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손흥민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수년간 축구 팬들 사이에서 농담 반 진담 반처럼 돌던 이 말이 이제는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현실이 됐다.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토트넘에서 활약 중인 손흥민(30) 선수가 21-22 시즌에 23골을 넣으며 아시아 축구 선수로는 최초로 EPL 득점왕에 올랐기 때문이다.
손흥민이 세계 최고 선수가 되는 여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특히 토트넘으로 이적했던 첫 시즌인 15-16 시즌에는 현지 적응에 어려움을 겪으며 주전 자리를 꿰차지 못해 현지 팬과 언론의 비난을 받았다. 그런데 당시 “손흥민은 2~3년 후 아시아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최고 중 하나로 꼽히는 공격수가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한 사람이 있다. 한국 축구 사상 최고의 풀백이자 손흥민의 ‘토트넘 선배’인 이영표 강원FC 대표이사다.
그는 정말 예언이 현실이 될 걸 알고 있었던 걸까. 손흥민이 득점왕에 오른 지난달 서울 강남에서 그를 만났다. 은퇴한 지 9년이 됐지만 이영표는 현역 축구 선수처럼 탄탄한 체격이었다. 그는 “지금도 운동을 꾸준히 한다. 현역 때보다 1~2㎏ 정도 쪘다”고 말했다.
◇손흥민, 스포츠사의 위인 됐다
-손흥민이 EPL 득점왕이 됐다.
“소위 유럽 5대 리그라고 하는데, 엄밀히 말하면 전 세계 최고의 리그다. 축구 시장 상황이나 중계권료, 선수 연봉 수준을 보면 이들 5대 리그가 세계 최고의 리그이고 현재 EPL은 최고의 르네상스 시대를 누리는 리그다. 거기서 한국 선수, 특히 동양인 선수가 득점왕을 한 것은 엄청난 일이다. 손흥민은 이제 스포츠사, 축구사에서 위인이 됐다고 생각한다.”
-차범근 선수와 같은 수준일까.
“각 세대마다 최고의 선수가 있다. 50대 후반 이상인 분들에겐 차범근 감독님이 최고의 선수일 것이다. 우리 세대에서는 박지성이 최고 선수 중 한 명이었다. 손흥민은 지금 세대뿐 아니라 대한민국과 아시아를 대표하는 최고의 선수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6년 전 손흥민이 유럽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 될 거라 예언했는데.
“응원의 의미를 담은 것이었다. 나의 응원과 상관없이 손흥민에게는 성공할 수밖에 없는 3가지 특별한 장점이 있다. 첫 번째는 상대가 쫓아오지 못할 정도의 엄청난 스피드가 있다. 또 스피드가 있더라도 골을 넣을 수 있는 곳으로 움직여 들어갈 수 있는 적절한 움직임이 있어야 하는데 손흥민은 그걸 갖췄다. 마지막으로 마무리 능력. 득점 찬스가 왔을 때 왼발과 오른발 가리지 않는 슈팅 능력이 있다. 차범근 감독님처럼 결정력, 득점을 통해 경기의 결과와 향방을 바꿀 수 있는 선수가 아시아에서 또다시 나온 것이다.”
-내심 손흥민의 잠재력을 확신하지 않았나.
“손흥민에게는 앞서 말한 3개의 요소를 감싸는 ‘멘털(정신력)’이 있다. 경기에 임하는 태도와 축구에 대한 마인드가 남다르다. 손흥민은 독일과 EPL 토트넘에서 활약하는 아주 긴 시간 동안 매년 20개 이상의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고 있다. 1, 2년은 할 수 있지만 매년 이렇게 한다는 건 정말 대단한 것이다. "
-그런 마인드는 어떻게 형성된 걸까. 축구 스승인 아버지의 영향일까.
“프로로서 일관성을 유지하는 건 어릴 때부터 부모님, 특히 아버지 손웅정 선생으로부터 훈육을 잘 받은 영향이 아주 크다고 생각한다. 몇 년 전에 손흥민이 국가대표팀 경기에서 동료들에게 불만을 표시하는 제스처를 보인 적이 있다. 그런 부분을 손웅정 선생님이 바로바로 교정하고 잡아준다.”
-손흥민 선수가 아버지에게 굉장히 엄하고 무서운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더라. 그렇게 축구를 배우면 창의적인 플레이를 못하는 것 아닌가.
“흔히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두면 창의력이 커질 거라 생각한다. 반대로 일정한 규칙과 질서를 정해두어야 창의력이 더 극대화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일관된 성장은 규칙과 질서 안에 있을 때 가능하다. 강하고 엄하게 가르치는 건 외형적인 문제이고, 핵심은 그 가르침 안에 사랑이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한다.”
-손흥민의 잠재력을 언제 알아봤나.
.“대표팀에서 처음 만났을 때 아주 좋은 스피드와 공격성을 가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대표팀에 어린 친구들이 한 명 한 명 들어오는데 하루 이틀 훈련해보면 그 ‘느낌’이 온다. 손흥민 선수는 17~18세 때쯤 조광래 감독님이 대표팀을 이끌 때 선발됐는데 그때도 스피드와 슈팅이 돋보였다.
-그 ‘느낌’을 받은 다른 선수는 누구인가.
“그건 훈련에서 직접 부딪혀 봐야 안다. 지금도 강원FC에 데려올 용병선수를 스카우트할 때 ‘저 선수와 한 3일만 연습하면 알 수 있는데’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재능? 손흥민도 처절한 노력의 결과다
이영표는 지독한 노력주의자로 유명하다. 한국 축구 최고의 풀백으로 꼽히지만, 스스로에 대해 “재능 없이 오롯이 노력의 결과”라고 말한다. 손흥민이 세계 최고의 공격수가 된 것에 대해서도 “처절한 노력의 결과”라고 주저 없이 말했다.
-과거 청소년 대상 강연에서 “재능이라는 건 무시할 정도다. 노력을 하면 다 이길 수 있다”고 한 말이 화제가 됐다. 그런데 손흥민이나 메시, 호날두 같은 선수가 되려면 타고난 재능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메시나 호날두 같은 수준은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10년을 제대로 노력하면 한 분야의 ‘마스터’가 될 수 있다. 노력만으로 메시가 될 순 없지만, 메시를 막는 선수는 될 수 있다.”
-노력하다 스스로 한계를 느끼는 경우도 많지 않나.
“한계라는 건 성장할 때만 찾아오는 것이다. 저 역시 선수 때 한계에 부딪혔던 적이 무수히 많았다. 3m 두께, 5m 높이의 강철에 부딪힌 느낌이었고, 부딪히는 순간 나뒹굴며 넘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난 이거 절대 안 돼. 내가 뚫고 지나갈 수 없다’는 느낌에 절망했다.
-그걸 이겨낸 건가.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때 내가 밀려나간 게 아니라 그 한계라는 벽이 밀려난 것이었다. ‘한계를 만나면 절망할 게 아니라 내가 그 한계를 넘어 성장하기 직전에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어린 선수들이 한계를 실패의 빌미로 삼지 않았으면 좋겠다. 한계를 만나는 건 내가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이지 절대 포기해야 한다는 신호가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다. 실패는 성공의 반대가 아니라 성공의 필수 조건이다.”
-스스로 축구에 재능이 없었다고 생각한 건가.
“초등학교 때부터 느꼈다. 재능이 탁월한 아이들을 보며 ‘나는 이렇게 노력해도 안되는데 쟤는 잘하는 게 너무 많네’라는 생각이 나를 자극했다. 재미있는 건 그렇게 재능 있는 친구들이 ‘여자친구 만난다’ ‘운동이 너무 힘들다’ 이러면서 중간에 다 포기하더라. 그런 친구들이 포기하지 않았다면 나 같은 선수는 국가대표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인내하고 버티는 힘을 강조하던데.
“보통 한 달, 6개월, 1년, 혹은 3년 정도 노력하고 ‘안 되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내가 말하는 노력은 ‘10년’이다. 10년을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누가 묻더라. 의사 1명을 뽑는데 100명이 노력하면, 결국 1명만 뽑히는 건데 열심히 한 99명에게도 왜 노력하면 된다는 식으로 말하느냐. 그럴 듯하지만 이 질문에는 오류가 있다. 현실에서는 1명의 의사를 뽑는데 절대 100명 모두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 노력을 시작하면 보통 80명은 3일 정도 노력하다 그만둔다. 나머지 20명 중 15명은 두세 달 내로 ‘아 쟤가 나보다 공부 잘하네” 계산하며 나가떨어진다. 그렇게 15명 포기하고 나머지 5명이 끝까지 경쟁하다 2~3명 남고, 그중에 1명이 의사가 된다. 그럼 마지막까지 경쟁하다 남은 2명은 실패한 애들인가. 아니다. 그 아이들은 의사가 아니라 다른 무엇을 해도 성공할 애들이다.”
-노력을 잘하는 것도 일종의 재능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면 노력을 영영 못 할 것 같다(웃음). 내가 겪어본 바로는 재능을 말하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노력하지 않고 성공하고 싶다’ ‘최소한의 노력으로 성공하고 싶다’는 심리가 깔려 있다. 그런 사람들의 특징은 환경, 부모, 인맥을 언급하길 좋아한다.”
◇카타르월드컵에선 김민재를 주시하라
-이강인, 이승우 등 해외에서 뛰었던 유망주들이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했다는 아쉬움들이 있다.
“저는 그 친구들이 다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강인도 스페인 1부 리그에서 그 정도 활약하고 있으면 정말 잘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선수들에 대한 기대는 팬들이 만들어낸 허상이다. 많은 선수들이 종종 과대 평가되거나 과소 평가된다. 정작 선수들은 자신의 실력을 잘 아는데 주변에서 ‘엄청나다’ 기대하면 자신의 실력과 기대 사이에 있는 갭이 선수에겐 부담감으로 전가된다.”
-’넥스트 손흥민’으로 김민재를 많이 꼽는데.
“김민재는 이미 유럽에서도 상당히 관심을 많이 받는 선수다. 터키 구단에서도 저한테 연락이 와서 ‘김민재 같은 센터백 좀 추천해달라’고 하더라. 세계 최고급 선수가 될 잠재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카타르 월드컵에서 모두 다 김민재를 주시할 거다.
-앞으로 손흥민과 같은 선수가 한국에서 더 많이 나올 거라 생각하나.
“그렇다고 본다. 한국 축구도 학원 스포츠에서 클럽 시스템으로 변모하면서 성적을 내는 지도자보다 좋은 선수를 키워내려는 좋은 지도자들이 많이 생겨났다. 경질되지 않으려 지나치게 체력 훈련하고 이기는 방법만 가르치는 게 아니라, 선수들의 기술과 전술적인 부분을 중시하는 지도자들이 점점 늘고 있다. "
-한국 축구는 20년 전 월드컵 4강을 갔다. 선진적인 시스템이 있기 전에 차범근, 손흥민 같은 선수들도 나왔는데 이유는 무엇일까.
“저는 약간 무식했지만 많은 운동량을 갖고 있는 장점도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가장 좋은 건 양이 아니라 질이다. 어린 시절에는 회복력이 좋아서 좀 무리하게 운동해도 그게 기량 향상으로 이어진다. 한국이 축구 변방임에도 좋은 선수가 배출된 건 어릴 때 운동을 많이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남미도 시스템이 없지만 아이들이 어린 시절 축구공을 가지고 많이 연습하고 스스로 깨달으면서 좋은 선수로 거듭난다. 유럽 유소년 지도자들을 만나보니 ‘운동 시간이 너무 부족해서 유소년 선수의 기량을 늘릴 시간이 모자란다’고 불평하더라. 유럽에서 성공하는 재능 있는 선수들은 집에 가서 각자 운동을 더 한다.”
-예측을 잘하기로 유명한데, 오는 11월 카타르 월드컵은 어떻게 전망하나
“재미로 했던 예측이 운 좋게 몇 번 맞아서 오해가 생긴 거다. 저는 예측력이 정말 없다. 그럼에도 이번 월드컵은 그 어느 월드컵보다 16강 이상의 성적을 기대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역시 손흥민 때문인가.
“그 반대다. 손흥민 선수만 돋보일 때에는 견제가 워낙 강해 손흥민이 활약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황희찬, 김민재, 권창훈, 황인범, 조규성, 이재성 황의조 등 많은 선수들이 살아났다. 한두 명이 아니라 많은 선수들이 살아나고 시너지가 나면 견제가 분산돼 손흥민 선수가 더 활약할 여지가 생긴다.”
인터뷰 내내 ‘노오~력’을 강조하는 이영표 대표의 확고한 모습을 보며 ‘냉혹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천재성을 타고나지 못한 나는 24시간을 통째로 축구에 들이부어야 지금의 경기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손흥민의 말과 “우리 아들 절대 월드 클래스 선수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외치던 손웅정씨가 떠올랐다. ‘최고’의 반열에 간 사람들은 얼마만큼의 겸손과 노력을 감수했던 걸까.
[배준용 주말뉴스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