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살려주세요.’ 살려달라는 이 말이 제 마음 깊이 와닿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누구를 뽑느냐에 생존의 문제가 달렸습니다.”(3월 3일·여성가족부 폐지를 반대하는 지지자의 사연을 전하며)
“저희는 완벽하게 졌습니다. 사람과 시스템을 바꿨어야 했는데, 아쉽게도 그러지 못했습니다. (중략) 아직 우리의 희망을 포기할 때는 아닙니다. 또 다른 모습으로 여러분과 함께 길을 열겠습니다.” (6월 2일·페이스북에 올린 대국민 편지)
스물여섯 살 박지현은 정치권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성 착취 범죄인 ‘n번방 사건’을 공론화한 추적단 ‘불꽃’ 활동가 출신인 그는 지난 1월 27일 이재명 대선 후보 선대위에 디지털성범죄근절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합류했다. 박지현의 존재는 선거 막판 2030 여성 표가 이재명 후보 쪽으로 결집되는 효과를 낳았다는 분석이 나왔다. 대선에서 패한 민주당은 3월 13일 박지현을 공동 비대위원장으로 선임했다. 박지현은 “민주당의 쇄신을 간절히 바라는 당 안팎의 요구에 수락했다”고 했다. 그 후로 82일. 박지현을 포함한 민주당 비대위는 지난 2일, 6·1 지방선거 참패의 책임을 지고 총사퇴했다.
한국 주요 정당에서 20대 여성이 당대표급 위치에 오른 것은 박지현이 최초였다. 82일간 야당의 사령탑을 맡은 20대 여성 정치인의 존재가 한국 정치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관해 여러 평가가 나온다.
◇화제와 논란 잇따른… 박지현의 80여 일
박지현이 비대위원장직을 수행하는 동안 그는 매일같이 화제와 논란의 중심이 됐다. 3월 17일 공개된 한 유튜브 방송에서 민주당 인사들이 안희정 전 충남지사 부친상에 조문을 간 것에 대해 “진짜 내가 멱살이라도 잡아야 하나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화가 났다”고 말해 논란을 빚은 것이 시작이다. 같은 달 26일에는 “주변에서 ‘한림대 나온 애가 무슨 말(정치)을 하냐’는 식의 말을 많이 한다. 누구든지 학력을 따지지 않고 정치할 수 있어야 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와야 한다”며 학벌주의를 비판한 것이 화제가 됐다.
이후 그의 메시지는 ①당내 성범죄·성 비위 관련 무관용 원칙 적용 ②'내로남불’과 온정주의 타파 ③'86 그룹(80년대 학번·60년대생) 용퇴론’을 포함한 세대교체 ④폭력적 팬덤 정치와의 결별로 요약된다. 박지현은 5월 초 최강욱 의원의 성희롱성 발언 논란이 불거지자 “우리는 세 광역단체장의 성범죄로 5년 만에 정권을 반납했던 뼈아픈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며 사과를 요구했다. 그는 같은 달 12일 성 비위 의혹으로 박완주 의원을 제명하겠다고 전하며 “당내 반복되는 성 비위 사건이 진심으로 고통스럽다”고 했다. 그는 자녀 입시 비리 사건으로 기소된 조국 전 법무장관과 정경심 전 교수가 사과해야 한다고도 했다. 여당을 비판하려면 당내 ‘내로남불’ 문제를 극복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부동산 문제에 연루된 인사, 대선 패배에 책임이 있는 인사의 지방선거 출마도 비판했다.
당내 86그룹을 겨냥해 “아름다운 퇴장을 준비해야 한다”고 직격한 것은 파장이 컸다. “일부지만 팬덤 정치가 우리 당원을 과잉 대표하고 있다. 이들을 정치적 자양분으로 삼는 일부 사람 때문에 그 목소리는 더욱 거칠어지고 당의 선택지를 좁게 만들고 있다”며 민주당의 극성 지지층을 전면 비판하기도 했다. 지난달 24일엔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을 열었고, 이어 당내 비리 무관용 원칙 적용, 팬덤 정치와의 결별 등을 포함한 ‘5대 혁신안’을 발표했다.
박지현의 쇄신 메시지가 나올 때마다 민주당 일각과 강경 지지층 사이에선 강한 반발이 터져 나왔다. 윤호중 공동 비대위원장 등 다른 당 지도부와의 불협화음도 표출됐다. 그의 별명은 어느새 ‘불꽃 대장’에서 ‘내부 총질러’로 바뀌었다. 권리당원 게시판에는 ‘박지현 아웃’이라는 글이 도배됐다. 지방선거가 민주당의 참패로 끝나자 일부 민주당 지지자는 ‘박지현 책임론’을 제기하고 나섰다. ‘박지현이라는 역대급 진상의 패악질’(김용민 평화나무 이사장) 같은 격한 말도 나왔다. 그러나 지지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일각에선 박지현 덕분에 이번 지방선거 역시 대선 때처럼 20대 여성의 민주당 지지율이 높았다는 평가가 나왔고, 트위터 등에는 ‘박지현_덕분에’ ‘박지현_믿고_민주당_뽑았다’ 등의 해시태그(#)가 달린 응원글이 올라왔다.
◇변화의 마중물? 전근대적 정당 구조의 희생양?
최초의 20대 여성 비대위원장에 대해 여러 해석이 나온다. 민주당을 포함한 우리 정치권에 과제와 질문을 남겼다는 평가, 민주당 내분의 씨앗이 돼 지방선거 참패에 일조했다는 비판 등이다.
황두영 전 민주당 공동 비대위원장 정무조정실장은 “박지현의 메시지는 20대, 특히 여성의 입장에서 굉장히 상식적인 요구를 담고 있고 여기에 동의하는 이가 많기 때문에 소위 ‘박지현 현상’이란 게 일어났고 영향력을 발휘한 것”이라며 “이것이 민주당의 주류 정서와 부딪혀, 민주당이 젊은 세대의 요구와 융합되기 쉽지 않다는 점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박지현은 ‘정치는 이래선 안 된다’는 굉장히 순수한 분노와 개혁 의지를 갖고 있다”며 “그가 제기한 화두들은 민주당에 매우 큰 과제를 남겼기 때문에 그의 존재가 단지 ‘해프닝’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박지현의 등장은 한국 정당이 세대교체의 흐름 속으로 전환되고 있는 걸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한국 정치에 변화를 가져오는 마중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면서도 “(박지현은) 참신했지만 성과를 이뤄낼 정치력은 없었고, 한편으로는 민주당의 폐쇄적이고 전근대적인 정당 구조의 희생양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반면, 박성민 정치컨설턴트는 “박지현은 (비대위원장이라는) 너무 무거운 옷을 입었다고 본다. 경험과 정치력 부족 등이 여과 없이 노출됐다”고 평가했다. 이준한 인천대 교수는 “갈팡질팡하고 일관성이 보이지 않는 모습을 많이 보였다”며 “혼자서 의견을 관철할 능력이 없다면 다른 비대위원들이나 젊은 의원들과 함께했어야 한다고 본다”고 말했다. 한 민주당 전직 의원은 “박지현은 이재명의 인천 출마 등 선거 프레임을 흔든 본질적인 문제는 전혀 건드리지 못했다”면서 “선거 시기 비대위원장은 당 내부 상황에 밝아야 하고 정무적 판단도 잘해야 하는데 부족한 점이 많았다고 본다”고 했다.
◇2030 여성들 정치 참여 불러온 촉매제
여성계의 평가는 긍정적이다. 김은주 한국여성정치연구소장은 “박지현은 기성 정치권을 불신하고 거부해온 2030 청년 여성들의 정치 참여를 불러일으킨 촉매제 역할을 했다”며 “어떻게 보면 국민들이 말하고 싶은 것을 박지현이 대신 해준 것일지도 모른다. 박지현이 제시한 과제를 앞으로 어떻게 해결해나갈지는 민주당이 얼마나 민주적인지, 진짜로 혁신을 원하는지 등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이수정 경기대 교수는 “박지현의 등장은 젊은 여성들의 정치 세력화 가능성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라며 “좌든 우든 ‘양성평등적 시각에서 정책이나 전략을 구사해야 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갖게 했다. 정치사에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그러나 “어떤 혁신을 했는가는 의문인데, 상징적인 한 사람의 존재로 기존의 가치 체계를 바꾸는 것은 충분하지 않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박지현의 미래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여성 청년 정치인인 신지예 전 여성정치네트워크 대표는 “민주당이 지금 왜 위기인지 민주당 주류 의원들만 모르는 것 같다. 내로남불식 정치, 계속되는 성폭력 사건 등이 문제 아닌가”라며 “민주당이 얼굴 마담으로 박지현을 쓴 게 아니라면 그를 실질적 개혁의 주체로서 설 수 있도록 밀어줄 필요가 있다”고 했다. 장성철 대구가톨릭대 교수는 “민주당은 개혁을 한다는 상징적 이미지만 국민들에게 주면 된다는 생각에 박지현을 (비대위원장으로) 데려온 것 같은데, 박지현은 민주당의 공고한 기득권 세력을 향해 소신을 외친 이단아였다”며 “과연 민주당에서 그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박지현이 실패로 끝난다면 586에게 충성하는 청년만 당에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