유당 안으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정약용 생가 ‘여유당’ 밤 산책
한낮을 채우던 상춘객 소리가 잦아들고 어둠이 내린 정약용유적지엔 풀벌레 소리만 가득했다. 담장 아래쪽으로는 다산이 좋아했다는 수국 조명에 하나둘 불이 켜지고 마당엔 달빛이 내려앉았다. 스마트폰을 꺼내 유적지 입구 안내판의 QR 코드를 찍으니 오디오 가이드 속에선 “마재마을, 정약용 유적지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배우 정해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재마을은 능내리 일대를 일컫는 옛 지명. 오디오 가이드의 재생 버튼을 누르고 느릿느릿 밤 산책을 시작했다.
첫 번째 코스는 다산의 생가이자 생을 마감한 곳인 여유당이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유실된 것을 남아있던 집 사진 등을 토대로 1986년 복원했다. 생가를 중심으로 한 유적지는 현재까지 단계적으로 정비해오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로 구성된 ‘ㅁ’ 자 집은 다소 어둡긴 하나 사색을 방해하는 빛 공해, 소음 하나 없다. 여유당 편액이 걸린 사랑채 앞 마루에 잠시 걸터앉으니 도심의 소음에 찌들어 있던 귀가 또렷해지는 듯하다.
여유당을 등진 언덕엔 다산의 든든한 내조자이자 학문의 후원자이기도 했던 부인 홍혜완과 다산의 합장묘가 있다. 다산이 7살 때 지었다는 시 한 수를 시작으로 정약용의 업적을 들으며 언덕에 오르면 아담하고 단아한 묘소가 나온다. 실학적 삶을 몸소 실천해온 다산은 75세이던 회혼일(60주년 결혼기념일) 아침, 가족과 제자들이 모인 가운데 ‘회근시’를 남기고 눈을 감는다. 묘소는 “지관(地官·풍수를 보는 사람)을 부르지 말고 집 뒷동산에 묻어라. 묘 앞에 비석과 망주 등을 지나치게 세우지 말라” 했던 다산의 생전 당부에 따라 자리 잡은 곳이다. 김 학예사는 “묘소는 을축년 대홍수 때 마재마을 정약용 관련 유적 중 유일하게 유실되지 않은 유적”이라고 했다. 묘소에 서면 풀숲 너머 멀리 한강이 내려다보인다. 선생의 묘소를 등지고 다시 오른쪽 계단으로 내려오면 다산을 추모하는 사당인 ‘문도사’와 다산이 회갑연 때 직접 지은 ‘자찬묘지명’이 나온다. 자찬묘지명에 호는 ‘다산’이 아닌 ‘사암(俟庵)’으로 기록돼 있다. 다산 자신이 직접 쓴 호 ‘사암’은 중용의 구절을 인용한 것으로 ‘훗날 자신의 뜻을 공감해주기를 기다린다’는 뜻. 다산, 사암을 비롯해 정약용의 호는 귀농, 삼미자, 여유당, 열수 등 10여 개에 이른다.
유적지 내 다산기념관에선 아홉 명의 자식을 낳아 역병 등으로 여섯을 떠나 보낸 뒤 ‘마과회통’을 편찬하게 된 이야기, 배에 방을 만들고 살림을 갖춰 물(열수)에 떠 있는 집을 만들어 유유자적 삶을 꿈꿨던 이야기, 부인 홍씨가 유배 간 남편에게 보낸 노을빛 치마 하피(霞帔·신부가 입는 예복)를 잘라 아들들에게 쓴 편지 책 ‘하피첩(霞帔帖)’ 이야기 등을 비롯해 개혁가로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다산 관련 자료들을 살펴볼 수 있다. 나란히 있는 다산문화관에선 하피첩 등을 모티프로 한 공공 미술 작품이 기다린다. 여유당 야행이 진행되는 5월 한 달간 정약용기념관, 정약용문화관도 매일 오후 8시까지 개방한다. 야행 행사라 하더라도 유적지 야외 경관 조명이 다소 어둡게 느껴질 수 있다. 계단을 올라야 하는 묘소나 유적지 인근 실학박물관은 해지기 전 먼저 둘러보는 것도 방법이다.
◇다산의 ‘상심낙사’ 있는 다산생태공원
정약용유적지 정문으로 나와 좁다란 오솔길을 따라가면 여유당 야행 코스인 다산생태공원과 만난다. ‘마음에 드는 곳 만나면 앉아서 쉬다 다시 오르자’ ‘여보게 달을 보고 술을 마시고 싶으면 달이 뜬 오늘 밤을 놓치지 말게’ ‘바람이 그르고 나는 옳다 따지지 말자’ 등 다산의 시를 담은 조명이 있다. 오솔길을 벗어나 ‘한강전망대’에 서면 마재마을 앞을 유유히 흐르는 한강과 마주한다. 정약용은 한강을 ‘열수’라 불렀다. 나주 정씨의 삶의 터전이자 관직으로 나갈 때, 귀향할 때, 유배 가고 해배돼 돌아오는 길에도 열수를 거쳤다. 을축년 대홍수 때 강이 범람하고, 6·25 전쟁 때 직격탄을 맞으며 마을의 옛 모습은 많이 사라졌지만, 호젓함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듯하다. 찰랑찰랑 강물 소리를 들으며 달빛에 의지해 야생화 핀 산책로를 따라 거닐면 잡념은 사라지고, 한숨도 어느새 잦아든다.
한때 ‘불멸의 데이트 성지’로 불릴 만큼 인기였던 이 길은 사색의 길이 된 지 오래다. 김 학예사는 이 길을 두고 “누구나 철학자가 되는 길, 마음을 비우는 길”이라고 표현했다. “도심에선 만들어진 자연을 소비하지만, 이곳에선 비우고, 성찰하게 된다”고. 도심에서 차로 30분 거리인데도 적막과 고요가 사색을 부추긴다. 사색의 길은 ‘경기옛길’ 평해길 10구간 중에서도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제3길, 정약용길(다산길·마재옛길)의 백미다. 정약용길은 ‘두미협’이라 불렸던 팔당 부근 팔당역에서 시작해 팔당댐, 능내 연꽃 마을, 정약용유적지(생태공원), 능내역 폐역을 지나 운길산 역까지 이어지는 12.9km 강변길이다. 다산이 쇠내의 자연 속에 어우러져 생활하는 즐거움을 표현한 ‘상심낙사(賞心樂事·마음으로 감상하는 즐거운 일)’를 느낄 수 있다. 다산생태공원 사색의 길에서 은은한 불빛의 강변 조명, 정자 쉼터를 차례로 지나면 강변에 불시착한 듯 자리 잡은 커다란 보름달 조명과 만난다. 야행에 마침표를 찍는 포토존이다. 김선미 남양주시 정약용콘텐츠팀장은 “정약용유적지는 지난해 코로나가 한창 기승을 부릴 때에도 연 방문객 15만명을 기록했다”며 “요즘엔 서울 및 수도권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정약용의 뜻을 되새기려는 탐방객들이 온다”고 했다.
◇조선 대학자의 해방구, 수종사
공간에 대한 이해가 남달랐던 다산은 공부하다가도 지도를 들고 여행 다니기를 좋아했다. 부인 홍씨가 정성스레 싸준 도시락을 들고 세검정이나 북한산 등을 찾아 동행한 제자들과 토론을 펼치기도 했다. 마재마을에서 차로 10여 분 거리에 있는 운길산 수종사와 경기도 광주 천진암은 다산에겐 숨구멍과 같은 곳이었다. 김 학예사는 “규장각의 엘리트였던 다산에게 수종사와 천진암은 아마도 사회생활의 해방구이자 안식처 같은 곳이었을 것”이라 표현했다.
어릴 적부터 책을 지게에 지고 올라가 수종사에서 학문을 닦았고, 세 번의 낙방 후 네 번째 과거에 급제해 수종사에서 형제, 동무들과 기쁨을 함께했으니 다산의 발자취를 이야기할 때 수종사를 지나칠 수 없다. 수종사는 세조 때 처음 지어져 현재까지 비교적 온전히 보전되고 있다. 세조가 수종사를 건립하며 함께 만든 보물 ‘수종사팔각오층석탑’, 수종사의 기원이 된 범종과 은행나무가 볼거리다. 다산은 유배지에서도 특히 수종사를 그리워했다. 수종사는 다산뿐 아니라 초의선사 등 차의 대가, 시인 묵객들과도 인연이 깊다. 수종사 경내 다실인 삼정헌에선 옛사람들처럼 두물머리를 내려다보며 차 한잔의 여유를 즐길 수 있다. 무료 운영 공간으로 누구든 조용히 차를 마신 후 사용한 다기를 정돈하고 가면 된다. 대개 예불 시간인 오전 10시 30분~정오를 제외하고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개방한다.
◇남한강 자전거 길 따라 ‘두미협’으로
정약용유적지 부근에서 마재성지 앞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능내역 폐역과 만난다. 정약용길에서 빠질 수 없는 코스다. 1956년 중앙선 능내역으로 업무를 시작해 2008년 12월 폐역됐다. 세월에 곱게 늙어간 폐역의 감성을 그대로 간직한 역사는 정약용길의 인기 포토존이다. 역사 주변으로 서너 군데 자전거 대여소가 있어 자전거를 빌려(1시간, 4000원~1만원) 타고 정약용길 일부를 신나게 달려볼 수 있다.
동쪽으로는 양수리를 거쳐 북한강 철교까지 이어 달릴 수 있고, 서쪽으로는 봉안터널과 팔당을 거쳐 한강까지 이어진다. 팔당은 다산이 ‘서학’을 처음 접했던 곳이기도 하다. 팔당역 부근 남양주시립박물관에는 실학자들의 역학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어둑어둑해져 야행을 마칠 무렵, 여유당전서 ‘다산화사’의 한 구절이 귓가에 맴돌았다. ‘꽃이 피어야만 국화가 어여쁜 것 아니라 본래 줄기도, 잎새도 너무나 어여쁘다’.
[ 향긋한 미나리전, 시원한 콩국수··· ‘봄 한 상’ 드세요 ]
소박함 맛보는 정약용유적지 주변 전집&빵집
‘도시락 밥에 표주박 물이면 족하다’던 다산의 밥상엔 호박을 송송 썰어 동그랗게 부쳐낸 호박전이 자주 올랐다. 이따금 집 앞 강에서 잡은 물고기로 끓인 탕이나 농어회도 올랐지만, 사치를 경계한 실학자의 밥상은 소박하기 그지없었다. 호박전은 지금도 다산 종가에서 즐겨 해먹는 음식 중 하나. 정약용유적지 주변에 호박전 맛집은 없지만, 전을 맛볼 수 있는 편안한 분위기의 전집은 여러 곳 있다.
능내리 역전집은 부추전(7000·1만원), 감자전(1만2000원), 김치전(1만원), 도토리묵(1만2000원), 두부김치(5000원·1만원) 등을 파는 ‘가맥집’이다. 맥주보다는 막걸리나 음료수를 곁들이는 이들이 많다. 부추전이 베스트셀러다. 감자전은 ‘해시브라운’처럼 감자를 잘게 썰어 노릇노릇하게 구워낸 ‘서양식 감자전’이다. 오리집 등으로 운영해오다 2011년 남한강 자전거길 개통과 함께 간단한 스낵을 팔기 시작하면서 자전거 동호인들 사이 ‘참새 방앗간’이 된 곳이다. 간단히 먹을 만한 잔치국수(5000원), 비빔국수(6000원)와 함께 시원한 콩국수(8000원)도 인기다.
능내역 폐역에서 자전거길 따라 동쪽으로 좀 더 가면 돌미나리집이 나온다. 미나리전·묵사발·묵 무침(모두 1만원) 등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미나리전을 주문하면 초장과 함께 생미나리를 서비스로 내준다. 예봉산 등산로 초입에 있는 자연애는 한방오리백숙이 전문이지만 미나리를 아낌없이 넣은 밭미나리전(1만원)이 유명하다. 싱싱한 밭 미나리에 밀가루를 살짝 묻히기만 해 커다랗게 부쳐낸다. 부추전(1만원), 방풍나물전(1만2000원)이나 계절 메뉴인 쑥전(1민2000원), 들기름두부전도 맛볼 수 있다. 식사 메뉴로 생곤드레밥과 된장찌개(9000원)도 많이 찾는다. 생미나리즙이나 미나리막걸리는 운이 좋아야 맛볼 수 있다.
식후 주전부리도 그냥 지나치기에 아쉽다. 인근 와부읍엔 추억의 도넛 맛집인 면포도궁 팔당본점이 있다. 찹쌀 도넛, 야채빵도 맛있지만, 오후 정해진 시간에 한정판으로 나오는 맘모스빵이나 카스텔라를 노리는 이들이 많다. 조안면 고당은 빵지 순례 코스 중 하나로 한옥 마당, 방 한칸을 차지하고 앉아 음료와 함께 시루떡, 상큼한 크림치즈타르트, 크림팡도르 등을 맛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