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밤 12시 45분이야/ 네가 무슨 말을 하든 상관없어/ 난 그냥 오늘 밤 미친 듯이 마실 거야.”
영국 싱어송라이터 이담(Etham·25)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창덕궁이 보이는 한옥 레스토랑 ‘미쉬매쉬’의 공간에 스며든다. 그가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연주하는 기타의 선율이 한옥의 나무 벽면과 부딪혀 더욱 편안해진다.
그가 부른 곡은 지난해 발표한 ‘12:45(stripped)’. 이 곡은 국내에서 엄청난 인기를 불러일으키며 멜론 해외 종합차트에 108주간 상위권에 올랐다. 가수 임영웅, 보이그룹 스트레이 키즈의 현진, 가수 김우진 등이 커버(따라 부르기) 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이런 그의 별명은 ‘영국 고막 남친’. 매번 랜선으로만 국내 팬들과 데이트하던 그가 지난달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3년 만에 열린 ‘서울재즈페스티벌’에 출연하기 위해서다. 지난 27일 첫 내한 공연에서 인생 첫 떼창을 경험한 그는 한국을 더욱 느끼고 싶다고 했다. 인생 첫 서울을 즐기기에 서촌, 부암동만 한 곳이 있을까. 청와대 개방 이후 더욱 핫해진 그곳을 이담과 함께 갔다. 안내는 20년 서촌 토박이 설재우 로컬루트 대표가 맡았다.
◇영화 ‘기생충’과 윤동주
이담은 한국 문화 애호가다. 영화 ‘기생충’과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도 다 보았고, K팝도 즐겨 듣는다고 했다. 보이그룹 몬스타엑스 기현의 첫 솔로 앨범 ‘콤마(COMMA)’에도 참여했다. 이런 그와 먼저 간 곳은 영화 ‘기생충’ 촬영지. 주인공 기택(송강호) 가족이 박 사장(이선균) 집에서 도망치듯 나와 계단을 내려온 뒤 터널을 걸어가는 장면을 찍은 ‘자하문 터널’이다.
1986년 개통돼 서울 종로구 부암동과 청운동을 연결하는 터널로, 입구에는 영화 포스터처럼 눈을 가리고 인증샷을 찍을 수 있는 설치물이 마련돼 있다. 여기서 이담은 기생충 포스터처럼 사진을 찍고, 485m의 자하문 터널을 걸어서 건넜다.
“굉장하네요. 전 기생충 흑백버전까지 챙겨볼 정도로 팬이었거든요. 지금 영국에는 한국 문화에 관심 있어 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아요. 한국 영화나 음악은 그 자신만의 특색이 잘 드러나는 것 같아요.”
자하문 터널을 나와 산을 오르면 ‘윤동주 문학관’과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 나타난다.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를 다닐 때 종로구 누상동에 있는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후배 정병욱과 함께 하숙을 했는데, 그는 매일 밤 이 언덕에 올라 시정(詩情)을 다듬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시에는 밤과 별이 자주 나타난다.
“저도 곡을 쓸 때 가사는 주로 밤에 쓰곤 해요. 조금 더 감성적으로 변하거든요. 특히 곡 ‘12:45′는 동료들과 밤에 술 한잔을 하며 작업하다가 나온 곡이고요. 스튜디오에서 코드랑 드럼을 치고 놀다가 한 부분이 나왔는데, 그러자 나머지는 물 흐르듯이 완성이 됐어요. 당시 작업하던 시점이 딱 화요일 새벽 12:45쯤이어서 곡 제목이 됐지요.”
이 언덕은 한양도성 성곽길과 연결돼 있다. 서울을 내려다보며 성곽을 따라 내려오는 길이다. 천만 인구가 거주하는 대도시에 이 정도 규모의 옛 성곽이 남아있는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현재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하려는 노력이 이뤄지고 있다.
이담이 서 있던 곳은 북악산. 건너편으로 남산이 보였다. “서울에 처음 와서 제일 먼저 눈에 띄었던 것이 바로 도시에 산이 많다는 점이었어요. 제가 태어난 레딩에는 산이 없거든요.” “레딩FC에서 설기현 선수가 뛰었었는데 혹시 그를 알고 있나요?” “전 사실 첼시 팬이라 레딩FC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몰라요, 하하! 손흥민 선수는 잘 알아요. 정말 대단한 선수라고 생각해요.”
◇숲속 쉼터와 초소 책방
한양도성 성곽길을 따라 걸어 내려오면 우거진 숲속 투명한 빛을 내는 신비로운 건물이 보인다. 인왕산 숲속 쉼터다. 과거 병사들이 거주하던 인왕 3분초였던 곳이다. 이 길은 1968년 김신조 사태(1968년 1월 21일 북한 특수부대 소속 31명이 청와대 습격을 위해 인근 서울 세검정 고개까지 침투하였다가 미수에 그친 사건)로 오랫동안 시민들의 출입이 통제됐었다. 이 사건으로 당시 인왕산과 북악산에 30여 개의 군초소 및 경계시설이 설치됐고, 2018년 인왕산 전면 개방에 따라 관련 군초소 및 경계시설은 대부분 철거되었다. 그러나 병사들의 거주 공간이었던 인왕 3분초는 ‘숲속 쉼터’로, 경찰 초소는 ‘초소 책방’으로 살려 보존했다.
숲속 쉼터는 숲속 내 투명 새장 같은 모습이다. 안에서는 360도로 파노라마 뷰가 펼쳐진다. 가만히 앉아 밖을 보며 쉴 수 있다. 걸어서 5분 정도 내려가면 ‘인왕산 초소 책방 : 더 숲’이 나온다. 책방을 겸한 카페다. 자연과 관련해 선별한 책은 볼 수도 있고, 구입할 수도 있다. 책방 곳곳에는 초소의 철제 출입문, 초소의 난방용 보일러를 위한 기름탱크 등 기존 경찰 초소의 구조물이 남아 있다. 공공건축가 이충기 서울시립대 교수가 참여한 이 건물은 어디든 안과 밖이 서로 통하는 유리로 돼 있다. 인왕산 초소책방과 숲속 쉼터는 둘 다 제39회 서울특별시 건축상 우수상을 받았다. 커피를 사 들고 2층 테라스로 이동하니 인왕산 숲 사이로 서울 풍경이 펼쳐진다.
“런던 숲과 서울 숲은 그 풍경이 달라요. 서울이 좀 더 예쁘게 조성된 느낌이에요. 서울은 고층 건물과 나무가 잘 조화된 것 같아요. 런던은 하이드 파크를 제외하고는 고층 건물만 빽빽이 세워져 있거든요. 지금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요. 전 자연으로부터도 음악에 대한 영감을 많이 받는 편인데, 가능하다면 당장 이곳에 눌러앉아 살고 싶은 심정이에요!” 이럴 때 떠오르는 그의 노래는 ‘퍼포스(purpose)’다.
”난 천국에 있는 기분이야/ 아무도 우릴 갈라놓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기분/…/ 난 벗어날 수가 없어/ 복잡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
◇ 불국사와 차운기의 ‘12주’
이담이 한국에 들어온 건 지난 26일. 그는 그 주 주말 갑자기 봉은사에 간 사진을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렸다.
“전 코엑스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묵었는데, 호텔 방 밖으로 절이 보였어요. 영국에는 주로 교회가 많기 때문에 절의 건축 양식과 역사가 흥미롭게 느껴졌거든요.”
그의 말을 듣고 설재우 대표가 소개한 서촌 내 절은 불국사다. 원래 사대문 안에는 절이 없다. 조선시대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는 억제하는 숭유억불 정책으로 멀쩡한 절도 산자락으로 추방당하거나 방화로 사라졌다. 1895년까지 승려는 천민급 신분으로 도성 출입마저 금지됐다. 이 때문에 한양도성 사대문 안에 절이 생긴다는 건 조선시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사대문에서 가장 가까웠던 절이 봉은사였다. 종로에 있는 조계사도 실질적 창건은 구한말 순종 융희 4년인 1910년에 이뤄졌다.
서촌 불국사는 2층짜리 건물로, 1층은 종무소, 2층이 대웅전이다. 절 담장 너머에는 대나무 숲이 우거져 있고, 그 안에는 불상도 있다. 여기서 20분 동안 걸어 올라가면 석굴암도 있다. 경주 석굴암처럼 바위 속에 불상이 있는 것이 아닌, 커다란 바위가 겹쳐 있는 공간에 문을 만들어 그 안에 불상을 모셔 놓은 자그마한 암자다. 서울 도심에 이런 공간이 있다니! 묘한 마음을 갖고 걸어 내려간다.
이렇게 걸어 내려오다 보면 더 묘한 건물이 나타난다. 서촌 ‘12주 건물’. 한국의 가우디로 불린 건축가 고(故) 차운기가 3년 만에 지은 건물이다. 재건여수교회 등 독특하고 창의적인 건물로 한국 건축계에 충격을 준 차운기는 2001년 위암으로 46세 나이에 세상을 뜬 천재 건축가. 허영만 화백의 친구로 식객 52화에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천장에는 튀어나온 눈알이 조명으로 달려있고, 실내로 들어가는 문은 철근을 나뭇가지로 표현했다. 쓰다 남은 각종 자재를 재활용해 지어 하나의 현대 조각품 같기도 하다. 처마에는 녹슨 철판이 박쥐의 날개처럼 달렸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나오는 성(城)의 실사판 같다. 차운기의 유작으로, 나머지 완공은 그의 애제자인 원희연 건축가가 진행했다.
이담은 태어나 가장 멀리 여행 갔던 게 아홉 살 때 태국을 간 것이라고 했다. 그런 그에게 이번 한국 방문은 특별한 의미. ‘영국이 낳고 한국이 키운 가수’로도 불리는 그는 신곡 ‘유어 더 리즌(You’re the reason)’의 첫 라이브를 한국에서 선보이기도 했다.
”난 길을 잃은 적도/ 가슴 아팠던 적도 있었지만/ 당신과는 이런 모든 얘기를 할 수 있어요/ 당신이 날 그렇게 만들어줘요.”
이담이 말했다. “서울은 굉장히 색다르고 독특한 도시예요. 이번 여행이 저에게 많은 영감을 줄 것 같아요. 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