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루마니아. 대학생 가비타(로라 바질리우)는 분주하다. 살짝 들뜬 듯한 기분으로 짐을 꾸리고 있다. 얼핏 보면 여행을 준비하는 것 같다. 심지어 여기저기서 돈을 꾸기도 한다. 하지만 룸메이트인 오틸리아(안나마리아 마링카)는 가비타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고 있다. 원치 않는 임신을 했고, 낙태를 하려고 예약해둔 모텔로 향하기 위해 짐을 싸고 있는 중이다.

일러스트=유현호

당시 루마니아에서 낙태는 불법이었다. 엄벌로 다스리는 중죄였다. 산부인과 의사들, 그 외에도 임신중절 시술을 할 줄 아는 사람은 모두 경찰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 가임기 여성들 역시 마찬가지. 똑 부러지는 성격의 오틸리아는 우유부단하고 무책임하기까지 한 가비타를 이끌고 감히 ‘범죄’를 저지르려 한다. 2007년 칸 국제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의 내용이다.

이 영화의 맥락을 이해하려면 1962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볼 필요가 있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낙후한 국가였던 루마니아는 1962년 출산율이 평균 2.1명 이하로 떨어지는 충격을 경험한다. 안 그래도 가난한 나라에서 인구 증가가 멈춘다면 밝은 미래를 기대할 수 없으리라는 비관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1965년 루마니아 공산당 서기장이 되어 권력을 손에 쥔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과격한 해법을 제시했다. 여성 인권을 근본적으로 무시하는 인구 증가 정책을 펴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를 낳지 않거나 적게 낳는 여성에게 무거운 세금을 물리고, 비밀경찰을 동원하여 여성들의 피임을 방해했다. 심지어는 여성들을 4인 1조로 산부인과에 보내 월경 여부를 검사하기까지 했다. ‘인간을 낳는 가축’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토록 난폭한 정책을 시작한 것은 1966년 일. 이듬해, 과연 출산율이 늘었다. 그것도 두 배로 늘어났다. 하지만 기뻐할 일이 아니었다. 산부인과와 소아과 의사가 부족한 가운데 일단 태어난 아기들이 제대로 치료나 관리를 받지 못하고 죽어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유아 사망률이 145%나 폭증했다. 버려진 아이들로 고아원과 보호 시설이 넘쳐났다. 이른바 ‘차우셰스쿠의 아이들’이라는 사회적 문제 집단이 만들어졌고, 그 아이들은 훗날 차우셰스쿠 정권을 무너뜨리는 시위에 앞장선다.

차우셰스쿠는 절대적 권력을 휘두르던 독재자였다. 북한의 김일성과 서로 흠모하는 사이였으며 의형제를 맺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그런 권력자라 해도 여성의 인권을 무시한 채 ‘국력’ 같은 가치를 앞세우는 출산 장려책을 성공시킬 수는 없다. 아이를 낳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국가가 정책을 강요하면 국민은 대책을 세운다.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의 주인공 오틸리아가 겪는 일 또한 마찬가지다. 가비타는 일을 야무지게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불법 시술자인 ‘베베’와 약속한 모텔을 제대로 예약해놓지 않았고, 그래서 허둥지둥 다른 장소를 잡는다. 가비타는 심지어 본인이 임신 2개월이라고 거짓말을 해놓았는데, 그 사실을 뒤늦게 안 베베는 분노한다. 4개월 된 태아를 낙태하면 살인죄가 되고 감옥에서 5년 이상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베베는 자신이 너무 큰 위험을 무릅쓰고 있다며 ‘보상’으로 가비타와 오틸리아에게 성관계를 요구한다. 공산주의 독재자가 여성들을 지옥으로 몰아넣고 있었던 것이다.

2022년의 현실로 돌아와 보자. 지난 6월 25일, 미 연방대법원 판결로 미국을 넘어 세계가 발칵 뒤집혔다. 태아가 자궁 밖에서 생존이 가능한 24주 이전까지 여성의 임신 결정권을 보장하던 ‘로 앤드 웨이드’ 판결을 뒤집은 것이다. 연방대법원의 다수 의견은 단호했다. 낙태를 법으로 처벌할지 여부는 각 주 혹은 연방의회가 입법을 통해 결정할 문제이지 대법원이 헌법을 해석하여 정할 수는 없다는 취지다. 외견상으로는 사법 적극주의 대 사법 소극주의의 싸움이지만 이면의 쟁점은 분명하다. 여성의 선택권이냐, 태아의 생명권이냐 하는 갈등이다.

나는 ‘태아의 생명권’을 옹호하는 입장의 근거가 빈약하다고 생각한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 수정될 때부터 ‘생명’으로서 보호받아야 한다는 주장은 현실성이 없기 때문이다. 요즘 흔히 이루어지는 인공수정만 해도 그렇다. 여성의 난자에 남성의 정자를 투입하여 여러 수정란을 만들고, 그중 건강한 것을 골라 자궁에 주입하고 나머지는 버린다. ‘태아의 생명권’을 옹호하는 이들의 논리대로라면 인공수정은 동시에 낙태이며 수정란의 생명권을 침해하는 것이다. 상식적이지 않은 소리다.

생명을 존중하는 종교적 가치를 무시할 수 없다는 주장 역시 허점이 있다. 기독교와 달리 유대교는 여성의 낙태를 죄악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믿는 산부인과 의사에게 낙태 시술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면, 유대교를 믿는 산부인과 의사에게는 낙태 시술을 할 권리가 있어야 마땅하다. 실제로 이번 연방대법원 판결에 반발하는 이들은 이러한 종교의 자유 논리를 들어 또 다른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태아는 생명’이라며 간단히 말할 수 있을 만한 사안이 아닌 것이다.

‘여성의 선택권’이라는 구호는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안전하게 임신중절을 할 수 있는 권리는 단순한 ‘선택’ 여부를 떠나 건강 및 생명권과 직결돼 있기 때문이다. 1966년부터 1989년까지 루마니아에서 벌어졌던 일이 그것을 증명한다. 위험한 불법 시술을 받다가 목숨을 잃은 루마니아 여성은 최소 9000명에 이른다. 그들이 죽지 않고 살았다면 설령 출산율이 1.0에 머물렀더라도 아기 9000명이 더 태어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여성의 인권은 마땅히 보호받아야 한다. 여성의 생명을 소중히 해야 태아의 생명도 지킬 수 있다.

‘태아를 변기에 버리면 막힌다.’ 베베의 충고는 끔찍하리만치 현실적이었다. 가비타의 몸에서 넉 달을 자란 태아는 사람 꼴을 갖추고 있었고, 오틸리아는 죽은 태아를 버리고자 어두운 골목을 헤매고 다닌다. 연방대법원의 판결로 곧 낙태가 금지될 주에서 살아가는 미국 여성들 역시 비슷한 심정 아닐까. 한국은 낙태죄 위헌 결정이 내려진 지 3년이 넘었지만 국회가 대체 입법을 미루고 있다. 여성의 인권뿐 아니라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법적 공백을 없애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