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서프라이즈!”
지난 21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동문으로 입장하자마자 천장을 찌를 듯 높은 석탑을 보고 감탄했다. 고려 때 세워진 국보 경천사지 십층석탑. 한국에선 보기 드문 대리석 탑으로, 높이 13.5m의 위용이 빛을 발한다. 민병찬 국립중앙박물관장은 “바이든 대통령이 크고 화려한 탑을 실내에서 마주해 깜짝 놀라는 모습이었다”며 “전통과 이국적 양식이 섞여있다는 설명에 귀를 기울이면서 탑을 계속 올려다봤다”고 전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오후 7시 34분쯤 박물관에 도착했고, 한미 정상회담 공식 만찬 직전 10여 분간 윤석열 대통령, 김건희 여사와 함께 석탑과 신라 금관, 고려 동종을 감상했다. 양국 정상에게 전시를 안내한 신소연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은 “바이든 대통령은 경청하는 자세로 유물 설명을 듣다가 흥미로운 대목에서 눈을 반짝이며 질문을 던졌다”며 “외교 경험이 많은 분이라 다른 나라 문화에 대한 이해도가 높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기대 이상이었다”고 했다. 이날 만찬 전 중앙박물관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미국인 헐버트 노력 덕분에 반환”
이날 오전 윤석열 대통령은 사전 점검차 박물관을 방문해 전시 동선을 미리 살폈다. 민 관장은 “윤 대통령이 오전에 유물 설명을 들으며 패널 안내문을 열심히 읽더니, 나중에 바이든 대통령에게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미국인 헐버트의 노력 덕분에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직접 설명해 깜짝 놀랐다”면서 “우리 문화를 제대로 알리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고 했다.
원래 개성 경천사에 있던 탑은 1907년 일본 궁내대신 다나카 미쓰아키(田中光顯)가 해체해 도쿄에 있는 자기 집으로 불법 반출했다. 이때 이 만행을 폭로한 사람이 푸른 눈의 두 이방인이었다. 영국 출신 언론인 어니스트 베델(1872~1909)은 1907년 3월 대한매일신보 영문판에 이 사실을 보도했고, 선교사이자 고종의 외교 조언자로 조선 독립을 위해 헌신한 미국인 호머 헐버트(1863~1949)는 일본의 영자 신문에 불법 약탈 사실을 알리고 반환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이들의 헌신적 노력 덕분에 탑은 11년 만에 고국에 돌아왔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어 신라실에 들러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된 1500년 전 금관과 금허리띠를 보며 관심을 보였다. 신 학예연구관은 “금관은 머리에 썼을 수도 있으나, 죽은 사람 얼굴을 가리는 ‘데드 마스크’ 용도였을 가능성도 있다는 최근 학설을 소개했더니 다른 문화권 사례와 비교하면서 흥미로워했다”고 했다. 고려실에서는 경기도 여주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하는 ‘청녕 4년(淸寧四年)명 동종’을 관람했다. 한국을 뜻하는 코리아(Korea)라는 명칭이 고려에서 비롯됐다는 설명을 듣고, 바이든 대통령은 “고려는 언제 시작됐나” 등의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고려는 화려한 불교 공예품과 청자가 발달한 시대라고 설명했고, 범종의 소리는 부처의 음성을 상징하는 것이라, 그 소리를 들으면 중생이 구제받을 수 있다고 여겨졌다고 말했더니 바이든 대통령이 요즘은 미국에도 사찰이 있고 한국 문화도 잘 알려져 있어서 범종에서 중요한 것이 소리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신 학예연구관)
◇“이 좋은 ‘사유의 방’을 그가 봐야 하는데”
박물관 측은 당초 국보 금동반가사유상 두 점이 전시된 ‘사유의 방’을 안내하려고 했으나 바이든 대통령이 고령인 데다 경호 문제 등을 고려해 무산됐다고 한다. 이날 통역을 맡은 김일범 의전비서관은 본지 통화에서 “미국 답사단 측에 박물관 대표 유물이라 꼭 관람했으면 좋겠다고 수차례 얘기했고, 답사단도 사전에 반가사유상을 감상한 후 아름답다고 감탄했다. 다만 ‘사유의 방’이 2층에 있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이동해야 해 동선상 도저히 안 되겠다며 아쉬워했다”고 전했다.
이날 바이든 대통령은 예정 시각인 오후 7시보다 34분 늦게 박물관에 도착했다. 윤 대통령과 김 여사는 오후 6시 58분에 도착했다고 한다. 민 관장은 “바이든 대통령이 호텔에서 아직 출발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두 분이 전시실을 먼저 둘러봤다. 김 여사가 ‘사유의 방’을 관람하면서 ‘이 좋은 방을 바이든 대통령이 봐야 하는데’ 하며 안타까워했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이날 오전 사전 점검 때도 ‘사유의 방’을 찾았다고 한다. 원래 예정에 없었으나 반가사유상 얘기를 대통령이 먼저 꺼냈다. “집사람이 예전에 세계적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 특별전을 열었는데, 그때 ‘이보다 더 뛰어난 조각품이 우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고 얘기하더라. 기회 되면 보고 싶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민 관장이 “지금 보러 가시겠습니까”라고 안내해 전격 관람이 이뤄졌다는 후문. “정말 훌륭한 작품을 보여줘서 고맙다고 윤 대통령이 여러 번 말했다. 재질은 뭔지, 두 반가사유상이 뭐가 다른지 등을 물었고, 박물관에 폐가 되지 않는다면 자주 보러 오겠다고 말했다.”(민 관장)
◇기와 검사와 맺은 인연도 소개
김 여사는 전시 기획자의 감각이 돋보였다고 참석자들은 전했다. 신 학예연구관은 “김 여사가 예리한 질문을 많이 던졌다. 경천사지 십층석탑을 보면서 국내에서도 대리석이 나는지, 탑의 층수는 어떻게 세는지 등을 물었다. 제일 아래 세 층은 기단부라서 그 위 10층을 세는데, 조선시대 기록에는 13층으로 불렀다는 기록도 있다는 답변을 드렸다”고 했다.
통일신라실에서 기와를 본 윤 대통령이 “검사 선배 중에 기와에 미쳐서 엄청나게 수집한 분이 있었다”며 ‘기와 검사’ 유창종 유금와당박물관장 얘기를 꺼내기도 했다. 윤 대통령이 “그 선배님이 ‘충주 고구려비’도 발견하시고, 평생 모은 기와를 어디에다 기증하셨는데…”라고 하자, 민 관장이 “바로 여기, 중앙박물관에 기증하셨다”고 답해 웃음이 터졌다고 한다. 대검찰청 초대 마약과장으로 이름을 날린 유창종 관장은 지난 3월 <아무튼, 주말> 인터뷰에서 윤석열 당시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성남지청장 시절 휘하에 있었다고 전하며 “윤석열은 정의감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따뜻한 사람이고 인간을 사랑할 줄 안다. … 국민이 원해서 정치판에 불려 나왔지만, 모두 감내할 만큼 그릇이 크다”고 말한 바 있다.<본지 3월 5일 B1~2면>
◇문화 외교 통했지만 절차는 문제
이날 중앙박물관 만찬은 상설 전시관 으뜸홀(로비)에서 열렸다. 만찬장은 전시장은 물론 1층 전시실 사이로 뻗은 ‘역사의 길’과도 가림막으로 완전히 차단됐다. 바이든 대통령은 만찬장 반대쪽 끝인 동문으로 입장해 경천사지 석탑을 시작으로 신라실, 고려실에서 유물을 감상했고, 이후 두 대통령은 전통 의장대 사열을 받으며 레드 카펫을 밟고 만찬장으로 들어섰다.
일각에선 박물관에서 만찬을 여는 데 대한 비판이 제기됐지만, 정준모 미술 평론가는 “외국 미술관·박물관들은 단지 기부금 마련용 행사뿐 아니라 국빈 만찬은 물론 기업 광고·홍보를 위해서도 미술관·박물관 안팎을 내준다. 전시실 내부에서 음식을 놓고 만찬을 여는 것이 다반사라 비난할 일이 아니다”라고 했다. 이광표 서원대 교수는 “1500년 전 신라 금관부터 고려시대 화려한 문화까지 자연스럽게 소개하는 기회가 됐다”고 평하면서도 “해외 박물관에서 열리는 만찬은 폐관 이후에 관람객들에게 불편을 끼치지 않으면서 여는 게 일반적이다. 일반 국민 관람을 막고 임시 휴관 공지를 불과 사흘 전에 하는 바람에 이미 예약한 관람객들에게 불편을 끼친 점 등 절차상 문제는 반복되면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