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고집과 기벽(奇癖)에 관한 일화는 예부터 많지만, ‘고집’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 사람만큼 고집 센 예술가가 또 있을까 싶다. 열여섯 살 때, 그림 그리기를 반대한 대찬 고모에게 빗자루 3개가 부러질 때까지 맞으면서도, 울면서 발로 그림을 그렸다는 화가, 장욱진(1917~1990)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저 아이는 바보 아니면 성자일 거야”
장욱진의 고향은 충청남도 연기군이다. 상당한 지주 집안에다 교육열이 높기로 소문난 가문이었다. 자녀 교육을 위해 온 가족이 상경하여, 장욱진은 경성사범부속보통학교(현 서울대 부설 초등학교)에 다녔다. 초등학교에서 이미 유화를 접한 후, 당시 공부 잘하는 학생만 들어간 공립 경성제2고등보통학교에 당당히 입학했다.
불행히도 장욱진의 부친은 상경한 이듬해 장티푸스로 숨졌기 때문에, 장욱진의 서울 생활은 어머니와 엄한 고모의 보호 아래 이루어졌다. 그런데 평소 조용하고 얌전하며 혼자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던 평범한 학생 장욱진이 고보 3학년 때 한바탕 소동을 일으켰다. 조선 역사를 왜곡해서 가르친 일본인 역사 선생에게 항의한 장욱진 포함 학생들이 부당하게 처벌을 받고, 의자를 드는 벌을 섰다. 다른 학생들은 도저히 오랜 시간 벌서기를 버티지 못해 슬그머니 의자를 내려놓았건만, 장욱진은 혼자 끝까지 초인적 ‘고집’으로 의자를 들고 있었다. 선생님이 드디어 의자를 내려놓으라고 말하자, 장욱진은 그 의자를 냅다 일본인 선생에게 내리치고 학교를 자퇴해 버렸다.
그러고는 집에 와서 그림만 그리고 있으니, 호랑이 고모의 억장이 무너질 노릇이었던 거다. 고모의 반대에도 밤에 몰래 그림을 그리다가 들킨 장욱진이 빗자루로 맞은 것이 이 무렵이다. 그런데도 끝끝내 장욱진의 고집을 꺾지 못한 고모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 아이는 바보 아니면 성자일 거야.”
◇ 화가의 길, 술과 사투가 시작되다
‘성자’의 길에 더 가까워지려는 것이었을까? 장욱진은 이 사건 후 성홍열에 걸려 요양차 수덕사에 맡겨졌다. 평소 고모가 극진히 모신 수덕사 만공선사가 어린 장욱진을 6개월간 돌보게 된다. 1934년경 일이다. 이곳에서 장욱진은 전설적 여성 화가 나혜석도 만났다. 일엽 스님이 있는 수덕사에, 이혼 후 방황하던 나혜석이 잠시 와 있던 시기와 겹친 것이다. 나혜석은 수덕사에서 허구한 날 그림을 그리는 장욱진을 격려해 주고 같이 스케치도 하면서, “나보다 더 잘 그린다”고 칭찬하기도 했단다. 장욱진은 수덕사에서 평온을 되찾았다.
양정고보에 편입한 그는 조선일보 주최 ‘전국학생미전’에서 중등부 특선상을 받았다. 그 특선작이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 컬렉션 전시에 나와 있는 작품 ‘공기놀이’다. 자신이 살던 한옥을 배경으로, 집 한편에서 공기놀이에 열중한 아이들의 천진무구한 일상 한 컷을 포착한 그림이다. 이 작품의 수상으로 장욱진은 처음 고모의 인정을 받게 되었고, 상금 100원으로 고모에게 비단 치마를 해주었다. 이후 장욱진은 도쿄 제국미술학교에서 유학하며 본격적인 화가의 길에 들어섰다.
그러나 길을 가는 것, 인생을 사는 것이 참 쉽지 않다. 언론인 이관구의 주선으로 국사학자 이병도의 장녀 이순경(1920~ )과 결혼식을 올리고, 대학도 졸업하고, 자녀들도 낳고, 국립박물관에서 직장도 다녔다. 비교적 순탄한가 싶더니 1950년 6·25전쟁이 터졌다. 장욱진은 지극히 맑고 순수하며, 실은 매우 여리고 섬세한 내면의 소유자다. 보통 세상 사람들이 중히 여기는 ‘체면’과 ‘위선’을 그냥 싫어한 게 아니라 철저하게 증오한 인물이다. 세상과 타협하기가 원천적으로 어려웠다고나 할까. 그런 인물에게 전쟁이 가져온 거칠고 야만적인 세상은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비슷한 시기 이중섭이 그랬던 것처럼, 장욱진도 그저 무능한 가장일 수밖에 없었다. 처자식이 부산 피란지 큰댁에 얹혀 지내는 동안, 장욱진은 자신을 누일 공간이라도 줄여보려 혼자 야외 취침하는 날이 많았다. 먹을 게 없어 굶는 대신 술로 허기를 채우고 세상 잊기가 장욱진의 일과가 되었다. “초조와 불안은 나를 괴롭혔고 자신을 자학으로 몰아가게끔 되었으니, 소주병(한 되들이)을 들고 용두산을 새벽부터 헤매던 때가 그때이다.” 평생 장욱진을 따라다닌 술과의 사투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전쟁 중에 그린 노란 자화상
1951년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장욱진은 조부모가 계신 충청도 고향에서 일시적으로 지내게 된다. 오랜 기간 붓을 들지 못했던 그는 전쟁 중에도 찬란하게 빛나던 고향 산천을 바라보며 삶의 원기를 회복한다. 어린 시절 수덕사에서 삶의 위로를 받았던 것처럼 말이다. 이때 탄생한 작품이 ‘자화상’이다. 풍요로운 누런 들녘을 배경으로 저 멀리서부터 빨간 길이 길게 나 있다. 그 길을 아까부터 걸었다가 이제 화면 앞에 다다른, 앙상한 몸매에 비현실적인 프록코트를 입고 서 있는 인물이 화가 자신이다. 전쟁기에 태어난 일종의 ‘기적’ 같은 이 작품을 실제로 보면, 가장 감동을 주는 포인트가 의외로 작품 ‘크기’에 있다. 세로 14.8cm, 가로 10.8cm, 딱 손바닥만 한 작고 여린 작품이다. 전쟁 통에 시골에서 캔버스를 구할 수도 없었을 테고, 갱지에다 그린 나머지, 바람에 누운 노란 벼의 물결 하나하나가 종이에 스민 흔적조차 생생하다.
“이 그림은 대자연의 완전 고독 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 그때의 내 모습이다. 하늘에 오색구름이 찬양하고 좌우로는 자연 속에 나 홀로 걸어오고 있지만, 공중에선 새들이 나를 따르고 길에는 강아지가 나를 따른다. 완전 고독은 외롭지 않다.”
‘그냥 고독’은 외롭지만, ‘완전 고독’은 외롭지가 않다. 고독은 어찌 보면 타인과의 비교에 따른 상대적 개념인데, 그러한 세속적 비교에서 벗어나면 오히려 완전한 고독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완전 고독’은 어쩌면 ‘자유’의 다른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경지에 올랐을 때, 인간과는 소통에 불편을 느꼈던 자아가 ‘자연’과는 풍만한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다. 들녘은 때맞춰 노랗게 흔들리고, 개와 새는 자신을 따르지 않는가.
◇“숫돌에 몸을 가는 것 같은 소모”
그렇게 장욱진은 철저히 자신을 완전 고독 상태로 몰아갔다. 발가벗은 것 같은 완전한 순수와 자유의 상태가 될 때만 붓을 들었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와 그림을 그리지 않는 행위가 그렇게 반복적으로 왔다 갔다 하며 평생을 살아냈다. 그의 생을 유지해준 보살 같은 아내 말을 들어보자. “장 선생님은 도와드릴 건 아무것도 없어요. 혼자 하시고 싶어 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둔 것뿐이에요. 무엇보다 괴로울 때는 그분이 작품이 안되고 내부의 갈등이 심해지면 열흘이고 스무 날이고 꼬박 술만 드실 때입니다. 그때는 소금조차도 한번 안 찍어 잡수시지요. 숫돌에 몸을 가는 것 같은 소모, 그 후에는 다시 캔버스에 밤낮없이 몰두하시지요. 옆에서 보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숫돌에 몸을 가는 것 같은 소모’는 그의 삶뿐 아니라 작품에 철저하게 녹아 있다. 1958년에 그린 ‘까치’라는 작품이 있다. 이중섭에게는 ‘황소’가 화가의 자화상과 같은 것이었다면, 장욱진에게는 ‘까치’가 그러했다. 장욱진은 마을 주변을 낮게 날며 세상 사람을 관찰하는 이 작고 영리한 새를 좋아했다. 그림 속 까치는 지금 그믐날 깜깜한 밤에 홀로 나무 위에 앉아 있다. 일견 조형적으로 단순하고 귀여운 작품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자그마한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화가는 화면 전체를 밤의 어둠으로 새까맣게 뒤덮은 다음, 매우 가느다란 도구로 수천 수만 번의 손놀림을 통해 검은 물감을 ‘긁어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앙증맞은 까치 한 마리를 남기기 위해, 도대체 화가는 얼마나 여러 번 화면을 긁고 또 긁었을까. 모두가 잠든 새벽에 작업하길 좋아했던 그는 이 작은 화면을 긁느라 얼마나 많은 새벽을 홀로 지냈을까. 작가의 철저한 고독과 치열한 내면세계가 읽혀서, 내게 이 그림은 도무지 귀엽지 않고, 아프고 처절해 보인다.
◇장욱진다운 죽음
“산다는 것은 소모하는 것, 나는 내 몸과 마음과 모든 것을 죽는 날까지 그림을 위해 다 써버려야겠다. 내가 오로지 확실하게 알고 믿는 것은 이것뿐이다.”(장욱진) 자신의 육신을 다 써버린 1990년 12월 어느 날, 장욱진은 갑자기 생을 마감했다. 고질병이었던 천식 때문이었다. 점심까지 잘 먹고 멀쩡하던 사람이 호흡 곤란으로 병원에 걸어 들어가서는, 그날 오후 훌쩍 세상을 떠났다. 실로 장욱진다운 죽음이었다. 마치 죽음을 예견한 듯, 사망한 해에 그린 자전적 작품 한 점(‘밤과 노인’)이 남아있다. 굽이굽이 굴곡진 산등성 사이로 길이 나 있고, 그 길 위에서 우왕좌왕 까불대는 젊은 시절의 자화상 하나가 그려져 있다. 1951년 ‘자화상’의 배경이었던 허허벌판은 아니고, 이제는 자그마한 초가집과 기와집도 몇 채 지어졌건만, 이 모든 풍경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수염 난 흰옷의 노인이 유유히 하늘로 날아오른다.
이렇게 허무한 게 인생이다. 바로 그 허무함 때문에, 우리는 쓸데없는 욕심을 내려놓은 채 우리 곁에 있는 작고 여린 것의 소중함을 깨달아야 한다. 파릇파릇 있는 힘을 다해 자라는 나무, 사이좋게 떼 지어 하늘을 나는 새들, 아무런 편견 없이 사람을 따르는 삐쩍 마른 동네 개, 작고 가난한 집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나의 가족. 바로 그런 것들 말이다. 장욱진은 흙탕물 같은 세상 속에서 그렇게 작고 소소하고 사랑스러운 것들만을 말갛게 건져 올려 세상에 내놓고 사라졌다. 평생 그가 남긴 작품은 유화 800여 점을 비롯하여 먹그림, 매직화, 판화 등 1200여 점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