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금주를 했다. ‘한동안’이라는 말도 적었으니 절주라고 해야겠지만. 다시 술을 마시기로 한 것은 다자이 오사무 때문이다. 그의 기일에 술 한잔 하지 않을 수 없어서. 어제였던 6월 19일은 그를 기리는 날이었다. 그의 시체가 발견된 날이자 태어난 날. 이 세상에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 날. 앵두기였다. 다자이 오사무를 기리는 이들은 이 날을 앵두기로 부른다고.

그가 죽기 한 달 전에 발표한 단편소설의 제목이 ‘앵두’이고, 마침 6월 19일 무렵이 앵두철이기도 해서라고 들었다. 앵두기에는 무엇을 하나? 앵두를 먹나? 아님 술을 마시나? 어떤 술을 마시지? 그는 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람이었고, 나는 그의 술 먹는 자세를 높이 사는 사람이므로 앵두로 술을 담가 그의 기일에 마시고 싶었다. 술에 대한 책도 쓰시고 술도 담그시는 분께 앵두주를 담그는 법까지 알아두었다. 이럴 때 나는 꽤나 적극적이 된다. 문제는, 앵두를 구할 수 없었다는 것.

아주 달지도, 쓰지도 않은 사과주 한 잔. /플리커

5월부터 요 며칠 전까지, 나는 앵두를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에 전화를 해보고 발품을 팔았다. 매일 앵두를 구하겠다고 나선 것은 아니지만 틈이 날 때마다 앵두를 팔 만한 곳들에 수소문했다. 그러나 실패. 이렇게 앵두를 구하는 게 어려울 줄 몰랐다. 앵두가 이렇게 귀한 거였나 싶었고. 앵두가 없으니 앵두주도 없었다. 그럼 어떻게 기리지?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 봤는데, 좀 놀랐다. 그의 묘비에 앵두를 박아넣고 있었다. 그래서 도쿄의 미타카에 있는 다자이 오사무의 묘석에는 앵두가 박혀 있다는 이야기. ‘다자이 오사무’라는 이름을 가타카나로 음각한 자리에 앵두가 박혀 있었다. 앵두로 ‘다자이 오사무’라는 이름이 쓰인 것이다. 와…

추앙일까, 사랑일까? 다자이 오사무에 대한 마음들은 하도 지극해 보여 사랑이란 말로는 모자라 보인다. 그런데 ‘우러르다’라고 하기에는 역시 정중함이 걸린달까. 추앙하려면, 공경하여야 하고, 공경하다 보면 지루해지기도 한다. 다자이 오사무를 기리는 이들의 마음에는 지루함 따위는 전혀 없는 것 같아서 추앙은 아니겠다. 그보다는 마음껏 귀여워해 주고 있는 게 아닐까. 다자이 오사무를 기리는 사람들이 말이다.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참 전에 죽은 사람을 귀여워할 수 있나 싶어서.

나도 그렇다. 그는 참 귀엽다. 귀엽고, 또 귀여워서 그의 글을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아이, 귀여워”라고 말하게 된다. 본인이 아무 일에나 쉽게 기뻐하는 성격이라며 길가 유리에 자기 모습이 비치면 웃으면서 목례를 했다는 이야기를 하시는데, 어떻게 귀엽다고 하지 않을 수 있나? 그러던 중 그의 술 마시는 자세에 대해 꽤나 긴 글을 쓴 적이 있다. 다자이 오사무처럼 마시기란 이런 것이라며 나는 이렇게 썼다. “다자이 오사무처럼 마시기란 무엇인가. 일단 마실만큼 마셔야 한다. 이런저런 술을 마셔보고, 좋아하는 술을 만들고, 주량에 대해 알고, 비틀거리거나 토하고, 실수를 하고, 기억을 하거나 하지 못하고, 술버릇에 대해 알고, 알면서 또 실수를 하고, 여럿이 마시고, 혼자도 마시고, 절주나 금주를 하고, 다시 야금야금 마시다가 아예 마시지 못하는 시간이 오는 것, 그게 다자이 오사무처럼 마시기다. 그러니까 술에 관해 할 수 있는 것을 다해 보는 것.”(『영롱보다 몽롱』, 을유문화사)

맞다. 내가 절주 혹은 금주를 했던 것은 ‘다자이 오사무처럼 마시기’의 일환이었다. 이 말을 만든 것도 나, 실천하는 사람도 나. 오래, 잘, 꾸준히 마시고 싶어서 쉴 수 있을 때 쉬려고 한다. 쉬는 동안 금주가 끝나고 마실 술을 그리워할 수 있어서 좋다는 것도 말씀드리고 싶다. 그리움이 있는 날들도 꽤나 괜찮다고. 저 글의 제목이 ‘다자이 오사무처럼 마시기’라는 것도 숨길 필요가 없어 보인다. 이러니 내가 앵두주를 먹겠다고 설쳤던 것이다.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는 생전에 앵두주 같은 걸 먹어보지 않은 듯하고, 그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그러니까 다분히 자의적으로 그를 기리고 싶었던 것이지만.

그렇다면 무엇을 마시지? 무엇을 마실까 하다가 사과주를 마셨다. 그의 고향은 아오모리고, 아오모리의 특산물은 사과주라는 걸 이야기해드리고 싶다. 아오모리에서는 온갖 종류의 사과주가 생산되어 지겨울 정도라고. 아오모리를 다녀온 사람으로부터 사과즙, 사과주, 사과 과자, 사과 기념품으로 넘쳐나는 ‘진정한 사과 지옥’이었다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다자이 오사무는 고향의 술을 좋아했나? 전혀 아니다. 오히려 지겨워했다는 게 맞겠지. 흔하면 지겨운 것이다. 고향의 술이라는 것도 지겨웠을 테고. 큐라소와 포트와인 같은 술을 홀짝대며 십대를 보냈다는 그에게 사과술이란 소박하기 그지없었을 듯하다.

시드르를 마시기로 했다. 시드르는 도수는 5도에서 7도 정도 되고, 약간의 탄산기, 사과주스에 가까운 맛이 나는 술이다. 탄산기가 있는 사과술. 사과주스처럼 달지 않지만 다른 술들처럼 쓰지도 않다. 나는 술은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사과주는 그런 술은 아닌 것이다. 햇빛에 가까운 술이랄까. 잠깐 칼바도스를 마실까 고민하기도 했다. 시드르를 증류하면 칼바도스가 되는데, 칼바도스는 노르망디의 술이 아닌가? 또 레마르크가 쓴 ‘개선문’의 술이고. 칼바도스는 어쩐지 다자이 오사무와는 너무 멀리 있는 듯해 시드르를 마시기로 했다.

마음이 괴로울수록 필사적으로 즐거운 척하려고 한다는 말이 ‘앵두’에 있었다. 소설을 쓸 때도 마찬가지라고, 사는 게 슬퍼질 때는 반대로 가볍고 즐거운 스토리를 만들려고 한다고도. 이런 진심도 몰라주고 이제 다자이도 경박해졌다며 사람들이 자기를 하찮게 여긴다는 문장을 읽다가 아찔해졌다. 한없는 슬픔과 절망에서 나오는 귀여움이어서. 뭐랄까… 처절한 귀여움이었다. 그렇게까지 귀여우려면 얼마나 슬퍼야 했던 것일까도 싶고.

술을 마시는 것도 그런 걸까? 괴로울수록 필사적으로 즐겁고 싶어서 마시고. 사는 게 슬플수록 가볍고 즐겁고 싶어서 마시고. 그래서 사람들은 술을 마시는 걸까? 그러다가 가끔은 귀여워지기도 하고 그러는 걸까? 물론, 귀여움을 알아봐 줄 아는 사람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겠지만.

그런데 너무 멀쩡하다. 역시 시드르는 너무 가벼웠던 걸까? 아니면 그 가벼움이 가벼워 보이기도 하는 그를 기리기에 적당했던 걸까. 내가 마신 시드르의 이름은 ‘댄싱 파파’라는 걸 적어두고 싶다. 꼭 다자이가 부리는 슬픈 익살의 이름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