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임윤찬이 지난달 미 텍사스주 포트워스에서 열린 반 클라이번 콩쿠르 무대에서 열정적으로 연주하는 모습. /반 클라이번 콩쿠르

“아침에 눈뜨고 새벽 2시에 잘 때까지 계속 듣고 있습니다. 평생 피아노 소리 지루해서 못 들었는데 며칠째 무슨 일인지 모르겠네요.”(76세 할머니)

“마치 그랜드캐니언에 섰을 때의 압도감.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 중 제4번 ‘마제파’ 마지막에서 그가 잠깐 멈췄다가 다시 치는데 훅 눈물이 쏟아졌다. 슬프지도 않은데 왜 눈물이 나는지, 울면서 계속 듣는다.”(51세 남성)

18세 소년의 마법 같은 연주에 전 세계가 흠뻑 빠졌다. 올해 반 클라이번 콩쿠르 역대 최연소 우승자인 피아니스트 임윤찬 연주 영상에 골수 음악 팬뿐 아니라 ‘클알못(클래식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감동 댓글이 쏟아지고 있다. 대회 결선 실황을 담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영상은 7일 현재 유튜브 조회 수 434만회를 기록 중이다. 40대 손모씨는 “실황 영상만 계속 돌려보다가 유튜브 알고리즘을 따라가 보니 파생 영상들이 엄청나더라. 피아니스트인 유튜버가 연주에서 ‘숨이 멎는 포인트’를 하나하나 설명해주는가 하면, 준결승 무대인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을 악보와 함께 편집해 올린 유튜브도 인기”라고 했다.

그야말로 ‘임윤찬 신드롬’이다. 8월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리는 임윤찬의 협연 무대는 이미 매진됐고, 2020년 녹음한 피아노 음반은 서점가 클래식 베스트 1위에 올랐다. 임윤찬이 읽었다는 단테의 ‘신곡’도 ‘임윤찬 효과’를 봤다. 민음사 관계자는 “책을 언급한 지난달 30일부터 5일간 전년 동기 대비 3배 가까이 판매량이 늘었다”고 했다. 임윤찬의 스승인 손민수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사사한 피아니스트 러셀 셔먼(92)의 책 ‘피아노 이야기’까지 판매가 껑충 뛰었다. 주연선 은행나무 대표는 “한 달에 50~60부 나가던 책이 우승 후 500부 이상 팔려 현재 재고가 없다”고 했다.

임윤찬의 소속사 목프로덕션 이샘 대표는 “전 세계에서 음반과 공연 의뢰 이메일이 쏟아지고 있어 신중히 검토 중”이라며 “출판, 방송, 광고까지 요청이 쇄도하지만 공연 이외엔 전부 정중히 거절하고 있다”고 했다. 전례 없는 신드롬, 원인이 뭘까.

임윤찬이 지난달 열린 반 클라이번 콩쿠르 결선에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협연하는 모습. /반 클라이번 콩쿠르

◇셔먼-손민수-임윤찬으로 이어진 인문 교육

임윤찬은 우승 후 귀국 간담회에서 “단테의 ‘신곡’은 여러 출판사의 번역본을 모두 구해서 읽었다”며 “유일하게 전체를 외우다시피 할 만큼 읽은 책”이라고 말했다. 리스트의 피아노 연작(連作) ‘순례의 해’ 가운데 ‘이탈리아’의 마지막 곡이 ‘단테 소나타’. 그는 2020년 금호아트홀 독주회에서 이 곡을 연주할 당시부터 ‘신곡’을 거듭 읽었다.

10대 소년은 왜 단테를 외울 만큼 읽었을까. 임윤찬의 스승인 손 교수의 가르침, 나아가 손 교수의 스승인 러셀 셔먼의 인문 정신에 답이 있다. 손 교수는 미국 보스턴 명문 뉴잉글랜드 음악원 유학 시절 ‘건반 위의 철학자’로 불리는 셔먼을 사사했다. 손 교수는 2년 전 본지 인터뷰에서 “열여덟 살에 셔먼과 그의 아내 변화경을 만나고 음악에 마음을 붙였다”고 했다. 셔먼은 ‘율리시스’ ‘신곡’ 등 고전을 읽은 뒤 리포트를 쓰게 했고, ‘뉴욕 리뷰 오브 북스’ 잡지를 의무적으로 읽혔다. “읽지 못했다고 답했다가 호되게 야단맞은 적이 있다. 반쪽짜리 음악가, 손만 돌아가는 기계가 될 거냐고 화를 내셨다.” 종이 신문 스크랩도 주기적으로 해야 했다.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등에서 파키스탄 강진 현장 르포, 새로운 우주 형성 가설 소식 등 사회·문화·과학 기사들을 오려 스크랩했다. 손 교수는 “완벽하게 안 틀리고 쳤다고 칭찬받은 적은 없다. 그건 오히려 놀림감의 대상이었다. 반면 나만의 음악을 찾아온 것 같으면 칭찬을 많이 해주셨다”고 했다.

손 교수는 스승의 철학을 이어받아 임윤찬에게 독서 리스트를 만들어줬다. “셔먼이 그 과정을 통해 삶의 태도, 음악가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보여주고 싶었던 것처럼” 기교 자체에 함몰되지 않는 연주를 하게끔 문을 열어준 것이다.

반 클라이번 콩쿠르 결선에서 라흐마니노프 3번을 협연하는 임윤찬(왼쪽)과 지휘자 마린 알솝. /반 클라이번 콩쿠르
반 클라이번 콩쿠르 결선에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협연을 끝낸 임윤찬을 지휘자 마린 알솝이 안아주는 모습. /반 클라이번 콩쿠르

◇만족할 때까지 연습, 또 연습

수상자가 발표된 순간, 임윤찬 옆에서 환호하는 외국인 부부가 눈에 띄었다. 콩쿠르 기간 임윤찬이 머문 미 텍사스주 포트워스 하숙집 주인(호스트 패밀리)이다. 반 클라이번 콩쿠르는 주최 측에서 모든 참가자에게 호스트 패밀리를 연결해주고, 콩쿠르 현장과 같은 사양의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연습용으로 보내준다. 임윤찬은 대회 직후 현지 인터뷰에서 “매일 새벽 4시까지 연습해서 눈치가 보였는데, 하숙집 주인분들이 전혀 상관없다고 편하게 해주셨다”고 했다. 하숙집 주인 제프 데트와일러씨는 임윤찬의 한 연주 영상에 댓글을 남겼다. “윤찬의 전형적인 연습 스케줄은 오후 1~2시쯤 시작해 새벽 4시쯤 끝이 났다. 그는 짧은 악절을 휴대폰에 녹음하면서 여러 번 쳤고, 만족할 때까지 같은 과정을 반복했다. 그가 한국으로 돌아가서 우리 집은 너무 조용하다. 이렇게 경이로운 사람과 우리 삶을 공유했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모른다. 브라보 윤찬!”

임윤찬이 지난달 반 클라이번 콩쿠르 준결승에서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 연주를 끝낸 뒤 백스테이지에 앉아 탈진해 쉬고 있다. /반 클라이번 콩쿠르

손 교수는 방송 인터뷰에서 “보통 사람의 인내심에는 한계가 있고, 어떤 악절을 연습하다 보면 이만하면 되겠지 안도하려는 본능이 있는데, 윤찬이는 가장 높은 기준을 향해 절대 만족하지 않는다”고 했다. “어떤 방해물도 다 쳐내고 자기만의 길을 만들어나가는 것 같다. 그래서 윤찬이 연주를 볼 때는 작곡가와 사적인 공간에서 둘만이 대화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 과정은 도 닦는 것, 수도승이 자기 마음을 단련하는 과정과 비슷하다.”

지난달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우승한 임윤찬(왼쪽에서 두번째) 등 수상자들이 대회 심사위원장이자 결선 지휘를 맡은 마린 알솝(오른쪽에서 두번째) 등 관계자들과 함께 포즈를 취했다. /반 클라이번 콩쿠르

전문가들은 “보통 콩쿠르 우승자들은 우승을 했기 때문에 유명해지는데, 이번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임윤찬은 매 라운드마다 연주 자체로 이미 화제가 됐다”며 “누가 봐도 압도적인 우승이었다”고 말한다. 피아니스트 조은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지구가 인류에게 공들여 점지한 피아니스트가 한국의 조성진이라 여기며 자랑스러웠는데, 예상보다 훨씬 단시간 만에 또 하나의 점지가 일어난 듯해 가슴이 막 벅차오른다”고 소셜미디어에 썼다. 허명현 음악칼럼니스트는 “임윤찬은 워낙 신동으로 알려져 있었고, 2019년 윤이상 국제음악콩쿠르에서 15세에 최연소 우승을 차지한 이후에도 여러 무대에서 차원이 다른 연주를 들려줬기 때문에 관객들이 이번 콩쿠르 우승을 응원하면서 한 편의 성장 드라마를 보는 느낌이 들었을 것”이라며 “18세라고는 믿기지 않는 실력과 표현력, 신비로운 예술가의 매력까지 있어 사람들이 더 열광하는 것 같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