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의령에서 3년 만에 열린 소힘겨루기 대회 결승에 오른 두 황소가 대결을 펼치고 있다. 팽팽하게 기싸움을 벌이다 왼쪽 소가 먼저 달아나는 장면을 순간 포착했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아, 이게 무슨 일입니까. 천하의 ‘갑두’가 도망을 치네요.”

대이변이 일어났다. 46연승 무패 신화, 천하무적 황소 갑두가 패했다. 13일 오후 경남 의령군 전통 농경문화 테마파크 민속경기장. 제33회 의령 전국 민속 소힘겨루기 대회 백두급 결승전에서 일어난 일이다. 체중 1t이 넘는 갑두는 전국을 돌면서 열리는 민속 소힘겨루기 대회에서 한 번도 져본 적 없는 대스타. “900㎏ ‘강투’가 갑두를 누르고 백두급 타이틀 매치 새 강자로 등극했습니다. 여러분, 두 선수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코로나19 여파로 중단됐던 소힘겨루기 대회가 경남 의령에서 3년 만에 열렸다. 100년 전통의 이 대회 참가를 위해 전국에서 힘 좀 쓴다는 황소 186마리가 집결했다. 9일부터 백두(800㎏ 이상)·한라(700~800㎏)·태백(600~700㎏)의 3체급으로 나눠 토너먼트 경기 방식으로 예선을 시작해 이날 4강부터 대망의 결승까지 열렸다. 경기장 밖에선 먹거리 장터가 종일 북적거렸고, 결승이 가까울수록 장내 분위기도 후끈 달아올랐다. 코로나 이후 전국에서 처음으로 열린 의령 소힘겨루기 대회 현장을 지난 13일 <아무튼, 주말>이 찾았다.

경남 의령에서 열린 소힘겨루기 대회 결승에서 두 황소가 머리를 맞대고 기싸움을 하고 있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뿔치기·밀치기·뿔걸이...기술의 향연

오전 11시, 태백급 황소들의 4강 대결로 문이 열렸다. 우주(소 주인) 두 사람이 소를 끌고 경기장으로 입장하고, 장내가 조용해지면 심판의 호각 소리와 함께 경기가 시작된다. 짧게는 1분 이내, 길게는 35분 이상 이어졌다. 두 소가 팽팽하게 신경전을 벌이다 먼저 달아나는 소가 지는 게임이다. 장내 아나운서가 화려한 입담으로 분위기를 계속 띄웠다. “자, 복례와 토르의 한강급 매치! 복례는 근성과 지구력을 갖고 있는 친구예요. 토르는 민속대회 첫 출전입니다. 토르가 노련한 복례를 맞아서 어떻게 싸움을 해나갈 것인가….”

복례와 토르의 대결은 이날 경기 중 가장 역동적이었다. 머리를 맞대고 상대를 노려보며 밀어내다 이내 떨어지기를 수차례. 앞발로 모래 바닥을 긁던 토르가 다시 한 발 앞으로 몸을 들이밀자 “으리얏차!” 아나운서의 함성이 쩌렁쩌렁 울렸다. 두 선수는 뿔을 좌우로 흔들면서 상대의 뿔을 치며 공격하는 ‘뿔치기’, 상대의 뿔을 걸어 누르는 ‘뿔걸이’, 온 힘을 다해 밀어붙이는 ‘밀치기’ 등 다양한 기술을 구사했다. “복례야, 한 번 더 가자!” “토르 잘하고 있어!” 우주의 외침과 청중의 응원이 원형 경기장 안에서 뒤섞였다. “보세요, 이제 곧 혀를 먼저 내미는 소가 지는 겁니다.” 해설자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토르가 혀를 쑥 내밀더니 거칠게 숨을 내쉬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복례 승! 무려 35분 25초가 걸렸다.

46연승 무패신화를 기록 중이던 갑두(만 여덟 살). 이번 대회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은 대스타였지만, 모두의 예상을 깨고 결승에서 1분 28초 만에 강투(만 아홉 살)에게 패했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천하무적 갑두를 누른 신흥 강자

이번 대회 최고 화제는 갑두의 출전이었다. 만 여덟 살, 체중 1050㎏, 체장 180㎝, 주특기는 ‘목감아돌리기’. 경북 청도를 주름잡던 갑두는 지난 5월 경남 의령으로 ‘이적’했다. 몸값이 무려 1억5000만원. “여러분, 이 선수는 기립 박수로 맞아야 됩니다. 무패 신화, 극강의 공격력, 갑두를 맞이해주시기 바랍니다!”

드디어 마지막 경기인 백두급 결승전이 시작됐다. 이에 맞서는 강투(만 아홉 살) 역시 만만한 소는 아니다. 2018년, 2019년 우승 전력이 있지만, 두 소가 맞붙은 건 이날이 처음. 모두 갑두의 승리를 예견했으나 대반전이 일어났다. 육중한 몸을 땅에 딛고 머리를 흔들던 갑두가 슬금슬금 뒷걸음치더니 도망가기 시작했다. 1분28초 만에 경기 끝. 마치 천하의 이만기를 누르고 백두장사 타이틀을 거머쥔 강호동처럼, 새로운 강자 강투가 뿔 위에 꽃을 걸고 늠름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천하장사 만만세~” 씨름판의 그 노래가 장내에 울려퍼졌다.

백두급 결승에서 우승한 강투가 뿔 위에 꽃을 걸고 퇴장하는 모습. / 김종연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강투의 주인 하욱재(45)씨는 “올해 2월 몸값 4000만원에 강투를 인수했는데, 천하의 갑두를 이길 거라곤 상상을 못 했다”고 했다. 이날 하씨는 우승 상금 1000만원 중 500만원을 어려운 축산 농가를 돕고 소힘겨루기 대회 발전을 위해 써달라며 쾌척했다. 준우승을 차지한 갑두의 주인 왕재구(65)씨도 “이길 만한 소가 이긴 것”이라며 사재 500만원을 협회에 기탁했다. 두 사람은 이번 대회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분주히 움직인 주역들이다. 왕씨는 대한민속소힘겨루기협회 의령지회 회장, 하씨는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하씨는 “회장님 소를 이겨서 황송하다”며 “갑두가 예선을 계속 치르면서 컨디션이 안 좋았던 것 같다. 강투가 운이 좋았다”고 했다.

◇전통 놀이냐 동물 학대냐

이날 경기는 ‘소싸움 대회’가 아니라 ‘소힘겨루기 대회’라는 명칭으로 열렸다. 협회 측은 “소싸움은 우리 농경사회가 소를 기르기 시작할 때부터 자연 발생적으로 시작됐고, 축제와 같은 풍속으로 정착한 민속놀이지만, 싸움이라는 단어에서 부정적 어감이 느껴지고 오해를 부를 수 있어서 명칭을 순화하자는 의견이 예전부터 있었다”며 “논의 끝에 올해부터 소힘겨루기 대회라고 명칭을 변경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동물 보호 단체들은 “말 못 하는 소를 훈련시켜 싸움을 붙이는 건 동물 학대로 즐거움을 얻는 비윤리적 행위”라고 주장한다. 지난 2019년엔 전북 정읍시가 매년 10월 열리는 소싸움 대회를 위해 추경예산 1억1360만원을 편성하려다 동물 보호 단체의 항의로 전액 삭감했다. 동물 보호 단체들은 정읍시의 소싸움 추경을 무산시키기 위해 1인 시위를 하고 인터넷에 동영상을 올리는 등 수개월간 ‘예산깎겠소’ 캠페인을 벌였다. “초식동물인 소에게 뱀탕과 개소주를 먹이고, 산비탈에 매달리게 하는 등 혹독한 훈련을 시키는 건 명백한 학대다. 뿔이 부딪혀 소들이 피 흘리고 상처입는 경우도 많아 폐지해야 한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반면 대한민속소힘겨루기협회 측은 “소들은 졌다고 생각하면 바로 도망가기 때문에 피를 철철 흘리는 격한 싸움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어느 한 쪽에서 힘이 부쳐 꽁무니를 빼면 바로 경기가 중단된다”며 “뿔도 뾰족하지 않게 끝부분 직경을 1㎝ 이상으로 유지해야 하는 규정이 있고, 충분한 휴식기를 주는 등 시대 변화에 발맞춰 변화하고 있다”고 반박한다. 협회 관계자는 “전통 농경문화가 낳은 민속놀이이자 조상 대대로 전해온 무형 유산으로 보존 가치가 높다. 이웃 나라 일본에선 이미 1978년 니가타 나가오카시의 야마코시 소싸움을 국가무형문화재로 등록할 정도”라며 “우리도 소힘겨루기 대회를 보존·활성화해서 국가무형유산에 등재해야 한다”고 했다.

경남 의령에서 열린 소힘겨루기 대회가 끝난 후, 경기장 옆 계류장에서 소들이 쉬고 있는 모습. /김종연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전국 11개 지자체서 연중 행사

현행 동물보호법 제8조는 도박과 광고, 오락, 유흥 등의 목적으로 동물에게 상해를 입히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다만 민속경기 등 농림축산식품부령으로 정하는 경우는 제외한다. 농식품부는 지방자치단체장이 주관·주최하는 소싸움 대회를 민속경기로 고시하고 있다. 개싸움이나 닭싸움은 단속 대상이지만, 소싸움은 민속경기에 포함돼 단속 대상이 아니다. 코로나 직전까지 의령을 비롯해 진주·창원·김해·함양·창녕(이상 경남), 보은(충북), 청도(경북) 등 전국 11개 지자체에서 매년 소힘겨루기 대회를 열었다.

협회에 따르면 현재 전국에서 500여 농가가 힘겨루기 소를 기르고 있다. 20년 전엔 2000여 농가가 사육하고, 예선부터 전국에서 청중이 몰려들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이날 우승의 주역인 하욱재씨는 4대째 힘겨루기 소를 기르는 우주. 그는 “뱀탕이니 개소주니 하는 건 옛말이고 초식동물이라 쌀·콩·보리를 넣고 죽을 끓여서 세 끼를 준다”며 “주인들은 소가 죽으면 무덤을 만들고 비석까지 세워줄 정도로 가족처럼 아끼는 사람들이다. 일각에서 부분만 보고 학대라고 할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코로나 이후 3년 만에 열리는 대회 결승을 보러 경기 성남에서 왔다는 진성현(42)씨는 “머리를 오래 맞대고 있던 소들이 이마가 벌게지는 걸 보면서 마음이 안 좋았지만, 생각보다 경기가 점잖더라. 전통 놀이의 계승 발전이라는 의미를 잘 살리고, 소들이 최대한 다치지 않게 이어가면 좋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