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강열, ‘작품 A’, 1975. 작가가 남긴 마지막 염색 작품으로, 꽃과 새를 과감하게 디자인한 것이 특징이다.

“만날 때 반갑고 헤어질 때 개운한 사람이었고, 일을 많이 하면서도 공을 내세우지 않는 사람, 도와주고도 모르는 척하는 사람, 돈이 없어도 구차한 얼굴을 보이지 않았던 사나이, 좋아지면 친구나 선배를 가릴 것 없이 깊이 마음을 쏟는 성품의 사나이, 옳다고 판단이 나면 끝까지 고집을 버리지 않는 사나이, 그가 바로 유형(劉兄)이었다.”

한국 전통미술을 소개한 베스트셀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저자, 최순우(1916~1984)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쓴 글이다. 최순우는 개성 출신의 전통미술 연구자였지만, 유독 같은 시대를 살았던 근대미술가들과 친했다. 김환기, 박수근, 이성자, 장욱진 등 동시대 어떤 화가 이야기를 봐도 최순우가 등장한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최순우의 절친 중의 절친이 있었으니, 이 글에 나오는 ‘유형’, 즉 유강열(1920~1976)이었다.

유강열, ‘극락조’, 목판, 1950년대,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유강열의 초기 목판화는 굵고 강렬한 검은 선을 통해 강한 인상을 준다.

◇건축에서 공예로

유강열은 1920년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났다. ‘북청 물장수’ 할 때의 그 북청이다. 생활력이 강하고 교육열이 높기로 이름난 고장이었다. 부친은 함흥 질소비료회사 중역이었으니, 꽤 부유한 중산층 가정이었다. 유강열은 중학교 때부터 ‘조기 유학생’으로 일본에 보내져 아자부(麻布)중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명문사립 조치대(上智大) 건축과에 입학했으나 1년 후 그만두고, 일본미술학교에서 공예도안과를 전공했다.

1938년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주도로 도쿄에서 열렸던 ‘조선 현대민예전’이 유강열의 전과(轉科)에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추측이 있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조선 민예품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일본인으로, 왕이나 귀족이 향유하던 고급 예술 못지않게, 이름 없는 서민들이 필요에 의해 제작한 다종다양한 민예품이 조선 미술의 정수를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을 증명하기 위해 조선 민예품을 직접 수집, 연구, 전시하는 등 ‘민예운동’이라고 불릴 만한 사회활동을 전방위적으로 펼쳤다.

유강열은 공예 실기 교육이 강했던 일본미술학교에 들어가, 염색과 판화를 본격적으로 공부했다. 최순우의 인물평에서 보듯, 그는 묵묵하고 근면성실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평생 주변 사람의 신뢰를 빨리 얻어내는 재주가 있었다. 1942년 젊은 청년들은 거의 학도병으로 끌려가던 시절에도, 유강열은 황실의 염색 일을 도맡았던 ‘사이토’라는 일본 공예가의 연구소에 있으면서 징병을 피했다. 사이토가 그를 지하실에 숨겨주면서, 일도 시키고 지도도 했다고 한다.

유강열, ‘꽃과 나비’, 천에 납염, 1962. 아트센터 나비 소장. 납염기법은 해방 후 유강열이 한국에서 처음으로 재생시킨 기술이다. 신라시대 성행하던 이 기법을 부활시켰다며 언론과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공예운동을 위하여

해방 후 귀국한 유강열은 교사 생활을 하다가 6·25전쟁 중 흥남 철수작전 때 극적으로 월남했다. 여느 피란민과 마찬가지로 가족과 헤어졌고 무일푼이었을 텐데도, 그는 놀라울 정도로 빠른 사회 적응력을 보였다. 유강열은 피란민들이 아우성치는 부산에서 1951년 제1회 수출공예품전시회를 기획했다. 같은 해 통영에 경상남도공예기술원 양성소를 개설하고 주임강사를 맡았다. 전설적인 나전칠기 장인 김봉룡(1902~1994)을 모셔와 나전칠기 기술을 전수시키는 한편, 이중섭과 같은 유능한 당대 미술가를 불러 근대적 조형 실기를 가르치게 했다. 이중섭의 짧은 생애 동안 대부분의 역작은 통영에서 제작되었는데, 그의 통영 생활이 가능하도록 지원한 인물이 바로 유강열이었다.

1954년 통영에서 열렸던 작가 4인전 당시 이중섭 모습(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 소장. 장정순, 신영옥 기증). 유강열의 부인 장정순 여사가 간직하다가 제자 신영옥을 통해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자료에 포함되어 있었다.

유강열은 조선인 스스로는 별반 귀하게 여기지도 않는 공예품이 실은 매우 우수한 문화유산이라는 사실에 대해 뚜렷한 인식과 안목을 갖고 있었다.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도 그런 인식을 하는데, 한국인이 그 가치를 모르고 가만히 있는 것이 말이 되겠는가? 유강열은 우리 전통공예가 새로운 시대의 조형 언어와 접목하여 세계로 나가 빛을 보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열망했다.

최순우는 1951년 수출공예품전시회에서 김환기의 소개로 유강열을 처음 만났고, 금방 그의 진가를 알아봤던 것 같다. 전쟁이 끝나고 국립박물관이 서울로 옮겨간 후인 1954년, 최순우는 유강열에게 얼른 서울로 와 자신을 도와 달라고 조르는 편지를 여러 차례 썼다. 미국 록펠러재단 후원으로 국립박물관에 미술연구소가 신설되면서 기예부(技藝部) 주임을 맡기기 위해서였다. 유강열은 이 연구소에서 염색과 판화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한편, 간송 전형필의 집 근처에 가마터를 만들어 근대도자기 제작을 시도했던 작가 정규를 돕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최순우가 김재원 국립박물관장을 도와 국보 문화재를 해외에 소개하는 여러 전시회를 꾸릴 때 힘을 보태기도 했다.

1953년 제2회 국전 때 문교부장관상을 받은 유강열의 아플리케 작품 ‘가을’ 앞에서 최순우(좌)와 유강열 모습. 이 작품은 전쟁 구호물자인 의복 천을 뜯고 오려 바느질한 것인데, 현재 소장처를 알 수 없다. /국립현대미술관

◇“일을 많이 하고도 공을 세우지 않는 사람”

1958년 유강열은 미국 록펠러재단의 후원으로 1년간 미국 연수를 갔다. 프랫 현대 그래픽아트센터에서 수학하면서, 판화 연구에 전념했다. 원래 유강열은 북방의 기세를 담은 강한 선의 목판화를 주로 제작했는데, 미국 체류기에는 에칭과 아쿠아틴트 등 다양한 기법을 연마하면서 세련된 감각의 도시 풍경을 제작하기도 했다. 1년 남짓한 미국 체류 기간에 제작된 그의 작품 양과 다양성은 실로 놀라운데, 만약 그가 작품만 제작하고 있었다면 얼마나 대단한 성과를 낼 수 있는 인물이었는지를 증명하는 것만 같다.

미국 체류 시기 뉴욕 맨해튼에서 찍은 유강열 사진.
유강열, ‘도시풍경’, 에칭, 1958,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유강열 기증). 미국 유학시기 작품이다.
유강열, ‘산과 새’, 에칭, 1959. 지난해 이건희컬렉션으로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됐다.

유강열은 귀국하자마자 김환기의 제안으로 홍익대학교 공예과 교수로 부임했다. 염색과 판화를 직접 가르치고 우수한 교수진을 꾸려, 새로운 시대 공예가를 양성하는 일에 매진했다. 또한 1960~70년대 국가 건설의 일환으로 각종 공공건축물이 건립되면서, 내부를 장식하는 실내디자인 업무를 상당히 많이 맡았다. 1963년 워커힐센터, 1966년 자유센터 승공관, 1970년 국립중앙박물관 신설 건물(현 국립민속박물관) 실내디자인, 1970년대 국회의사당 실내디자인, 1973년 어린이대공원 실내 설계 등 주요 건물에 유강열이 디자인한 모자이크 벽화, 대리석 바닥, 목재 문, 무대 막 등이 설치되었다.

“일을 많이 하면서도 공을 세우지 않는” 성품 때문에 우리가 모르고 지내왔지만, 지금도 여기저기 유강열의 흔적이 남아있다. 국회의사당 본회의장 문을 막고 중앙홀 바닥에 앉아 농성하는 사람들이 가끔 뉴스에 나올 때 유심히 보라. 그 본회의장의 육중한 현관과, 바닥의 대리석 장식이 모두 유강열과 그 제자들 작품이다. 십장생이 들어간 ‘민화(民畵)’ 모티프로 장식된 이 문은 ‘민의(民意)’를 받들어야 할 국회 본회의장의 현관 장식으로 적격이었다. 이곳을 드나드는 이들이 부디 그 의미를 한번쯤 생각해 주기를.

유강열, 남철균 외, ‘국회의사당 본회의장 현관’(1974).
유강열, 남철균 외, ‘국회의사당 중앙홀 바닥’(1974).
유강열, 남철균 외, ‘국회의사당 중앙홀 바닥’(1974).

유강열은 이런 대형 프로젝트를 하면서 번 돈을 전부 골동품 사는 데 썼다. 그는 야나기 무네요시가 도쿄에 ‘일본민예관’을 열었던 것처럼, 한국에 본격적인 공예박물관을 만들고 싶어 했다. 한국 공예의 우수성을 알리고, 후진 양성을 위한 교육의 장(場)을 마련하기 위해 박물관이 필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뚜렷한 목표가 있었고, 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았기에, 그는 쉴 새 없이 달렸다.

◇미완의 꿈인가

1976년 늦가을 최순우가 도쿄에 있을 때 타임지 도쿄 지사 기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최 선생, 미리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 전화를 들으십시오. 서울 홍익대 교수이며 최 선생의 가까운 친구 한 분이 오늘 새벽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있습니다.” 최순우는 유강열의 급서 소식을 이렇게 들었다. 유강열은 이날 새벽 심장마비로 56세의 생을 마감했다.

유강열의 마지막 연구조교였던 신영옥은 유강열이 죽기 하루 전날 밤, 우연히 신촌 길거리에서 그를 만났다고 한다. 술을 적당히 걸치고 택시를 잡으려는 유강열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눌 기회를 가졌다. 유강열은 “너는 열심히 해서 작가가 되라.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다”라는 격려의 말을 남기면서, 스스로 이렇게 되뇌었다고 한다. “나도 이제는 작품을 하려고 한다.”

시대의 사명이 그를 멀티플레이어로 만들었지만, 유강열도 온전히 자신을 위해 작품에 매진하고 싶은 바람이 있었던 것이다. 그가 죽고 나서 외국에서 많은 양의 미술 재료가 집으로 배송되어 와서, 이를 증명하는 것 같았다고, 신영옥은 회고했다.

죽음 뒤는 남은 자의 몫이다. 유강열의 제자는 유독 많았다. 한국미술관을 열었던 고(故) 김윤순 관장이 해방 전 영생여고보 제자였고, 통영에서 옻칠공예로 일가를 이룬 김성수는 통영시대 제자이다. 화문석을 현대화한 곽계정, 염색공예가 이혜선, 판화가 송번수, 목공예가 최승천·곽대웅 등이 모두 홍익대에서 수학한 유강열의 제자다. 그의 제자와 그의 제자의 제자들이 이제 한국 공예의 우수성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고 있으니, 유강열의 꿈은 어쨌든 계속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유강열, ‘정물’, 1969, 지판.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가족으로는 사실혼 관계의 부인이 있었다. 장정순(1929~2008) 여사는 원래 유강열 사촌 형의 아내였는데, 6·25전쟁 중 유강열과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복수를 위해 늘 칼을 품고 다녔다는 사촌 형을 피해, 유강열과 장정순은 평생 속죄하는 삶을 살았다. 어떤 식으로든 사회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되려 했던 유강열의 열망은 그런 속죄의 산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유강열 사후 장정순은 30여 년간 홀로 지내면서, 2000년과 2004년 두 차례에 걸쳐 유강열이 평생 모았던 유물 650여 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현재 용산 기증관의 ‘유강열실’이 그 실체이다. 공예박물관을 만들고 싶어 하던 유강열의 꿈은 죽은 지 28년이 지난 후 그의 부인에 의해 이렇게나마 실현된 셈이다.

유강열, ‘작품’, 1976, 실크스크린,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유강열은 전통 문양이나 민화에서 따온 이미지를 현대적 형태와 색채로 변형하는 작업에 관심이 많았다.

유강열이 격려한 대로 훌륭한 섬유공예 작가로 성장한 신영옥은 장정순을 끝까지 보필하다가, 그녀가 최후까지 간직했던 귀중한 미술자료 3300여 점을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했다. 작가 개인뿐 아니라, 한국 미술사 전반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자료들이다. 한편, 일찍이 안목이 높았던 고 이건희 회장은 유강열의 작품을 다수 소장했는데, 이 중 68점을 작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했다. 살아 생전 유강열의 꿈은 미완에 그쳤을지 몰라도, 그가 모으고 남긴 유산은 세대를 이어 계속 보존되고 공유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