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겨울, 경주여자교도소. 이금자(이영애)가 출소하는 날. 악단까지 대동한 교회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 살아있는 천사라더라, 얼굴에서 빛이 난다더라, 술렁대는 사람들 앞에 여름용 땡땡이 원피스를 입고 나타난 이금자. 교회의 전도사는 두부를 내민다. “다시는 죄 짓지 말라고 먹는 겁니다.” 금자는 망설임 없이 손을 내밀어 두부를 접시째 내팽개치고는 차갑게 한마디 던진다. “너나 잘하세요.”

일러스트=유현호

한없이 친절했던 금자씨가 왜 이렇게 변한 걸까. 그가 감옥에서 보여준 모든 선행은 의도된 것이었다. 여섯 살 소년 박원모가 유괴 살해당한 일에 금자의 책임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한 백 선생(최민식)은 발각되지도 감옥에 가지도 않았고, 오직 금자만이 13년의 수감 생활을 겪었다. 감옥에서 ‘친절한 금자씨’가 되어 뿌려둔 선행은 모두 백 선생을 잡기 위한 포석이었다. 금자는 감방 동기들의 도움을 받아 백 선생에 대한 복수를 시작한다.

최근 칸 영화제에서 <헤어질 결심>으로 감독상을 받은 박찬욱 감독 영화 <친절한 금자씨>의 설정이다.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의 뒤를 잇는 ‘복수 3부작’으로 꼽히지만 그 내용과 전개는 전작들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박찬욱 특유의 강렬한 영상과 블랙 유머를 유지하면서, ‘복수’ 그 자체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전후 사정이 어찌 됐건 금자는 유괴의 공범이다. 결백하지 않다. 금자는 백 선생에게 복수해야 하지만 동시에 다른 이들에게 용서를 구해야 한다. 어떻게 사과해야 하는가? 미안하다고 무릎 꿇고 손가락을 잘라가며 빈다고 해서 그 일을 없던 것으로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또한 백 선생을 잡아서 죽인다 한들 금자는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을 수 없다. 정당한 복수란 가능한가? 복수와 정의는 어떤 관계를 지니는가?

이는 인류 문명이 시작된 이후 가장 오래된 철학적 고민 중 하나다. 수렵 채집 단계에 머물러 있을 때는 복수의 규칙이 단순했다. 우리 부족에 해를 끼친 놈들에게 최대한의 앙갚음을 해주면 되는 것이다. 국가를 이루기 시작한 후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우리’가 받은 피해를 최대한으로 응징하면 상대편 역시 똑같은 식으로 대응할 것이고 결국 피를 피로 씻는 싸움이 이어지며 국가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원전 1750년경. 고대 바빌론 왕국의 함무라비왕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내놓았다. “다른 사람의 눈을 뽑은 자는 똑같이 눈을 뽑는다.” “집이 무너져서 집주인의 아들이 죽으면 집을 지은 건축가의 아들을 사형에 처한다.” 흔히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알려져 있는, 이른바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 Lex Talionis)이다.

동해보복법은 끔찍하고 야만적이다. 하지만 당시의 시각에서 보자면 놀라운 발전이다. 상대에게 자신이 당한 것과 같은 고통을 겪게 하는 것으로 복수의 연쇄고리를 끊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로 과잉 복수를 하며 상호 파괴로 향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혈연과 친분으로 얽힌 부족사회의 한계를 벗어나 더 큰 정치적 단위를 이루기 위한 첫걸음을 뗀 것이다.

더 중요한 요소도 있다. ‘공권력’이 출현한 것이다. 바빌론에서는 누가 나의 눈을 멀게 하거나 엉터리로 집을 지어서 내 아들이 깔려 죽었더라도 나와 내 가족이 직접 복수를 할 수 없다. 대신 공명정대한 함무라비왕이 내가 당한 것과 같은 일을 저들이 겪게 해줄 것이다. 동해보복법 이전에는 든든한 가문이나 부족의 일원이어야 내가 겪은 부당한 일에 대해 복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바빌론에서는 약하고 힘없는 자도 정의를 구할 수 있다.

법의 목적은 잘못한 자에게 응당한 처벌을 가하는 것이다. 법철학에서 ‘응보론’이라 부르는 이러한 관점은 근대 이후 반론에 부딪혔다. 범죄자가 범죄를 저지르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는 ‘예방론’, 범죄자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국가 형벌권의 이유라는 ‘교화론’ 등이 출현한 것이다. 물론 각각의 반론에는 수긍할 만한 지점이 있다. 하지만 잘못한 자는 벌을 받아야 한다는 건 분명하다. 칸트가 지적했듯이 원시적인 규칙을 보장하지 않는 법 체계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의롭다고 인정받지 못한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양산 사저 앞 시위를 두고 논란이 뜨겁다. 유튜브 조회수와 후원금을 노리는 극우 단체의 무지막지한 고성방가와 욕설, 폭언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사람은 없다. 평산마을 주민들이 겪고 있는 고통도 클 것이다. 하지만 문 전 대통령 내외가 고소장을 제출하고 몇몇 친문 의원들이 ‘전직 대통령 사저 앞 집회 시위 금지법’을 발의하는 모습을 보면 실소를 넘어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본인을 지지하는 이들이 정치적 반대자들에게 문자 폭탄을 보내고 소셜미디어(SNS)와 뉴스 댓글 등을 통해 온갖 욕설을 퍼부을 때, 문 전 대통령은 ‘양념’이라며 두둔하지 않았던가? 그 고춧가루가 남의 눈에 들어갈 때는 괜찮고, 본인 콧구멍으로 들어가니 그제야 매운가. 민주당 의원과 지지자들이 이명박 전 대통령 사저 앞에서 ‘X박이’를 외쳐댔던 수많은 시위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때 저질렀던 일이 있으니 너희도 당해보라’는 말초적 보복 감정을 두둔할 수야 없다. 하지만 문 전 대통령과 민주당 및 그 지지 세력이 이제야 ‘거리의 함성’을 금지하려 드는 것은 파렴치하다.

<친절한 금자씨>로 돌아와 보자. 금자는 복수를 시작하기 전 원모의 부모를 만나 손가락을 자르며 사죄한다. 감옥에 가 있는 동안 금자의 딸은 해외로 입양가 있었다. 찾아온 금자에게 한국말을 못하는 딸이 영어로 말한다. “적어도 세 번 이상은 미안하다고 해.” 문 전 대통령이 해야 할 일도 그런 것 아닌가. 폭력적인 정치 문화를 만들고, 조장하고, 심지어 정치적 이득까지 봤던 본인과 지지자들의 행태에 대해, 적어도 세 번 이상은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확성기에 확성기로 맞서는 원시적 보복의 연쇄를 끝내는 해법은 간단하다. 보편타당한 법을 만들고 지키면 되는 것이다. 기원전 1750년 무렵의 인류도 알고 있던 진리다. 그런데 민주당은 2022년의 대한민국 법을 함무라비 법전만도 못하게 만들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다시 한번 <친절한 금자씨>의 명대사를 내뱉을 수밖에. “너나 잘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