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 수어, 솔직히 20%도 이해 안 돼요.”
지난 3일은 농아인의 날. 얼굴 절반을 마스크로 덮고 지낸 기간은 표정과 손짓으로 소통하는 수화언어(수어) 사용자에게 유독 길었다. 동시에 수어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도 늘어났다. 한국농아인협회에 따르면 수화통역사 시험 응시자는 2012년 대비 올해 18%가량 증가했다. 질병관리청의 코로나 브리핑을 비롯한 각종 정부 발표에 수어 통역사가 배치된 것도 한몫했다.
수어를 사용한다고 모든 농아인이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는 건 아니다. 2000년 문화체육관광부(당시 문화관광부)가 한국표준수화규범제정 추진위원회를 구성했지만, 여전히 세대와 교육 수준에 따라 사용하는 수어가 다르다. 심지어 정부가 제공하는 수어영상도서를 두고 ‘실제로 쓰이지 않는 수어로 쓰인 엉터리’라는 비판도 나온다. 왜 농아인들은 이런 어려움을 겪을까. 수어 사용자들에게 직접 이유를 들어봤다.
◇산책을 山과 冊으로? MZ들의 수어
젊은 세대 농아인들의 수어 대화 방식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신조어 활용이 많고, 기존 수어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거나, 간소화하는 것이다. 당황스러울 때 사용하는 ‘헐!’은 한국수어사전에 등록된 말은 아니지만, 오른손 검지와 중지를 턱 밑에 붙이는 식으로 표현한다. 또, 산책이라는 기존 수어를 ‘산(山)+책(冊)’으로 쪼개서 표현하는 것도 이들만의 방식이다. ‘뻔뻔하다’라는 수어는 원래 오른손으로 코를 좌우로 비비는 식이지만, 주먹으로 코를 때리는 시늉으로 간소화하기도 한다.
대화 상대가 어르신이거나 수어를 배우지 못한 농아인이라면 이런 대화 방식이 걸림돌이 된다. 농아인 정모(28)씨는 “또래끼리 쓰는 댕댕이(멍멍이를 표현한 신조어)를 무심코 어르신에게 썼다가 이해하지 못해 다시 설명한 적이 있다. 또 화장실은 손가락으로 ‘WC’ 알파벳을 나타내 표현하는데, 주위 어르신 중에는 손을 비벼 씻는 모양으로 표현하는 분이 있어 당황했던 적이 있다”고 말했다.
서울수어전문교육원 이미혜 수어통역사는 “신조어는 언어의 생명력을 보여주는 것이므로 포용하는 방향이 맞는다. 신조어가 자리 잡으려면 수어가 해당 개념을 얼마나 잘 나타내는지를 뜻하는 도상성이 중요하다. 그런데 어르신들의 경우 이런 신조어를 접할 기회가 없기 때문에 자칫 세대 단절을 불러올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한국농아인협회 한광희 수어통역사는 “수어는 조금만 달라져도 의미가 바뀌는 탓에 표준화가 어렵고, 표준화 뒤에도 실생활과 괴리를 좁히기 위해 최신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농인은 동화책만 봐야 하나요”
수어를 제1 언어로 사용하는 농아인 중에는 한국어를 읽고 쓰지 못하거나 문장 구사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있다. 한국농아인협회 정희찬 상임이사에 따르면 이와 같은 농아인은 협회 회원 3만명 중 60%에 해당한다. 이들을 위한 영화, 도서 콘텐츠는 턱없이 부족하다. 한국농아인협회 직원 A씨는 “농아인들이 보고 싶은 영화는 유행이 한참 지난 뒤에야 번역되어서 나오고, 읽을 책이라곤 유아용 고전 도서가 대부분이다. 농아인이라고 해서 지능이 떨어지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이들에겐 생각을 넓힐 콘텐츠가 없다”고 말했다.
한국농아인협회 관계자는 “초‧중‧고 교육 12년이 한 사람의 인생을 크게 좌우하는데, 농아인들이 가는 특수학교에서도 제대로 수어 교육을 하거나 수어를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교사가 없어 교육받을 기회를 박탈당한 농아인들이 많다”고 말했다.
방송 뉴스나 정부 행사 프로그램에서 제공되는 수어 통역을 절반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들도 있다. 교본에 나온 수어와 농아인들이 실제로 사용하는 수어가 다른데, 수어 통역이 이를 반영하지 못한 탓이다. 농아인 박모(28)씨는 “나와 주변인들은 ‘예쁘다’는 말을 양손 새끼손가락을 부딪쳐 표현하는데, 방송에선 오른손 검지로 볼을 찌른다. 이것 외에도 평소에 잘 쓰지 않는 수어가 많아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수어영상도서 150 박스가 반납된 이유
지난달 25일 한국농아인협회는 수어영상도서 150박스를 국립장애인도서관에 반납하고 ‘수준 미달 수어영상도서 가져가라’며 항의했다. 수어영상도서는 국립장애인도서관이 시중 도서를 수어로 변환해 매년 발간하는 영상물이다. 도서관 홈페이지나 수어영상자료관 앱에서 볼 수 있고, CD 형태로 농학교와 한국농아인협회 등의 기관에 배부된다. 하지만 오역이나 직역이 많아 실제 수업 현장에서 활용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는 지적을 받았다.
정희찬 상임이사는 “한국에는 글을 모르는 아이도 배울 수 있는 ‘한국 수어’와 한국어와 대응하는 ‘청인식 수어’가 있다. 영상도서는 모든 농아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는데, 결과물을 보면 명확한 대상이나 기준 없이 수어가 뒤죽박죽이다”라고 말했다. 또 그는 콘텐츠의 내용 또한 불만족스럽다고 했다. “수화 농아인들을 위한 책이라기보다 아동용, 치매 예방용 책 같다. 내용이 가벼워 읽고 싶은 책이 없다.”
또 다른 한국농아인협회 관계자는 “영어를 배울 때 원어민에게 배우듯이, 농아인의 언어는 농아인이 제작 과정에 적극 참여해야 하는데, 수어영상도서는 그 점에서 부족했다. 그리고 요즘 CD를 보는 이들이 극히 드문데, 굳이 CD 영상을 제작하는 건 예산 낭비이고 보여주기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국립장애인도서관 장보성 사무관은 “영상도서는 청각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독서 활동 격차를 줄이기 위해 만들어졌다. 도서 내용을 설명하고 전체 내용 감수하는 데 농아인이 참여했고, CD 활용도가 떨어진다는 의견을 수용해 올해부터는 USB 형태로 제작할 예정”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