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 높은 곳에 나 닿길 원해/…/관심 없어 과거에 모두가 알고 있는 그 트러블에.”

한 걸그룹 뮤직비디오 배경에 이런 가사와 함께 ‘르세라핌(LE SSERAFIM)’이라는 팀명이 뜬다. 피어리스(Fearless·두려움을 모르는)의 단어를 애너그램(문자의 배열을 바꿔 새로운 단어를 만듦) 방식으로 만든 단어다. 그룹 ‘방탄소년단(BTS)’이 소속된 국내 최대 연예기획사 하이브의 첫 걸그룹이다.

BTS의 여동생 그룹답게 데뷔곡 ‘피어리스’부터 초동(발매일 기준 일주일 동안의 음반 판매량)이 30만장 이상 판매되며 역대 걸그룹 데뷔 신기록을 달성했다. 벌써부터 빌보드 글로벌 차트 200(미국 제외)의 48위, 일본 오리콘 주간 합산 앨범 랭킹에서는 1위다.

이를 이끈 건 김성현(34)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다. 2012년 빅히트 뮤직에 입사해 방시혁 총괄 프로듀서와 함께 BTS를 탄생시킨 후, 빌보드 1위에 오른 ‘다이너마이트’까지 모든 앨범의 시각 콘텐츠를 총괄했던 그가 이번에는 걸그룹에 도전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란, 팀명 로고와 뮤직비디오, 사진, 무대, 헤어메이크업 등 보여지는 모든 것을 총괄하는 사람. 지난 16일 서울 용산구 하이브 본사에서 그를 만났다.

지난 16일 서울 용산구 하이브 본사에서 만난 김성현 쏘스뮤직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그룹 BTS 앨범 '화양연화', '다이너마이트'의 비주얼을 담당한 그가 이번에는 '르세라핌'을 책임졌다.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만들어진 콘셉트는 없다

-걸그룹 ‘르세라핌’이 추구하는 콘셉트는 뭔가?

“정해진 콘셉트는 없었다. 난 그저 이들이 말하고 싶은 걸 잘 표현하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다.”

-아이돌 그룹을 기획할 때 기본 틀을 정해 놓지 않나?

“방탄소년단도, 르세라핌도 회사 차원에서 입혀주는 콘셉트는 없었다. 난 먼저 멤버들의 개별 인터뷰를 통해 이들이 표현하고 싶은 목소리를 듣는다. 그렇게 여러 번 인터뷰를 하다 보면 그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하나의 메시지가 나온다. 르세라핌의 경우에는 다들 욕심이 많았고, 그 욕심을 감추지 않았고,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다고 느꼈다. 그리고 이 팀을 통해 나다움을 간직하면서도 인생의 다음 단계로 가고 싶어한다는 의지도 느껴졌다. 그래서 팀명을 ‘르세라핌’으로 잡게 된 것이다.”

-보이그룹 BTS와 걸그룹인 르세라핌을 만들 때 어떤 점이 달랐나.

“제작자로서 ‘걸그룹’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BTS도, 르세라핌도, 인간적으로 멋있는 아이들이니, 멋지게 표현하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개개인의 개성이 드러나는 데 초점을 맞췄다.”

르세라핌

-한 명씩 예를 들자면?

“사쿠라는 일본 걸그룹 ‘HKT48′, 한국 걸그룹 ‘아이즈원’에 이어 이번이 총 세 번째 데뷔다. 더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했다. 함께 ‘아이즈원’에서 활동한 채원씨의 경우에는 인터뷰 중 ‘새로운 취미나 도전을 해 본다면 오토바이 타기도 생각해봤다’고 답한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생각보다 쿨하고 자유분방했으며, 다양한 자아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여러 자아의 김채원을 그리고, 본인이 본인을 안아주는 모습을 넣었다.”

-멤버 카즈하는 발레리나의 모습을 보여준다.

“카즈하는 15년간 발레를 해 온 친구다. 이 친구의 인생이 담긴 발레를 최대한 멋있게 표현해주고 싶었다. 홍은채양은 어리다 보니 ‘나도 내가 누구인지 아직 모르겠다’고 하더라. 그래서 질풍노도의 소녀 이미지를 담았다. 허윤진양은 욕심이 많고, 성공하고 싶어했고, 이를 숨기지 않는 미덕이 있었고, 내고 싶은 목소리가 있었다. 그래서 멤버 중 유일하게 육성으로 내레이션이 들어간다.”

-르세라핌의 콘셉트가 너무 섹슈얼하다는 비판도 있다.

“‘걸그룹이니 이렇게 해야 해’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보는 사람들이 그렇게 느꼈다면, 이 친구들이 가지고 있는 다분한 자기 모습이다. 멤버들에게 주문한 건 단 하나 ‘당당함’이었다. 뮤직비디오 촬영 세트를 헬스장(GYM)으로 시작한 것도 멤버들의 ‘자기 확신’을 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멤버들로부터 출발하는 연출은 그룹 BTS부터 내가 해오던 바다.”

BTS

◇화양연화에서 다이너마이트까지

김성현이 명성을 얻은 건 BTS를 세계 무대에 알린 앨범 ‘화양연화(花樣年華)’부터다. 타이틀곡 ‘아이 니드 유(I NEED U)’ 뮤직비디오에서 그린 아련하고 감성적이며 고된 현실에 맞부딪힌 청년들의 모습은 지금도 성공한 뮤직비디오를 말할 때 회자된다.

-화양연화는 어떻게 탄생했나.

“영화 때문은 아니다. 그냥 그 단어 자체가 주는 힘이 좋았다. 1차원적으로 해석하면 화양연화는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다. 만개했다는 것이다. 굉장히 좋은 말일 수 있지만, ‘그럼 그 이후에는 꽃이 질 일밖에 없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 BTS뿐만 아니라 빅히트 뮤직 자체가 굉장히 작고 질풍노도를 겪고 있었다. 메시지 자체가 우리와 운명적으로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화양연화 파트 1은 ‘위태로운 청춘’이다. 굉장히 아름다운 말이지만, 당시 우리의 현실을 담고 있기도 했다.”

-반면, BTS에 처음으로 빌보드 1위를 안겨준 곡 ‘다이너마이트’는 굉장히 밝다.

“당시 코로나 팬데믹이 한창이던 시절이라 유쾌한 청감과 희망적인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 장르도 디스코팝이다. 각기 다른 멤버들의 매력을 풀고자 색을 선택했고, 대신 톤인톤 배색(색상은 다르게 하되 비슷한 채도를 가진 옷들을 활용해 코디하는 것)을 사용해 위트 있고 조화롭게 표현하고 싶었다.”

-BTS 일곱 멤버에 대해 느낀 이미지를 표현해준다면?

“뷔는 무엇이든 소화할 수 있는 카멜레온 같은 멤버다. 화려함이 잘 어울린다. 패션과 사진에 관심이 많아 항상 패션 아이템과 사진 장비에 대한 지식 공유를 같이 한다. RM은 패션과 미술에 관심이 상당히 많고 확고한 심미안을 가진 친구다. 여유로움과 반전 매력, 허당끼가 공존한다. 훌륭한 비율을 자랑해 웬만한 스타일은 잘 소화한다. 제이홉은 가지고 있는 에너지가 워낙 커 주변 사람들을 밝게 만드는 신비한 힘을 가졌다. 그런 특성에 걸맞게 컬러풀하고 재미 있는 콘셉트를 잘 소화한다. 정국은 단색을 좋아하고 워낙 몸 쓰길 좋아해서 활동적인 느낌을 선호하지만, 차려입으면 누구보다도 근사하다. 지민도 단색을 선호하고 무용을 했던 친구라 우아하고 유려한 분위기를 잘 내는 멤버다. 체구가 작지만 비율이 뛰어나 뭐든 멋지게 소화한다. 진은 고전적이고 도회적인 모습이 잘 어울리지만, 평소엔 색채감있고 아기자기함을 사랑하는 친구로 반전 매력이 있는 멤버다. 슈가는 소위 군주미가 있는 멤버이고, 동시에 특유의 감성으로 길거리적인 콘셉트도 본인 색으로 잘 소화한다.”

-또 다른 빌보드 1위곡 ‘버터’는 ‘다이너마이트’와 어떻게 달랐나.

“버터의 경우에는 방탄소년단만의 ‘반전 매력’을 녹이고자 노력했다. BTS 하면 끝내주는 퍼포먼스와 그와 상반된 귀엽고 아기자기한 일상들이 뒤엉켜 있다. 뮤직비디오에서도 때론 거칠고 진중하고, 때론 느슨하고 악동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 버터는 뮤직비디오 제작 기획까지만 참여했다.”

◇언더도그에서 세계 1위로

-회사가 언더도그에서 업계 1위가 됐다.

“내가 1위는 아니지만, 나 역시 아티스트와 하이브의 위치에 맞는 자질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BTS, 투모로우바이투게더(TXT) 등을 맡으며 권태가 왔다. 어느 순간 BTS는 너무 커져 있었고, 그들의 네임밸류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돼 있었다. 내가 추구하는 삶은 무엇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쯤 걸그룹 프로젝트 제안이 들어왔다. 제작자로서 내가 클 수 있는 프로젝트라고 생각했다. 어떤 마음이 더 무겁고 진심인지는 고를 수 없다. BTS를 만들 때도 도전이었고, 르세라핌도 또 다른 의미의 도전이었다. 새로운 도전을 하는 멤버들도, 나도 동병상련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피어리스’라는 말은 내게도 큰 위안이었다.”

-왜 권태가 왔나.

“일의 특성상 긴장을 놓지 못한다. 신보 앨범 기획, 프리 프로덕션, 촬영, 포스트 프로덕션, 무대 준비 등 타임라인이 엮여 있다. 콘텐츠 양도 방대하다. 한 앨범을 완성함과 동시에 다음 앨범을 만들고 있는 격이다. 이런 쉼표 없는 스케줄이 가장 힘들다.”

-BTS가 ‘다이너마이트’로 빌보드 첫 1위를 했을 때 뭐하고 있었나.

“사무실에서 다음 프로젝트 작업을 하고 있었다. 자랑스럽고 뿌듯하기도 했지만 역사적인 그룹을 맡았다는 생각에 앞으로 더 잘해야겠다는 다짐과 어깨가 무거워짐을 동시에 느꼈다.”

-하이브에 합류하게 된 계기는?

“원래 패션디자이너였다. 대학 의상디자인 학과를 중퇴하고 개인 브랜드를 운영하고 있었다. 방시혁 총괄프로듀서는 패션디자이너 요니 피의 소개로 만났다. BTS가 데뷔하기 전이었는데, 이런 일을 담당할 사람을 찾고 있다고 했다. 원래 음악을 좋아했기 때문에 재미있을 것 같았다. 처음 BTS에 대해서는 힙합 그룹이라는 이야기를 했고, 세상에 목소리를 내야 하는 그룹이라고 말했다.”

-BTS가 이렇게 세계적인 그룹이 될 줄 알았나.

“망할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안 했다. 답을 찾기 위해 계속 바꿔 나간다는 생각만 했다. 어떤 앨범이든 첫 술에 기대할 수는 없다. 대부분의 앨범은 한 페이지가 끝나야 그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다. BTS는 끊임없이 세상의 억압과 틀에 대한 목소리를 내왔던 팀이다. 그 결과 음악 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꿨다고 본다. 르세라핌 역시 마찬가지다. 아직은 시작하는 단계고, 조금씩 목소리를 내고 있는 팀이다. 언젠가 한 장이 끝나갈 때쯤 르세라핌도 이런 역할을 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