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서 비만큼 반갑지 않은 소식이 있을까. 그런데 오랜 가뭄 끝 단비는 요즘 말로 ‘오히려 좋다!’ 물기 잔뜩 머금은 숲에선 짙은 초록 내음이 피어오르고, 땡볕에 맨살을 드러내며 버석거렸던 땅도 폭신해졌다. 계곡과 개울 사이 모처럼 굽이쳐 흐르는 물소리가 반가운 요즘. 메말랐던 감성마저 비와 함께 촉촉해지던 날, 충남 서산으로 떠났다. 잿빛 하늘 아래 바다와 마주하고, 비가 잦아들 즈음 우산 쓰고 읍성을 거닐었다. 불볕더위가 시작되기 전 ‘수분 완충’했던 우중 여행.
◇하루 두 번 열리는 웅도 잠수교
“어민들에게도 6·7월에 내리는 비는 ‘고마운 비’예요. 장마 기간엔 어업 활동이 제한되지만, 비가 때맞춰 적당히만 내려주면 갯벌과 바다가 더욱 풍요로워지죠. 장마가 끝나면 갯벌은 훨씬 더 생동감이 넘칠 겁니다.” 서산 웅도리 마을 주민 김봉곤씨가 말했다. 온종일 비가 내렸던 지난 30일, 잿빛 하늘 아래 드넓게 펼쳐진 가로림만 웅도(熊島)의 갯골 사이로 비와 바닷물이 섞여 스며들었다. 비를 핑계로 어민도, 배도, 펄도 잠시 쉬어가는 시간. 여름 장마에 바다는 숨을 고르고 있었다.
대산읍 대로리와 연결된 섬 웅도는 6·25전쟁 때 인민군도 들어오지 못했다던 외딴 섬이었다. 1.5㎢ 규모에 5㎞ 정도의 해안선을 품은 아담하고 운치 있는 이 섬은 서울에서 불과 2시간 거리. 비교적 가까이 있는데도 섬 안까지 오가는 버스조차 없다. 총 60세대, 130여 명의 섬 주민들이 시내버스를 이용하려면 버스 운행 시간에 맞춰 웅도 잠수교를 건너 모개섬 정류소로 가야 한다. 대신 ‘100원 택시’라는 게 다닌다. 서산시에서 차가 없는 어민들에게 제공하는 일종의 택시 이동 서비스인데 하루에 두 번 썰물 때에 맞춰 웅도 잠수교가 드러나는 동안에만 이용 가능하다. 섬 안엔 그 흔한 카페나 식당조차 눈에 띄지 않는다. ‘웅도 어촌휴양마을 체험 수련관’ 외 어민들이 직접 운영하는 민박과 펜션도 여섯 곳밖에 없다. “그마저도 많이 늘어난 것”이라는 게 김봉곤씨 말이다. 자연의 시간표에 따른 ‘간헐적 고립’ 덕분에 섬은 아직도 때 묻지 않은 어촌의 정취를 오롯이 간직하고 있다.
간조와 함께 바다가 내어준 ‘머드 카펫’을 따라 200여m 잠수교를 건너 웅도로 입도했다. 섬 초입에서 탐방객을 맞는 건 ‘해안 산책로’다. 밀물과 썰물에 따라 바다 혹은 갯벌을 가까이에 두고 걸을 수 있는 길이다. 해안선을 따라 시계 방향으로 가면 거북바위를 비롯해 두꺼비바위, 꼬지곶갑부리, 굴 바위, 여우골 바위, 둥둥 바위 등이 차례로 이어진다. 아담한 섬은 탐험하듯 둘러보기 좋다. 현재 웅도 어촌휴양마을 체험 수련관으로 운영 중인 웅도분교를 지나면 김해 김씨 사당도 나온다. 섬 안의 사당은 조선 인조 때 역적으로 몰린 문신 김자점이 귀양 와 머물렀다던 이야기가 남아 있는 곳. 다시 길을 따라 장골 방향으로 올라가면 마을의 수호신과 같은 400여 년 수령의 ‘웅도 반송’이 기다리고 있다. 비탈진 곳에서도 깊이 뿌리를 박아 오랜 세월을 견뎌낸 반송은 훼손된 가지 없이 온전한 풍채를 자랑한다.
세계 5대 갯벌 중 하나인 가로림만 내해의 정중앙에 자리한 웅도는 위에서 내려다보면 곰이 웅크린 형상을 닮았다는 설, 단군의 웅녀 탄생설과 연계되는 웅계(熊系) 혈통이 정착했다는 설이 전해진다. 주민들 사이에선 ‘곰 형상 설’이 우세하다.
웅도항 일대는 현재 소규모 보수·보강 공사(10월 5일까지 예정)로 다소 어수선하나 해안가 전망 쉼터나 선착장에 서면 매도를 비롯해 서해의 여러 섬이 마치 다도해의 축소판처럼 펼쳐진다. 잿빛 하늘 아래 겹겹이 이어지는 섬의 실루엣이 한 폭의 수묵담채화다. 바다 구경만으로도 행복하지만, 가로림만은 서해 해양생태계의 보고(寶庫)로 통하는 곳. 맑은 날 갯벌체험장에선 바지락 캐기, 망둥이 체험을 해볼 수 있다.
다시 밀물이 시작되고 웅도 잠수교가 서서히 물에 잠겨가면 갯벌 위 평범했던 다리는 ‘인생 샷’을 남길 포토존으로 변신한다. 다리 표면에 물이 찰랑찰랑 차오르거나 빠지기 시작하는 시간에 맞춰 웅도와 잠수교를 배경으로 사진 찍으러 발걸음하는 이들이 많다. 그날그날 조수와 일몰 상황에 따라 다양한 풍경을 선사한다. 웅도에서 자동차로 20여분 거리엔 서산9경인 삼길포항이 있다. 서산 북쪽 관문으로, 7.8㎞ 대호 방조제와 바로 이어지는 항구는 서산아라메길 3코스의 출발점이다. ‘삼길포 수산물직매장’과 함께 선상 어시장 ‘회 뜨는 선상’이 유명하다. 부두에 정박한 어선들이 그날 잡아올린 횟감들을 바로 손질해 준다. 삼길포항에선 낚싯배를 빌려 당일치기로 낚시하거나 유람선 승선 체험도 해볼 수 있다. 기상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운영한다.
◇읍성 둘레길 걷고, 고택서 빗소리 감상
해미면 남문2로에 있는 해미읍성은 ‘서산 역사 탐방’ ‘서산 성지 순례’ 첫 번째 코스로 꼽힌다. 전남 순천의 ‘낙안읍성’, 전북 고창의 ‘고창읍성’과 함께 조선 시대 3대 읍성 중 하나다. 높이 5m, 둘레 1.8km로 남북으로 긴 타원형의 읍성은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읍내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읍성은 조선 태종 때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쌓기 시작해 세종 3년 사이에 축성된 것이다. 평상시에는 행정 중심지였다가 비상시에는 방어 기지의 역할을 했던 곳이다. 충무공 이순신과도 인연이 있다. 선조 12년에 충청병마절도사 군관으로 부임해 10개월간 근무한 곳이기도 하다.
비가 보슬보슬 내린다면 운치를 만끽할 수 있는 우중 여행 코스가 된다. 남쪽의 정문 격인 진남루에서 무료 대여해주는 빨간색 ‘양심우산’을 쓰고 잘 닦인 성둘레길을 따라 서문인 ‘지성루’나, 동문인 ‘잠양루’까지만 둘러봐도 충분하다. 동헌, 내아, 객사, 민속가옥 등과 함께 천주교 순교 성지로 십자가의 길, 순교기념비 등이 있다. 소나무숲길과 대나무숲길이 있는 북문 쪽은 호젓하나 우천 시 길이 질퍽거려 추천하지 않는다. 문화해설사는 “맑은 날 일몰 무렵이나 은은한 조명으로 물드는 야간 개장 시간대에 찾으면 색다른 정취를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읍성 바깥은 ‘읍성 뷰’를 내세운 카페와 식당들이 두르고 있다. 유리창 빗방울 너머 읍성과 눈높이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카페 ‘해미당’이나 맷돌에 원두를 직접 갈아 핸드 드립 커피를 맛볼 수 있는 카페 ‘꽃빛’은 비 오는 날의 운치를 만끽하기 좋은 곳이다.
해미읍성에서 자동차로 10분여분 거리에 있는 운산면 고택 유기방가옥도 가볼 만하다. 고택 뒤편 야산을 노랗게 물들이는 ‘수선화 축제’로 봄에 인기 있지만, 비가 곁들여지는 날엔 고색창연한 고택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 대청마루에 앉아 하염없이 내리는 빗소리를 듣고 있으면 마음의 때마저 말끔히 씻겨나가는 기분이다. 커다란 연잎을 후두두 내리치는 빗소리, 빗물 대롱대롱 맺힌 거미줄, 마당에 소담스럽게 핀 풀꽃들이 비바람에 장단을 맞춘다.
◇비가 와도 ‘웃상’
운산면 상왕산 자락의 ‘용현계곡’은 장마로 오히려 수량이 풍부해졌다. 한동안 물이 없어 유명무실했던 계곡이었다. 계곡을 따라 바위틈에 찌들어 있던 때들이 이제야 씻겨 내려가고 모처럼 맑은 물이 흐르는 중. 비가 내린 후 풀 냄새, 흙 내음이 진동했다. 계곡을 곁에 두고 ‘마애삼존불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면 ‘백제의 미소’를 간직한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마애여래삼존불)과 만난다. 백제 말 화강암 암벽에 조각한 마애여래삼존불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마애불 중 아름답기로 손꼽힌다.
가운데 석가여래입상은 엄숙하면서도 넉넉한 미소로, 왼쪽의 제화갈라보살입상은 온화하고 부드러운 미소로, 오른쪽 미륵반가사유상은 천진난만하고 꾸밈 없는 미소로 맞이한다. 불상의 미소는 빛이 비치는 방향에 따라,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각기 다르게 보이는 게 특징이다. 80도로 기울어져 있어 비바람이 정면으로 들이치지 않는 미학적 설계도 뛰어나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자애로워 보이는 ‘웃상(웃는 얼굴)’은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며 덩달아 입꼬리가 올라간다. 마애여래삼존불을 만나고 내려와 숲속 쉼터인 용현집에서 용현자연휴양림 방면으로 900m 위로 올라가면 마애여래삼존불의 원찰이자 화엄10찰 중 하나였던 보원사지가 나온다. ‘마음을 여는 절’이란 뜻의 개심사와 함께 유홍준 교수가 추천한 서산 문화유산 답사 1번지다.
◇맑게 갠 날엔 노란 해바라기 밭
올여름엔 운산면 운산 교회 부근 도로변과 용장천 일대에 작년에 없던 풍경이 새로 생겼다. 마을 주민들이 지난 4월에 파종해 지난달 말부터 개화하기 시작한 1만여 송이 해바라기 군락이 장관을 이룬다. 용장천과 운산 교회 부근 왕복 2차로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온통 노란 물결이다. 개화하기를 손꼽아 기다렸던 사진 동호인들에 이어 차츰 입소문을 타면서 탐방객이 늘고 있다. 공식 이름도 없어 서산 운산 해바라기 밭이라 불린다. 양쪽 합쳐 3400㎡(1000여 평) 규모의 해바라기 꽃밭은 언뜻 장마 때면 자주 소환되는 일본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이곳을 찾은 서산 시민들 사이에선 벌써부터 ‘서산10경’이란 애칭이 붙었다.
서해 여행의 끝은 일몰. 남쪽 부석면 간월암이 일몰 명소로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웅도가 인기 여행지로 급부상하면서 웅도와 가까이 있는 대산읍 벌천포해수욕장(벌말해수욕장)이 새로 뜨고 있다. 벌천포 해안선 끝으론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고 그 숲을 꼭짓점 삼아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 해변으로 평일·주말할 것 없이 ‘차박’ 하는 자동차들이 길게 자리를 잡는다. 다만 해변에 경사가 있고, 몽돌해변 특성상 모래가 고르지 않아 “해수욕보다는 일몰”이라는 평이 많다. 벌천포해수욕장 부근 염전 풍경도 지나칠 수 없다. 물이 고여 하늘을 비춰내는 염전은 네모난 액자 형태의 거대한 설치 작품처럼 보인다. 물론 이 아름다운 풍경엔 입장료가 없다.
[ ‘붕장어 파 찌개’에 수제비, ‘바지락 부침개’에 막걸리 한잔 ]
비가 오면 생각나는 서산 그 맛집
비 오는 날엔 어쩐지 수제비가 생각난다. 서산에선 좀 색다르게 수제비를 즐기는 방법이 있다. ‘붕장어 파 찌개’에 수제비 사리를 투하해 즐기는 것이다. 서산을 포함한 서해 일대에선 ‘아나고 파 찌개’라는 이름이 더 익숙하다. 삼길포항은 우럭 축제(29~31일)를 열 만큼 우럭이 초강세이지만 비 오는 날엔 아나고 파 찌개를 찾는 이도 적지 않다. 삼길포항 부근 횟집 친구네 등에선 붕장어와 푹 익은 쪽파를 듬뿍 넣고 매콤하게 끓여낸 아나고 파 찌개(5만원부터)를 선보인다. 붕장어와 입에서 살살 녹는 제철 감자를 먼저 건져 먹고 나면 국물에 수제비를 추가해 알뜰하게 맛볼 수 있다.
지난 5월 웅도 초입에 ‘웅도슈퍼’와 함께 문 연 웅도집밥은 시골 밥상처럼 차려낸 백반(9000원)과 바지락칼국수(8000원)가 대표 메뉴다. 백반에는 시래기 된장국을 비롯해 박하지게장, 젓갈 등 서해 바다 내음 물씬 풍기는 반찬과 시골식 장아찌류가 7~8가지 상에 오른다. 인심 좋은 주인 김은미씨가 그날그날 차려내는 백반은 평일에는 주로 점심, 주말에는 점심·저녁 맛볼 수 있다. “물때에 따른 재료 수급이나 개인 사정으로 식사 제공이 어려운 날도 있다”고. 바지락을 섭섭하지 않게 넣어주는 바지락칼국수도 먹을 만하다.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이 있는 용현계곡엔 용현집이 있다. 동자개매운탕이나 토종닭백숙도 있지만, 미꾸라지를 갈아 고추장과 고춧가루로 양념한 얼큰한 국수 어죽(8000원·2인 이상 주문)이 별미다. 계곡 옆 나무 그늘에 앉아 도토리묵이나 김치전에 ‘낮막(낮에 마시는 막걸리)’을 즐기는 어르신이 많다. 하절기엔 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까지만 운영한다.
대산읍 황금산(코끼리 바위) 부근에 있는 덕수네가리비1호점은 이 구역 오래된 맛집. 젊은 층 사이에서 ‘서산 바다 뷰 가리비 맛집’으로 소문나며 다시 유명세를 타고 있다. 가리비는 2만원, 붕장어는 5만원부터. 가리비 구워 먹고, 매생이 넣은 해물칼국수를 곁들이는 게 코스다. 인근에 덕수여동생네도 있다.