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예술 영화 감독, 공포 영화의 거장. 그 모든 수식어의 무거움은 인터뷰를 하는 동안 사라졌다. 최근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만난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나는 영화를 좋아하는 평범하고 재미없는 사람”이라며 “예술가보다는 장인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 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그는 빛과 프레임, 호흡의 절대적 거장이다.”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은 영화 ‘큐어’를 보고 구로사와 기요시(黒澤清·67) 감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 영화는 구로사와 감독이 1997년에 발표한 작품. 그러나 이 리뷰는 지난해 북미에서 화제가 됐다. ‘큐어’가 24년 만에 북미 극장에서 4K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부활해 개봉했기 때문이다.

국내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는 25년 만에 부활해 이달 6일 처음 정식 개봉한다. 그동안 ‘큐어’는 영화제 등을 통해서만 공개됐을 뿐, 정식으로 개봉한 적은 없다. 영화 마니아와 평론가들의 소문을 통해서만 전해져왔다.

최근 전주영화제에서 만난 구로사와 감독은 “나도 영문을 모르겠다”며 웃었다. 1983년 코미디 영화 ‘간다천음란전쟁’으로 데뷔해 상업 영화만 40여 년을 찍었지만, 최근에야 그는 거리에서 얼굴을 알아보는 젊은 영화 팬들에게 사인해주느라 바쁘다고 했다. 이른바 ‘역주행’ 인기다. 지난해에는 일본 정부의 문화 훈장인 ‘자수포상’도 받았다. 유명 감독들이 존경해 ‘유명한 무명 감독’ 소리를 듣다 데뷔 40년 만에 ‘스타 감독’으로 떠오른 그를 만났다.

◇일본 영화 예산으론 송강호 캐스팅 못 해

최근 ‘큐어’의 역주행 인기는 전 세계에서 아시아 영화가 주목받는 것과 관련이 있다. 영화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 ‘드라이브 마이 카’의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지옥’의 연상호 감독 등이 존경하는 감독으로 그를 꼽기 때문이다. 박찬욱 감독도 “누가 나에게 ‘현대사회 인간들의 삶이 어떤 거냐’고 물으면 구로사와 기요시의 작품을 보라고 말하겠다”고 했다.

25년 만에 첫 국내 개봉하는 1997년 영화 ‘큐어’. / 엠엔엠인터내셔널

-한국과 일본의 많은 감독이 존경하는 스승으로 꼽는다. 하마구치 감독은 “내겐 어마어마한 분, 영화 그 자체, 영화 만들기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배웠다”고 말했다.

“하마구치와는 15년 전 도쿄예술대학 대학원에서 학생과 스승으로 만났다. 그가 학생일 때 작품도 지금처럼 훌륭했다. 그런데 학생 작품이니 말은 해줘야 하니까 ‘굉장히 좋다. 그런데 대사나 움직임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이 부분을 이렇게 바꾸는 것이 좋지 않을까’라는 몇 가지 조언을 했다. 그런데 그다음 작품을 보니 전혀 반영되지 않았더라, 하하! 그렇게 하마구치는 자신만의 방식을 밀고 나가며 계속 작품을 만들었다.”

-봉 감독도 영화 ‘살인의 추억’을 만들 때 범인에 대한 영감을 ‘큐어’에서 받았다고 했다. 그는 “기요시 감독 팬클럽을 만든다면 하마구치와 내가 경쟁해야 할 것”이라는 말도 했다. 연 감독도 ‘지옥’을 만들 때 ‘큐어’에서 영감 받았다고 했다.

“나 역시 그들 팬이었다. 박찬욱 감독도 굉장히 좋아했고, 연 감독의 ‘부산행’과 ‘반도’도 다 보았다. 봉 감독의 ‘기생충’은 아카데미 수상 소식 이후에 봤다. 사실 보기 전에는 봉 감독이 넷플릭스와 작업도 하고 해서, 미국적 테마와 감성, 기법을 가지고 만든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과 염려가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 보니 아카데미를 전혀 의식하지 않은 봉 감독의 개성이 듬뿍 담긴 작품이었다. 가끔 후배들에게 그런 말은 한다. ‘내가 믿는 것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계속 작업을 해 나가면 된다’고. 그런 생각이 영향을 줬을 수는 있지만, 그들의 성과는 그들의 역량이다.”

-지금을 아시아 영화의 전성기로 보는 사람들도 많다. 최근 칸 국제영화제에서도 박 감독의 ‘헤어질 결심’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브로커’가 주목을 받았다.

“축하할 일이다. 그런데 두 감독 모두 그동안 칸에서 상을 많이 받지 않았나? 그들을 만난다면 ‘이제 충분하지 않니? 나한테 좀 양보해’ 할 것 같다. 하하! 봉준호, 하마구치, 박찬욱, 고레에다 감독이 아시아라는 한 틀에 있지만, 네 감독 모두 전혀 다른 영화를 만들고 있다. 미국이나 유럽의 많은 사람은 최근에야 아시아 영화를 처음 접했을 것이다. 그들이 조금씩 아시아 영화에 빠져들며 새로운 매력을 찾을수록 더 큰 전성기가 올 것이라고 본다.”

-최근 아시아 영화 특징은 박 감독이 중국 배우 탕웨이를 캐스팅하고, 고레에다 감독이 배우 송강호 등 한국 배우와 작업한다는 것이다.

“사실 고레에다 감독이 송강호 배우와 영화를 만든 걸 보고 너무 부러웠다. 내가 예전부터 가장 작업하고 싶었던 배우가 송강호다. 그는 영화마다 각각 다른 캐릭터로 녹아드는데, 송강호라는 개성은 버리지 않는다. 다양한 색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놓지 않는, 그 부분이 너무 좋아 알아봤는데 출연료가 너무 비싸더라. 현재 일본 영화 제작 시스템에서는 한국 유명 배우를 쓸 만한 자본이 없다(영화 ‘브로커’는 한국 자본으로 만든 영화다). 현재 일본 영화 대부분은 저예산으로 진행된다.”

-일본 영화 산업이 침체된 건가?

“내가 생각하는 일본 영화의 전성기는 1950~1960년대다. 그때 일본 영화는 지루하지 않았고, 굉장히 훌륭한 영화가 많았다. 그땐 스튜디오 시스템이 잘 발달해, 감독의 재능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 스태프, 모든 사람이 하나가 돼 영화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때와 비교해 지금 일본 영화계는 침체했고, 많이 지루해졌다. 이대로 없어지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좋지 않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재능 있는 감독들이 끊임없이 많은 영화를 제작하고 있다는 것이다. 해외에서도 뭔가 발견해준다면 명맥은 이어갈 것이다. 반면 한국 영화와 드라마는 절정기다. 많은 나라에서 인정받고 있고, 나 역시도 굉장히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가장 큰 공포는 ‘고독’

북미와 유럽에서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별명은 ‘일본의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다. ‘큐어’ ‘회로(2000년)’ ‘절규(2007년)’로 이어지는 호러 3부작으로 일본 공포 영화의 색깔을 규정했다고 평가받는다.

-사람들은 왜 공포 영화를 볼까.

“수천 년 전부터 인간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었다.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다시 태어나기도 하는 걸까.’ 이런 상상을 많이 하니까 죽은 다음 남겨진 세상, 혹은 새로운 세상에 갈 수 있다는 기대감에 누군가는 즐거울 것이고, 누군가는 무서울 것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종교도 태어나고, 귀신이라는 존재도 만들어졌다. 죽음에 대한 공포, 모르는 존재에 대한 공포는 무섭지만, 그다음은 뭐가 있을지에 대한 기대감에서 오는 즐거움은 있다.”

왼쪽부터 구로사와 감독의 영화 ‘도쿄 소나타’, ‘산책하는 침략자’, ‘스파이의 아내’. 일본군이 자행한 생체 실험을 다룬 ‘스파이의 아내’는 베니스국제영화제 감독상을 받았다. / 왓챠

-가장 큰 공포는?

“고독이다. 아무도 나와 대화해주지 않는 상황. 사람에게 왜 죽음에 대한 공포가 크냐고 생각해봤을 때, 어쩌면 내가 죽음으로써 그동안 대화해왔던 모든 사람과 단절돼 나밖에 없는 고독한 상태가 되는 걸 상상하기 때문이다. 정체를 알 수 있는 공포는 덜 무섭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공포가 가장 무섭다.”

-코로나 팬데믹은 어떤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바이러스이기 때문에 더 무섭다고 느끼는 것 같다. 바이러스 자체가 위험하긴 하지만, 무증상으로 끝나는 사람도 있고, 중증으로 가는 사람도 있다. 내가 코로나로 느낀 건 어떤 사건 하나로 인간의 행동이 굉장히 다양하게 나오는 것이다. 마스크를 쓸지 안 쓸지를 놓고도 싸우는 이런 다양성, 이게 더 무섭다.”

-가장 처음 본 공포 영화는?

“다섯 살 때인가, 괴물 영화 ‘고질라’였다. 어두운 극장에 앉아 영화를 보는데, 마을이 다 파괴되고, 사람들이 그 괴물에게 밟혀 죽어나간다. 무서웠는데, 그 무서움을 보는 게 즐거움 중 하나였다. 영화를 보러 가면, 불이 꺼지고, 어두워지면서 ‘이제 무서운 일이 일어날 거야’ 하는 기대감이 주는 즐거움이 있지 않은가. 그때 처음 공포 영화는 무서워야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기대감을 줄 수 있다는 걸 느꼈다.”

-그때부터 영화감독의 꿈을 꾼 건가.

“아니다. 내가 영화감독이 된 건 우연이다. 영화를 좋아했지만, 내가 감독이 돼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작품을 찍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릿쿄대학 재학 시절 영화 동아리 활동을 했다던데.

“그건 정말 취미였다. 학창 시절 딱히 꿈이 있진 않았다. 다만, 중학교 때부터 생물학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고, 전공도 생물학으로 가고 싶었는데 대학 문턱이 높아 사회학으로 갔다. 사실 공부에 대한 열정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뭐가 돼야지, 뭐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깊이 안 했다. 영화 동아리를 한 건 정말 영화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영화 전문 학교도 아니었고, 필름으로 영화 제작하는 걸 그냥 좋아했다.”

영화 ‘큐어’는 일본 도쿄에서 같은 방식의 엽기적 연쇄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체포된 범인은 하나같이 평소 아무 문제 없었던 평범한 사람이라는 점에 의문을 품은 한 형사가 사건 진실을 파헤쳐가는 내용이다.

-영화 ‘큐어’는 어떻게 탄생했나.

“영화 ‘양들의 침묵’을 보다 영감을 받았다. 영화에서 굉장하다고 생각했던 요소가 FBI인 클라리스가 한니발 렉터를 잡아 수감된 정신 병원으로 찾아간다. 그동안은 범인을 계속 잡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제 잡혀 있다. 영화도 범인이 누군지 아는 상태에서 진행된다. 그런데도 무섭다. 이 아이디어가 너무 참신하다고 생각했다. 그걸 보고 전반부는 형사가 범인을 잡으러 다니고, 중반부터는 잡힌 범인과 형사가 대화를 나누고, 그러다 형사가 이상해져서 다시 범인이 도망가고. 그런데 범인이 잡힌 중간부터 더 많이 무서워지는 것이다. 이게 잡으러 가기보다 더 무서워지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하고 바로 들어가서 영화의 큰 틀을 잡았다.”

1997년 일본에서 ‘큐어’가 개봉될 당시 일본 사회는 혼란스러웠다. 원래 제목은 ‘전도사’였지만, 1995년 옴진리교가 자행한 테러 사건이 발생하면서 제목이 바뀌기도 했다.

-한국과 북미에서 ‘큐어’가 다시 주목받는다는 건, 사회가 다시 혼란스러워졌기 때문일까? 영화를 보는데 최근 국내에서 발생한 ‘이은해 계곡 살인 사건’도 떠오르더라.

“그 영화를 제작할 때 난 20년 후를 전혀 생각하지 못했고, 그 시대상을 반영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단순히 나는 이 영화를 관객이 보면 재미있을 것 같아 제작했는데, 사람들 마음과 그 옛날 영화가 닿아 지금 개봉하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큐어’를 최근에 다시 보니 어떤가.

“음악을 과하게 쓴 듯해 부끄럽더라.”

-그게 왜 부끄러운가.

“난 영화에 감독의 의도가 묻어나면 영화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난 영화를 좋아하는 것 외엔 장점이 없는 보통 사람이다. 그러나 나와는 반대로 영화 그 자체는 훌륭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난 평범한 삶을 살고 있지만, 세상 어딘가에는 완벽한 영화의 틀이라는 것이 존재할 것이고, 난 그 어딘가에 있는 완벽한 영화의 틀을 찾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 속에 평범하고 재미없는 내가 묻어나는 것이 너무 부끄럽다. 그래서 영화를 볼 때마다 생각한다. ‘제발 너(나)는 보이지 마라.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관객들에게도 부탁한다. ‘제발 영화에서 나를 찾지 말라’고.”

-한국 감독들은 구로사와 감독을 존경하는 이유로 영화 촬영 기법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한다.

“그 부분은 잘 모르겠다. 영화는 현실이다. 스케줄이 정말 빠듯하다. 어떤 날은 태양이 뜨고 태양이 질 때, 이 장면을 어떤 시간대에 딱 찍어야 한다. 내 책임은 내가 찍어야 하는 시간에 최대한 제대로 된 장면을 찍는 것이다. 어떻게 연출하느냐보다, 저예산으로 얼마큼 효율적으로 찍을까가 내 최대 고민이다. 영화를 찍을 때도 솔직히 이 생각밖에 안 한다. 내 연출 기법이 어떤지도 모르겠다.”

◇일본 영화, 전쟁 가해자 입장 다뤄야

구로사와 감독의 영화 색채가 바뀐 건 2008년 작 ‘도쿄 소나타’부터다. 실직한 아버지와 천재 피아니스트 아들, 늘 외로운 어머니와 갑자기 미군에 지원한 형. 이 네 가족의 이야기로 구로사와 감독은 공포 영화에서 드라마로 완벽하게 안착했다. 최근작은 2020년, 일제강점기 일본군의 한국·중국인 포로 생체 실험을 다룬 ‘스파이의 아내’다. 이 작품으로 구로사와 감독은 그해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다.

-’스파이의 아내’는 어떻게 촬영하게 됐나.

“내가 쓴 원작은 아니다. 하마구치 류스케와 노하라 타다시가 ‘이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며 내게 각본을 갖고 왔다. 읽어보니 너무 재미있어 같이 작업하게 됐다.”

-전쟁 침략자로서 일본 이야기를 다루기는 쉽지 않았을 텐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 영화는 가해자로서 일본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투자받기 쉽지 않았다. 영화가 공개된 후에는 양쪽 진영 모두에서 공격을 받았다. 한쪽에서는 ‘반성이 부족하다. 왜 이렇게밖에 못 그렸느냐’고 비판했고, 다른 쪽에서는 ‘왜 일본의 부끄러운 역사를 영화화하느냐’는 공격이 있었다. 양쪽 다 이해는 하는데, 난 영화라는 것은 최대한 냉정한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본에는 전쟁 영화가 굉장히 많지만, 대부분 피해자 입장이다. 일본도 전쟁에서 공습을 받았고, 원자폭탄도 떨어졌기 때문에 피해자적 입장에서 굉장히 슬프게 그려진다. 그것도 틀리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가해자 입장의 영화도 많이 제작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그런가.

“전쟁이란 자체가 굉장히 잔혹한 것이기 때문이다. 난 전쟁이 어떻게 인간을 억압하는지를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전쟁 영화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2006년 작)’와 ‘아버지의 깃발(2007년 작)’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같은 주제를 가지고 일본군의 시선과 미군의 시선이라는 두 영화를 제작했다. 이 둘은 전쟁이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잔혹하고 힘든, 긴장된 경험이라는 점을 잘 표현했다. 우크라이나 전쟁도 매일 뉴스로 접하고는 있지만, 그 실상에 대해서는 내가 말할 수 있을 만큼 잘 안다고 할 수 없지 않은가.”

-투자자가 붙지 않으면 영화 제작은 어렵지 않은가?

“NHK가 각본을 보고 협조해 줬다. NHK 세트장과 기술 스태프를 모두 쓸 수 있었다. 그래서 통상적 영화 촬영에 드는 예산보다 더 적은 예산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영화 ‘큐어’부터 ‘도쿄 소나타’ ‘산책하는 침략자’ ‘스파이의 아내’까지, 부부간 대립이 주요 사건 중 하나다.

“부부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과 이루는 관계이기 때문에 가장 큰 드라마가 만들어진다. 한집에 살면서 같이 식사하는데, 각자 뭘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경우도 많다. 이 단순한 장면으로 두 사람이 어디까지 진실을 알고 있고, 신뢰하고 있는지에 따라 굉장한 서스펜스를 표현할 수 있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요소이기도 하다. 부부 간 대립 신(scene)은 가장 저렴하게 찍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하하! 이를 인지하기 시작한 것이 ‘큐어’다. 큐어의 큰 틀은 형사가 범인을 쫓아다니면서 수사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신들로만 영화를 구성하면 돈과 시간이 많이 든다. 그런데 그 안에 전혀 생각하지 못한 부부 관계가 나온다. 겉으로는 두 사람이 식사하고 대화할 뿐인데, 일상적이지 않아 서스펜스가 생성되는 것이다.”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은가.

“완벽한 영화. 내 개인의 것이 전혀 담기지 않은 그 자체로 완벽한 영화. 그 목표는 1970년대 미국 영화다. 나도 젊었고, 가장 영화를 많이 본 시기다.”

인터뷰 장소에는 구로사와 감독이 대학 시절 영화 동아리에서 만난 아내가 동행했다. 그에게 “남편의 영화 중 딱 하나만 꼽는다면?” 하고 묻자, “‘스파이의 아내’요. 그러나 전 극중 아내(아오이 유우)처럼 남편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을 거예요”라고 답했다. 그 말에 구로사와 감독은 “다시 강조할게요. 이건 제가 쓴 대본이 아니에요. (하마구치) 류스케 대본이에요” 하며 웃었다.

-인터뷰하기 전에는 작가주의 감독, 예술 영화 감독, 공포 영화의 거장이라는 수식이 주는 무거움이 있었는데, 실제 이미지는 정반대다.

“난 내가 작가주의라거나, 예술 영화를 만든다는 건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다. 영화는 혼자 만드는 게 아니라, 배우 등 다양한 사람의 재능이 조합돼 태어난다. 그래서 난 예술인이 아닌 장인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