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를 국민에게 돌려준다며 용산으로 갔는데, 왜 국민 관람을 막으면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만찬을 합니까.”
국립중앙박물관이 오는 21일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공식 만찬 장소로 낙점되고, 당일 임시 휴관이 결정되면서 관람객들 항의가 빗발치고 있다. 대통령실은 21일 오후 7시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만찬에 행정부·의회·경제계·학계·스포츠계 등 우리 측 인사 50여 명과 미국 측 30여 명이 함께한다고 18일 밝혔다. 박물관은 이날 홈페이지에 “21일 국가 주요 행사로 인해 기획전시실을 제외한 모든 시설을 임시 휴관한다”는 공지를 올렸다. 고(故)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전이 열리는 기획전시실도 오후 2시 30분까지만 입장 가능하고 오후 4시 30분부터는 문을 닫는다.
◇관람 제한하고 만찬이라니?
주말을 이용해 박물관 나들이를 계획한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벼르다 겨우 잡은 일정인데 갑자기 이렇게 통보하면 되느냐” “멀쩡한 청와대 영빈관 놔두고 왜 박물관에서 밥을 먹느냐”며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특히 ‘어느 수집가의 초대-고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전’과 한·멕시코 수교 60주년 기념 특별전 ‘아스테카, 태양을 움직인 사람들’은 온라인 예매가 빨리 매진되는 데다, 토요일은 관람객이 가장 많이 몰려 오후 9시까지 야간 개방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이날 오후 5시 이건희 특별전을 예매했다는 김모씨는 “작년에는 코로나 때문에 예매 경쟁이 치열해 못 봤고, 올해 1주년 기념전은 꼭 보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휴관 통보를 받아서 화가 난다”며 “국가 행사가 열린다고 전시실 문까지 닫는 건 국민의 문화향유권 침해 아니냐”고 했다.
박물관 측은 “21일 오후 3시 이후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관람권을 예매한 분들은 당일 오후 2시 30분 이전이나 22일 이후 전시 폐막일인 8월 28일까지 언제든 원하는 시간에 예약 없이 관람할 수 있다”며 “불편을 끼쳐드려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이에 대해 원로 문화계 인사 A씨는 “용산 시대가 열렸다고 반겼는데, 다른 외빈이 올 때마다 집무실과 가까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만찬을 열고 그때마다 휴관을 할 거냐”며 “매우 안 좋은 선례를 남겨 우려된다”고 말했다.
◇“박물관에서 취식 안 돼” vs “우리 문화 알릴 기회”
박물관에서 만찬을 연 전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명박 정부 시절이던 2010년 11월 G20 정상회의 환영만찬이 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 열렸고, 2012년 3월 김윤옥 여사가 핵안보정상회의에 참가한 각국 정상 배우자들을 초대해 박물관 전시실에서 만찬을 했다. 당시에도 “유물 보호를 위해 빛과 온도, 습도 등을 엄격히 통제하는 전시실에서 냄새 피우면서 밥을 먹으면 안 된다”는 비판 여론이 일었다.
하지만 당시 박물관 측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정상 배우자 행사 장소로) 선정된 것은 우리나라 유구한 역사와 아름다운 문화를 알릴 수 있는 최적의 장소로 판단됐기 때문”이라며 “세계 주요 박물관에서도 전시 공간을 활용해 만찬 등을 포함한 다양한 행사가 이뤄지고 있다”고 반박한 바 있다. 2014년 영국 윌리엄 왕세손과 케이트 미들턴 왕세손비는 미국 뉴욕 방문 당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열린 모교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 600주년 기념 만찬에 참석했고, 2018년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은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서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와 그림을 감상한 후 만찬을 함께했다.
오히려 국립박물관 대표 브랜드 유물을 자연스럽게 해외에 알릴 호재가 될 것이라는 기대도 있다. 양국 정상이 만찬 전후에 국보 금동반가사유상 두 점이 전시된 ‘사유의 방’을 관람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국립박물관 관계자는 “영국 대영박물관 홈페이지를 보면 많은 전시실을 후원자들에게 ‘드링크 리셉션’ ‘디너 리셉션’ 등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며 “다만 국립중앙박물관은 상업적 성격을 갖지 않기 때문에 그런 서비스를 제공하지는 않지만 국가 기관이니까 국가적 큰 행사에는 지원을 하는 게 맞는다”고 했다.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이번 만찬은 전시장이 아니라 상설 전시관 으뜸홀(로비)에서 열릴 것으로 보인다. 전시 공간은 물론 1층 가운데 뻗은 ‘역사의 길’ 쪽으로는 아예 진입하지 않는다는 것. 익명을 요구한 역사학계 교수는 “국립박물관에서 만찬을 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관람을 제한하고’ 만찬하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